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휴계 전희철 묘갈(休溪 全希哲 墓碣)

2016. 5. 16. 14:57 인물열전

 

休溪 全希哲 墓碣

 

公諱希哲 字原明 號休溪 姓全氏 系出沃川 高麗同正諱學浚 卽鼻祖也 五世祖 奉翊大夫密直副使 版圖判書上護軍 奉沃川郡致仕 諱侑 高祖光韻 吏部典書 曾祖諱備 奉列大夫司僕少卿 祖諱貴德 通禮門奉禮 考諱禮 知印副錄事 妣商山金氏 副正尙保女 漢城左尹張忠翊外孫 以皇明洪熙乙巳 生公于沃川里第 贅居榮川之休川坊 生進 登武科 以大耊 陞通政副護軍 辛巳八月日卒 享年九十七 葬郡東七星山南麓負癸原 配淑夫人甘泉文氏 典籍孫貫之女 文掌令宋啓外孫 葬附公墓左 二男 長琥 弘治戊午生員 內資寺僉正 次珀將仕郞 顯陵參奉 三女 長適宣城金萬秤生員 次適冶城宋碩忠生員 次適全州柳坦都事 通政公以沃川邱墓所在 榮之相距遠 省掃恐不以時 送長琥 還沃川 有二男 長賜穎副司果 次摯穎縣令 三女長適李元長 次適朴檜 次適金遂性文參議 珀五男 長應福內禁衛 次應房生員 次應斗生員 次應璧參奉 次應參生進 一女適李弼臣 金萬秤二子 金佐參奉 金佑贈承旨 宋碩忠四子 宋儼僉知 宋儀贈參議 宋侃 宋偁上將 柳坦二子 柳應禎柳應祐 一女適崔承張承旨 曾玄以下 不能盡記 日其後孫在欽甫言曰 先祖墓 舊有碣 殆盡剝落 今將改竪 而世代綿邈 文獻無徵 凡公平生志事行治 不能響想其萬一 而獨性素剛直克守儉約八字 僅識於舊碣剝蝕之中 嗚呼 孔夫子不云乎 吾未見剛者 又曰以約失之者 鮮矣 公旣剛直而儉約則 卽此數句亦可以槩公之平日矣 豈不爲班豹采鳳之一羽毛耶 遂不揆僭猥 謹叙其世次子姓 竊附所感如右

 

金㙆謹撰

 

 

휴계 전희철(1) 묘갈(休溪 全希哲 墓碣)

 

공의 이름은 희철(希哲), 자는 원명(原明), 호는 휴계(休溪)이니 옥천 전씨(沃川全氏)이다. 시조는 고려조에 동정(同正)을 지낸 학준(學浚)이며, 5세조는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판도판서(版圖判書) 상호군(上護軍)으로 옥천군(沃川君)에 봉해진 뒤 벼슬을 그만둔 유()이다. 고조부는 광운(光韻)이니 이부 전서(吏部典書)를 지냈고, 증조부는 비()니 봉열대부(奉列大夫)의 품계로 사복 소경(司僕少卿)을 지냈으며, 조부는 귀덕(貴德)으로 통례문 봉례(通禮門奉禮)를 지냈다. 아버지는 예()로 지인부록사(知印副錄事)의 벼슬을 했고, 어머니는 상산 김씨(商山金氏)이니 부정(副正)을 지낸 상보(尙保)의 여식이요, 한성좌윤(漢城佐尹)을 지낸 장충익(張忠翊)의 외손이다.

공은 명나라 홍희(洪熙) 을사(乙巳)에 옥천리 본가에서 태어나 처가곳인 영천(榮川)의 휴천방에서 살았다. 생원 · 진사를 거쳐 무과에 급제하였고 연세가 높아 통정 부호군(通政副護軍)에 승진하였다. 신사(辛巳) 8월 모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은 97세였다. 묘소는 군의 동쪽 칠성산 남록 계방(癸方)을 등진 산등에 있다. 부인은 숙부인(淑夫人) 감천 문씨(甘泉文氏)이니 전적(典籍)을 지낸 손관(孫貫)의 여식이며, 문과에 급제해서 장령(掌令)을 지낸 송계(宋啓)의 외손인데 공의 묘소 좌측에 합장을 했다.

23녀를 두었으니 맏아들인 호()는 홍치(弘治) 무오(戊午)에 생원이 되어 내자시(內資寺) 첨정(僉正)을 지냈으며, 차자인 박()은 장사랑(將仕郎)으로 현릉참봉(顯陵參奉)을 지냈다. 맏딸은 생원인 선성 김만칭(金萬秤)에게, 둘째 딸은 생원인 야성 송석충(宋碩忠)에게, 막내딸은 도사(都事)로 통정에 오른 전주 류탄(柳坦)에게 각각 출가했다.

공은 옥천에 있는 선대의 묘소가 살고 있는 영천과 거리가 멀어 성묘를 제때에 하지 못할까 두려워해서 맏아들 호를 옥천으로 돌려보냈다.

호는 23녀를 두었으니 맏아들인 사영(賜穎)은 부사과(副司果), 차자인 지영(摯穎)은 현령을 지냈으며, 맏딸은 이원장(李元長)에게, 차녀는 박회(朴檜)에게, 막내딸은 김수성(金遂性)에게 각각 출가했는데, 김수성은 문과에 급제해서 참의를 지냈다.

()51녀를 두었으니 맏아들 응복(應福)은 내금위(內禁衛)를 지냈고, 둘째는 응방(應房)으로 생원이고, 셋째는 응두(應斗)로 생원이고, 넷째는 응벽(應壁)으로 참봉이고, 다섯째는 응참(應參)으로 생원 ·진사에 합격했으며, 딸은 이필신(李弼臣)에게 출가하였다. 김만칭(金萬秤)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좌()는 참봉이고, ()는 승지의 증직이 내렸다. 송석충(宋碩忠)은 네 아들을 두었으니 엄()은 첨지(僉知), ()는 참의에 증직되고, ()과 상장(上將)을 지낸 칭()이다. 류탄(柳坦)2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응정(應禎)과 응우(應祐), 딸은 승지인 최승장(崔承張)에게 출가하였다. 증손과 현손 이하로는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어느 날 공의 후손인 재흠(在欽)군이 말하기를 선조의 묘소에 구비(舊碑)가 있으나 글자가 거의 마멸이 되어 지금 다시 세우려고 합니다. 세대가 아득히 멀고 문헌도 남아 있지 않아 공이 평생통안 지닌 뜻과 행한 일을 그 만분에 일이라도 상상해 볼 수가 없습니다마는 성품이 본래 강직하고 검약한 생활을 하였다.[性素剛直克守儉約]’8글자는 마멸이 심한 옛 비석에서 겨우 확인할 수 있습니다.”고 했다.

! 공자께서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강()한 자를 아직 보지 못했다.”고 또한 검약 때문에 실수한 이는 드물다.”. 공이 이미 강직, 검약하다고 한다면 이 몇 구절을 통하여도 공의 평소 생활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니 어찌 빛나는 표범의 한 가죽과 문채나는 봉황새의 한 깃털이 되지 않을 것인가! 마침내 외람됨을 헤아리지 않고 삼가 그 세차(世次)와 자성(子姓)을 서술하고 느낀 바를 위와 같이 덧붙인다.

김굉(金㙆, 1739~1816) 삼가 짓다.

출처: 영주금석문전집

 

 

(1) 전희철[ 全希哲 ]

요약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낙향하여 절개를 지켰다.

출생-사망 1425 ~ 1521

본관 옥천(沃川)

원명(原明)

휴계(休溪)

활동분야 정치, 군사

세종(世宗) 때에 진사시(進士試)를 거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문종의 총애를 받아 벼슬이 상장군(上將軍)에 이르렀다. 하지만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자 30세의 나이에 벼슬을 그만두고 처가가 있던 영주(榮州) 휴천(休川)으로 낙향하였다. 그 뒤 단종이 영월(寧越)에서 죽자 삼년상을 지냈으며, 임종할 때에도 자손들에게 관직에 나서지 말고 매년 영월로 찾아가 단종의 묘소에 참배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희철 [全希哲] (두산백과)

 

출처 : 전씨(全氏) 광장
글쓴이 : 한강의 언덕(전과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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