[스크랩] 사서 전식 시장(沙西 全湜 諡狀)

2016. 5. 12. 09:06 인물열전

 

사서 전식 시장(沙西 全湜 諡狀)

 

諡狀(1)[權愈]

公諱湜字淨遠號沙西沃川全氏自高麗領同正諱學浚始大其後名卿世出太子中允孝格民部典書侑版圖判書淑其尤著者也至諱應卿贈吏曹參判卽公之高祖也曾祖諱彭祖國子上庠祖諱焜考諱汝霖凡三世曠僚及公貴贈考吏曹判書祖吏曹參判曾祖承政院左承旨妣貞夫人月城李氏新羅謁平之後參奉信之女也嘉靖癸亥正月二十一日生公少穎秀有志行甫羈貫雖弱不能執家苦以致養得一味必懷遺父母父母貧甚衣食不逮給然恐父母之憂己飢也雖循飢不言飢鄕黨稱全孝兒稍長讀書通義理力攻學不怠金沙潭弘敏器異之稱歎相屬己丑選司馬壬辰南寇之難公未解巾慨然有圖國難之志與進士姜霔倡義募聚士阻隘擊殺賊數十級或恐爲賊所乘欲前却公引大義益勵士不少沮左議政金公應南聞而奇之薦拜連原察訪連原賊所從道也郵吏卒被寇甚滌地死散公撫摩招懷承共郵事送逆通使命皆如符要觀察使美其能使公監收可興倉會訛言賊且至上下相驚撓亂公安挺志益治事不少撓督吏卒謹守倉日間乃定觀察使益知其能復使公管給湖西軍餉會倭報急體府蕩恐懼爲賊所據命焚積聚公執不從督守益嚴時見糧可萬斛石斗不妄屑越賴而給過我師其臨危守一志不見奪如此辛丑轉禮賓寺直長不就癸卯始登第當路者惡公不附己分隷成均館乙巳薦爲承政院注書時柄臣倡尊號議廷臣莫敢不回從惟嶺人持駁議當路者疑公敎使之謗聲嘈嘈公遂解落歸鄕丁未陞成均館典籍戊申出爲忠淸道都事國例都事掌刷邊民而搜刷寢廣多所侵冤公條言其狀委革刷令不中義者巡府有久訟歷政所不斷巡察使屬公平決公立得其情壓塞群疑湖民服公之明己酉拜禮曹佐郞俄陞正郞公旣通敏有才學稍承業而事望允集選部惜公屈欲薦公爲選部郞有戚里子先爲郞忌公守正不釋塞選部長令家人由忠問公意且勸公一見戚里子規塞公者以柔其心公笑謝不肯以此不果入選部辛亥除蔚山府判官修風政多愛利甲寅除金郊察訪病不赴又出爲全羅道都事時光海無道彝倫垂斁公遂棄官歸商山絶意於世與愚伏鄭公蒼石李公交志相友相羊不踐之地以自適世號商社三老己未遭母夫人喪庚申遭判書公憂處喪盡喪禮冢墓三年毀疾幾不支旣除喪拜慶尙道都事病不赴癸亥仁祖大王反正博衍時髦之湮替者拜公禮曹正郞兼記注官選知製敎選錄弘文館拜修撰陞校理每進講前席通明經義條解詳當上恒目禮焉任學士叔英嘗曰今之經筵官通古今鄭經世達事理全湜云由典籍拜司憲府掌令擧劾無所避間被排抵坐罷大臣白上曰全某林下力學之士宜置之言地敍拜直講甲子遷司僕寺正逆适擧兵叛上幸公山公從道拜司憲府執義時延平君李貴棄師臨津都元帥張晩逗遛不急踵賊後賊以此勢益張卒犯京城上狼狽南幸公啓論二人罪請按法晩之帳下士誚譟曰元帥有大功乃欲法之耶公肆悖亂語欲恐動臺閣公呼使前厲聲叱之曰使上蒙塵誰之罪也若曺亦人臣敢爾耶衆皆懾伏不敢復言上旣還都庸扈從勞陞通政階拜兵曹參議移同副承旨上命加金公諒折衝資公卽封還不奉旨公議多之乙丑轉左承旨辭遞復拜刑曹參議差朝京上使時淸人阻據遼東當路塞我使時節朝京不得從遼東路改由海路海波惡或敗溺不還諸奉使者皆憚不欲行辭說解故及公受使命若就夷途無毫毛畏恨意至皇城島逢大風飄鼓船幾覆舟中人懼五色無主公峙坐賦詩顏色不變忽見大鰌挾舟而行舟著岸乃去衆咸曰獲神助入皇都皇都人皆謂厚德宰相登州軍門武之望敬禮之尤隆而皇朝太史特書曰朝鮮使臣全湜來朝蓋嘉我朝之義而公實與有光焉舟中所賦詩至今傳於世丙寅歸復命丁卯春虜侵我至于海西上幸江都虜使劉海持虜書來請與上盟朝議欲許之公慨然卽上疏曰屈千乘之尊下與虜使盟恥也況狡虜變詐不可測安知旣盟之後不復有登等語耶欲望殿下奮發明斷斥還虜使急檄諸將守臨津使賊不敢渡而南命關西將士截浿江西虜進退失據可盡殲也時議臣牢主和議公言不果行尋移禮曹參議已而拜大司諫上箚論六事曰納諫諍曰去偏私曰修軍政曰減軍官曰勿恃和議曰勿爲譏察時諸勳貴人聚養幕下士以長耳目幾異己者動靜之爲故遇告輒周內之人聳懼莫敢言公能指事意直言無所諱及他語皆時所急論議士韙之自是累拜吏禮兵曹參議拜大司諫者四而皆辭以病或謝恩命乃歸蓋未嘗時月在朝公自以老病堅求外補爲慶州府尹羅都浩穰難治爲二南劇然德名先入民行爲人所孚不出聲氣而民自化至三年代歸吏民立石頌之曰爲政以德視民如傷三年惠澤汶水流長甲戌復拜大司諫時麟坪大君昏禮頗侈長公上疏言昔先王作經國典雖大君王子皆有制限蓋不然則無以觀敎四方今大君昏時衣服器用多越制恐非先王之意也上嘉納之又言紀綱日弛宮禁不嚴內言不宜出或出於外外言不足聞或聞於上此國患也又上疏論時政曰聖智出天有獨御一世之志直臣類不見容忠言多鬱於胷朝臣朋黨相排軋明主所大惡宜默運權綱以絶其漸不宜指成題目使得顯設門戶又曰天變疊見民怨日滋若是以往幾何其不亂亡也欲望聖王益溫舊學增進新功克出憤懥愛惡之偏痛革奢侈華靡之習字庶民猶同胞視群臣若四體言可利行不問疏賤害或及民不饒貴近日復留心於九經以爲治平基本疏凡累百言皆匡時之論已而辭遞拜兵曹參議大司諫皆辭拜禮曹參議請告歸鄕丙子正月聞仁烈王后薨旣奔哭卽歸拜大司諫副提學皆辭以病淸兵卒薄王京上入南漢公時在商山聞亂卽倡義募兵千餘穀數百斛進屯忠州會嶺南二節軍敗於雙嶺奔殪騰踐而歸義兵望見之以爲虜兵大至聳懼欲移陳避賊鋒公曰無恐吾已有度矣衆一散可復合乎申固其陳不動已而問之果敗兵也於是公知兵弱難敵巨寇退屯聞慶會淸人盟而歸上還京城公卽罷兵上道未至京拜副提學公請對上召見之迎謂公曰聞卿倡義予甚嘉之嶺軍徼兵再振以嶺南多士大夫明大義者故耳湖南人豈非嶺南人之罪人乎公涕泣謝曰老臣病不能任軍事主辱臣死之義臣實全負又曰新經大亂宜奮厲勤國政以幸時之反以昌先王之業而顧斂然自沮時月不御殿臣竊慨焉且比者十臣坐斥和繩逐不前後慮專爲大言固疏矣然罪斥之則不乃爲天下義夫嗤耶上慰藉之良厚尋拜吏曹參議特旨陞拜參判兼同知經筵春秋館事辭不許戊寅歷大司諫大司憲禮曹參判拜大司成上以湖南軍犯律命罰赴南漢城役三月公啓言湖南軍固有罪然農時不可奪請減朔上又命巡檢使治整三道舟師公又言三道民力匱瘁又督治舟師是重困民也又上箚論八事曰調養聖躬曰懋修實德曰革侈風曰廣言路曰振紀綱曰崇節義曰恤民隱曰罷內需司皆救時之要聞者皆歎服庚辰三拜諫院及憲府長皆辭不就大臣白上言全湜德望爲時所慕仰又篤老宜急大用公聞之自謂非我所度謙不敢造朝壬午大臣又白上曰全湜經幄重臣年八十宜有優老之恩上命加資憲階拜知中樞府事兼同知經筵春秋館事尋拜大司憲辭不赴是年十一月初七日卒于尙州第遠近聞公沒知與不知皆爲流涕門下士赴喪者數百人訃聞上輟朝致賻遣禮官賜祭命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世子貳師知經筵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癸未二月葬于尙之西柏田山巽坐之原又以子克恒原從功又贈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公爲人白晢頎然有器度事父母處兄弟一循其得於天者而幼長不少易無一言一動邀而爲自益意嘗曰事親之道只一箇誠而已早事西厓柳相國得聞爲學之要與愚伏鄭公蒼石李公平生相切磋講劘其淵源所漸蓋如此故終始所操持惟道與義無流心世之所以與公者雖方故多端挺然不稍綣公所知鄭仁弘及仁弘之爲光海陰臣絶不通至赴湖西幕道遇仁弘仁弘曰國不可爲矣大臣亦爲邪論大臣蓋指完平李相國元翼也公曰相公箚亘世正論乃謂之邪耶仁弘怒不復言棄官歸尙也仁弘過尙境公避不見當是時仁弘擅國權一視逆順已而成敗人恣意人莫敢迕公獨造次顯言折之所止於過所止邇不肯暫投足若將浼已雖仁弘心嗛之進塗立梗而猶不顧也其自立如此性宏亮和易風調祺然望之可知爲積行君子通明事物處義堅嚴平居不或有惰慢容急難不或有勃亂心屛居不見得失之色歷官不爲自潤計愚伏鄭公嘗稱公曰學識高明處事當理實委公德行而言非溢辭也然閱時昏明屢有進退及被詳延猶有所不能必於世者而必於在己者故謹於去就歸潔其身更請要官多而在朝之日蓋少以此終不得及年登偉仕傾所有而潤邦政旣老而徒受進而沒論德者至今恨惜之公之學蓋博通諸經史而尤深於胡氏春秋遺文稿若干卷藏于家前配江華崔氏無子後配南陽洪氏生三男一女曰克恒有文學官至正郞死丙子亂贈都承旨曰克恬監役曰克㤚業儒壻黃德柔郡守側室有三男二女男克忱克憕壻康鍒生員柳之洙生員克恒無嫡子子弟克恬之子側室男曰崇克恬有二男四女曰嶨,。李皬李埰別檢金學基黃袤克㤚有一男曰黃氏女有三男三女曰霦生員曰曰霆壻洪汝河司諫贈副提學成錫夏張萬紀縣監克憕男曰峸克男曰內外孫曾玄男女未附者亦累十人謹敍祖世所出平生所規爲歷職所注錯牒弘文館兼牒太常請案諡法易名以禮成之

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事藝文館提學權愈(2)

 

 

 

 

 

(1)시장[ 諡狀 ]

정의

임금에게 시호(諡號)를 내리도록 건의할 때 생존 시 행적을 적은 글.

내용

경국대전에는 종친(宗親) 및 문무관 실직 정2품 이상과 직위는 낮더라도 친공신(親功臣)에게 시호를 주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 밖에 대제학을 지낸 자는 종2품이라도 시호를 주었고, 유현(儒賢)이나 사절(死節)한 자로서 세상에 드러난 자는 정2품이 아니라도 특별히 시호를 주었다.

응당 시호를 받아야 할 사람이 죽으면 본집에서는 휘(((본관(本貫현조상(顯祖上출생·학력·관력(官歷이력·행적·자손·성품 등과 글을 작성한 사람의 성명을 기록한 행장(行狀)을 갖추어 예조에 바쳤다.

예조에서는 내용을 조회한 뒤 제사(題辭)를 써서 봉상시(奉常寺)에 보낸다. 그러면 봉상시정(奉常寺正)이 봉상시의 타 관원과 함께 시법(諡法)에 따라 시초(諡草 : 시호를 지을 때 시법에 따라 정해진 구문)의 글자를 모아 시장을 작성한다.

그 뒤 홍문관의 응교와 합석해 돌려가면서 열람하고 가부를 논한 다음에 세 가지로 시망(諡望 : 시호를 내릴 때 미리 세 가지를 정해 임금에게 올리는 일)을 의정해 예조에 다시 이첩하였다.

예조에서 행적을 참고해 첫 머리글자에 문신의 경우 문(), 무신의 경우 충()자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충절이 높은 문신에게도 충자 시호를 내리는 경우가 있었다.

이에 대해 의정부와 양사(兩司)의 서경(署經)을 거쳐 이조로부터 계청(啓請)해 낙점(落點)을 받아 회람한 뒤, 시장을 다시 봉상시로 돌려보내 간직하도록 하였다. 만약, 임금의 특별한 교지(敎旨)로 시호를 주게 되는 경우에는 시장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홍문관에서 날짜를 정해 봉상시에서 합석해서 정하였다.

또한, 유현으로서 시장을 기다리지 않고 시호를 내린 경우도 있는데, 이황(李滉)에게 문순(文純)’이라는 시호를 준 것이 최초의 예였다. 시호

참고문헌

태종실록(太宗實錄)

중종실록(中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시장 [諡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권유[ 權愈 ]

정의

1633(인조 11)1704(숙종 30). 조선 후기의 문신.

내용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퇴보(退甫), 호는 하곡(霞谷). 목사 훈()의 손자이며, 승지 형()의 현손이다.

1665(현종 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689(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대사간·예문관대제학 등 요직을 맡았다. 곧 지경연사(知經筵事)에 올랐으나, 1694년 갑술옥사로 서인이 정권을 장악할 당시 유배되었다.

스스로 고문사(古文辭)를 즐기고 청빈했으며, 시문에 능했다. 일찍이 민점(閔點)이 문형(文衡)을 추천할 때, 그와 이서우(李瑞雨) 두 사람을 놓고 얼른 선택을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명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운을 내어 재주를 시험하자, 그가 즉석에서 시를 지어 좌중을 놀라게 하여 문형에 올랐다고 한다. 예문관대제학 때 인경왕후지를 저술하였고, 조선 태조로부터 현종까지 역대 임금들의 열성어제(列聖御製) 편찬에 참여하여 증정(證定)하였다.

참고문헌

국조방목(國朝榜目)

숙종실록(肅宗實錄)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권유 [權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 전씨(全氏) 광장
글쓴이 : 한강의 언덕(전과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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