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15. 13:39ㆍ 인물열전
◎ 전병훈[全秉薰]
요약
정신철학을 제창한 구한말의 유학자 및 도교 사상가.
출생-사망 1857 ~ 1927
자는 서우(曙宇), 호는 성암(成庵) 또는 운취당(云醉堂)이며 현빈도인(玄牝道人)이라고도 한다. 조선 철종 9년 1857년 7월 6일, 평안동도(현 평안북도) 삼등현(三登縣) 학서리(鶴棲里)에서 부친 전경(全璟)과 모친 완산 이씨의 외아들로 출생하였다. 전병훈의 생애는 그의 학문 여정에 따라 유학기(儒學期, 1857~1909), 선도기(仙道期, 1910~1916), 정신철학기(精神哲學期, 1917~1927)의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유학기
출생에서부터 관직에 나가 퇴직에 이르기까지, 전병훈(全秉薰)의 인생 전반을 아우르는 시기로 유학에 몰두하여 춘추대의와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을 내세운 시기이다. 1867년 11세에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계열의 학자인 운암(雲菴) 박문일(朴文一)의 문하에서 처음으로 성리학을 접했다. 1892년 그의 나이 35세 때에 의금부 도사를 제수 받고 관직에 나갔으며, 1898년 사회개혁 내용과 근거를 담은 《백선미근(百選美芹)》을 상소로 올리면서 인재등용과 군사개혁을 주장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전전하다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제기하는 상소를 올리고 좌천을 당하여 1907년 50세 때에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선도기
중국으로 건너가 고공섬(古空蟾)이라는 스승을 만나 도교수련에 매진한 시기에 해당한다. 1910년 광동으로 건너간 전병훈은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를 연구하는 한편, 한중대동학회(中韓大同學會)를 설립하여 중국학자들과 교류를 하고자 하였다. 이후 광동성(廣東省) 증성현(增城縣) 나부산(羅浮山)에 있는 도교 사당인 충허관(沖虛觀)에 들어가 고공섬이라는 도사(道士)를 만나 본격적인 도교수련을 시작하였다. 도교경전인 《도장(道藏)》 2천여 권을 연구하고 배움을 정리하여 《도진수언(道眞粹言)》이라는 책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정신철학기
자신의 사상을 집대성한 《정신철학통편(精神哲學通編)》을 집필하고 세상에 이를 전파한 말년 시기를 말한다. 원고 집필에 착수한 것은 1917년부터로, 그의 나이 60세에 북경으로 올라와 중국인 제자 우람전(于藍田)과 조선인 윤효정(尹孝定)을 만나 《천부경(天符經)》에 주석을 달고 이를 바탕으로 《정신철학통편》을 완성하였다. 이후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정신철학사(精神哲學社)라는 조직을 결성, 운영하였으며 이를 매개로 하여 다양한 중국 개혁사상가들과 교류하기도 하였다.
주요 사상
핵심 사상인 정신철학(精神哲學)은 도교의 사상을 현실에 맞게 새롭게 정립한 것으로 도교적 이론에 유교적 이념을 가미한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전병훈은 기존의 도교 내단사상이 지나치게 개인적인 목표 즉, 신선이 되고자 하는 이상에 치중하여 이상사회 건설이라는 사회 공익적 목표에 소홀했음을 지적하였다. 이에 도교에 부족한 경세론(經世論)을 보완하기 위해 유교의 대동사회(大同社會) 이론을 받아들여 내성외왕(內聖外王)의 이념을 도교 사상 내에서 구현하였으며, 현실 속에서 이를 구현할 정치제도로서 민주제(民主制)와 공화정(共和政)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저서
대표 저작으로 《정신철학통편 精神哲學通編》이 있으며, 이 외에 도교 내단학 사상을 정리한 《도진수언 道眞粹言》 십권, 《백선미근 百選美芹》 등이 있다.
출처
제공처 정보
두산백과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
[네이버 지식백과] 전병훈 [全秉薰] (두산백과)
● 박문일[朴文一]
조선 후기의 학자. 이항로의 문인. 학문, 덕행으로 명성이 높았다. 평안도 태천에 은거, 후진양성에 힘썼다. 많은 제자들이 지역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운암집》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문일 [朴文一] (두산백과)
○ 윤효정[尹孝定]
본관 파평(坡平). 호 운정(雲庭). 본명 사성(士成).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후 탁지부주사로 있었으며 1898년 제위(帝位) 양위음모사건이 발각되자 일본으로 망명, 그 곳에 피신해 있는 명성황후시해사건의 관련자 우범선(禹範宣)을 고영근(高永根)을 시켜 죽이게 하고 귀국했다.
1906년 서울에서 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이준(李儁)이 세운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토대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였다. 1907년 11월, 유근(柳瑾) ·장지연 등의 발의로 대한자강회를 발전적으로 해산,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조직하고 그 총무가 되어 항일조직 확대에 힘썼다. 저서에 《풍운한말비사(風雲韓末秘史)》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윤효정 [尹孝定] (두산백과)
전병훈은 1857년 7월 6일 평안남도 삼등현에서 정선(旌善) 전씨 나성파(羅城派)(나주전씨) 전경(全卿)의 23대 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경[全璟(1806~1878)], 어머니는 완산(完山) 이씨였다.
조부는 전익하[全翼廈(1763~1806)], 백부는 전기지[全基之]로 알려졌다. 선대에 관해 별다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미뤄볼 때 평안도 일대의 한미한 선비집안 출신으로 추정된다.
전병훈은 서양철학을 가장 먼저 접한 한국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50세가 되던 1907년에 중국으로 망명했다. 당시 영국서 유학하고 돌아온 옌푸(嚴復) 등이 서유럽의 학술과 사상을 번역해 소개하는 선두에 섰다.
이런 분위기에서 전병훈은 옌푸를 비롯한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서양철학을 접했다. 이 시기에 동서양의 문물을 비교하고 양자의 결합 혹은 어느 한 편의 우위를 주장하는 격렬하고도 다채로운 논의가 펼쳐졌다. 여기서 전병훈이 특별했던 이유는, 그가 도교 내단학의 견지에서 동서고금의 철학사상을 두루 회통해서 아주 조직화된 독창적 철학체계를 건립했다는 데 있다.
그는 서양의 철학과 과학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내단학처럼 정신을 운용해 참나를 이루며 성스러움을 겸비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또한 심리학의 최면술 등도 도교와 불교의 극치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젊어서 조선 성리학의 정수를 체득한 뛰어난 유학자였다. 또한 말년에 단군과 [천부경]을 존숭했으며, 조선 문화의 우수성을 선양했다.
중국 북경에 ‘정신철학사’라는 학관(學館) 겸 사단(社團)을 건립하고, 장상(將相)급의 기라성 같은 중국인 제자들을 이끌던 중국 지성계의 정신적 지도자이기도 했다.
한국 근대 지성사는 물론 동시대의 중국과 일본에서도, 한 몸에 그처럼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면모를 지닌 인물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는 전통과 근대를 넘나들고, 동서양을 통섭하고, 도교와 유교를 망라하고, 조선과 중화를 아우르고, 민족과 인류를 함께 고민하고, 학문과 교육을 병행하며, 이론과 실천(수련)을 겸비했던 철학자이자 도인이었고 교육자였다. 그는 또한 근대 이후를 준비한 미래사상가이기도 했다.
전병훈의 이런 활동은, 당시 중국 지성계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정신철학통편] 앞부분의 「약부제가평언서(畧附諸家評言序)」에는 캉유웨이(康有爲)⋅옌푸⋅왕슈난(王樹枏) 등을 비롯한 당대 중국 최고 지식인과 명사들의 찬사가 실려 있다.
1925년 김평식(金平植)과 이동초(李東初)가 정리한 「제가제평집諸家諸評集」에는 중국과 조선의 기라성 같은 학자와 고위인사 72인의 극찬이 수록돼 있다.
전병훈의 책은 구미 29개 나라의 150개 대학과 미국⋅프랑스⋅스위스의 세 총통에게 배포되었다고 한다. 당시 중국인 제자들이 명⋅청대의 저명한 학자들[황종희(黃宗羲)⋅왕선산(王船山)⋅고염무(顧炎武) 등]과 함께, 전병훈을 28성철(聖哲)의 한 사람으로 추존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혹자가 칭송하기를,
“조선이 개벽한 이후 4천여 년 동안 이처럼 중국인의 극단적인 찬양을 받은 이가 없었다.”고 했다.
당시 전병훈의 명망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출처] https://blog.naver.com/sonamoopub1/220783647697
작성자 sonamoopub1
충혜왕 후3년(1342) 임오년
• 6월
초하루 경자일. 왕이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역적 조적(曹頔)이 반란을 일으켜 과인이 상국의 수도로 가게 되었을 때 온 나라가 근심에 싸여 뒤숭숭했으며 간신의 잔당들은 허튼 말을 날조해 끊임없이 환란을 부채질했다. 그러나 시종하는 신하들이 끝까지 절의를 지켜 과인을 옆에서 보좌했으니 그 큰 공로는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이에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석(尹碩), 정승(政丞) 채하중(蔡河中),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 김석견(金石堅), 정승(政丞) 이능간(李凌幹), 이문(理問) 홍빈(洪彬),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영돈(金永旽), 서하군(西河君) 임자송(任子松), 찬성사(贊成事) 김인연(金仁沇), 언양군(彦陽君) 김륜(金倫), 김해군(金海君) 이제현(李齊賢), 성산군(星山君) 이조년(李兆年), 첨의평리(僉議評理) 한종유(韓宗愈), 삼사우사(三司右使) 김영후(金永煦), 삼사좌사(三司左使) 이몽가(李蒙哥),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이운(李雲), 개성윤(開城尹) 윤신계(尹莘係), 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엄(李儼), 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윤환(尹桓)·박청(朴靑),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강윤충(康允忠)·안천길(安千吉)·노영서(盧英瑞), 원외랑(員外郞) 한의신(韓義臣), 군부판서(軍簿判書) 배전(裴佺)·최유(崔濡), 지신사(知申事) 황석기(黃石奇),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손수경(孫守卿),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윤원우(尹元佑), 대호군(大護軍) 김첨수(金添壽)·김선장(金善莊), 호군(護軍) 남궁신(南宮信)·임성(林成) 등을 일등공신으로 임명해 공신각에 초상을 걸게 한다. 또한 그 부모와 처는 세 단계를 뛰어 넘어 작위를 주며 아들 하나에게 7품 관작을 줄 것이며 아들이 없으면 조카나 사위에게 대신 8품 관작을 주고 아울러 토지 1백 결과 노비 열 명을 지급할 것이다.
영창군(永昌君) 김승택(金承澤), 학성군(鶴城君) 박인수(朴仁壽), 전 군부판서(軍簿判書) 안자유(安子由), 상호군(上護軍) 김경(金鏡)·전윤장(全允臧), 전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손원(孫遠), 대호군(大護軍) 이광원(李光元)·김장(金莊), 호군(護軍) 진교화(陳敎化)·승신(承信)·이헌(李軒)·손습(孫襲), 중랑장(中郞將) 왕석(王碩)·이충(李沖)·이원용(李元用)·이광계(李光桂),
낭장(郞將) 전경(全卿)·홍매노(洪買奴) 등을 이등공신으로 임명한다.
그 부모와 처는 세 단계를 뛰어넘어 작위를 주며 아들 하나에게 8품의 관작을 주고 아들이 없으면 대신 사위에게 9품 관작을 주고, 토지 70결과 노비 다섯 명을 지급할 것이다.”
갑인일. 왕이 신효사(神孝寺)에 행차했다. 등촉배(燈燭輩)들이 향도(香徒)를 결성해 이 절에서 축수재(祝壽齋)를 열었는데 왕이 이 자리를 주관한 것이다.
◎ 전경(全卿)의 고려사 기록 ②
승보시[ 升補試 ]
승보시(升補試)는 생원시(生員試)를 말한다.
의종 원년(1106).
승보시를 처음으로 설치하고 시(詩)·부(賦)와 경의(經義)로 시험을 치러 임유공(任裕公) 등 55명을 선발하였다.
충정왕 2년(1350) 5월.
성균좨주(成均祭酒) 전경(全卿)이 이구(李玖) 등을 선발했다.
공민왕 2년(1353) 6월.
좨주(祭酒) 이정(李挺)이 양이시(楊以時) 등 50명을 선발했다.
10년 10월.
대사성(大司成) 허전(許佺)이 8명을 선발했다.
11년 11월.
대사성 김안리(金安利)가 정천익(鄭天益) 등 5명을 선발했다.
17년 8월.
전백영(全伯英) 등 37명을 선발했다.
23년 4월. 이취(李就) 등 1백 명을 선발하였다.
◎ 나성전씨(羅城全氏) 과거급제자
구분 | 시험종별 | 과순위 | 성 명 | 년도 | 관 직 | 본관(파) |
1 | 숙종07년 식년시 | 丙科 20위 | 전성준(全聖準) | 1681 신유 | 성균관 사예 (成均館 司藝) 정4품 | 나주(羅州)① |
2 | 숙종19년 개성정시 | 丙科 01위 | 전여초(全汝初) | 1693 계유 | 교수 (敎授) | 나주(羅州)② |
3 | 숙종31년 식년시 | 丙科 21위 | 전성신(全聖臣) | 1705 을유 | 금교 찰방 (金郊 察訪) 종6품 | 나주(羅州)③ |
4 | 경종01년 식년시 | 丙科 11위 | 전성택(全聖澤) | 1721 신축 | 성균관 사예 (成均館 司藝) 정4품 | 나주(羅州)④ |
5 | 영조16년 개성별시 | 甲科 01위 | 전명조(全命肇) | 1740 경신 | 사헌부 장령 (司憲府 掌令) 정4품 | 나주(羅州)⑤ |
6 | 고종16년 식년시 | 丙科 28위 | 전석구(全錫九) | 1879 기묘 | 사헌부 지평 (司憲府 持平) 정5품 | 나주(羅州)⑥ |
◎ 3형제 과거급제자
전성준 (全聖準) | 나주 (羅州) | 전기정(全氣正) | |
전성신 (全聖臣) | 나주 (羅州) | 부:전기영(全氣英) 생부:전기정(全氣正) | 숙종(肅宗) 31년(1705) 을유(乙酉) 식년시 문과 병과(丙科) 21위 |
전성택 (全聖澤) | 나주 (羅州) | 전기정(全氣正) | 경종(景宗) 1년(1721) 신축(辛丑) 식년시 문과 병과(丙科) 11위 |
◎ 부자 과거급제자
전성준 (全聖準) | 나주 (羅州) | 전기정(全氣正) | |
전명조 (全命肇) | 나주 (羅州) | 전성준(全聖準) | 영조(英祖) 16년(1740) 경신(庚申) 개성별시 문과 갑과(甲科) 1위 장원 |
● 옌푸[嚴復(엄복)]
중국 청(淸)나라 말기의 사상가.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일환으로 세워진 푸저우 선정학당[福州船定學堂]에서 공부하고 영국에 유학하였다. 청일전쟁 이후 서유럽의 학술 ·사상을 번역 소개했다. 변법운동(變法運動)을 비롯해 청말기 개혁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옌푸 [嚴復(엄복)] (두산백과)
○ 캉유웨이[康有爲]
중국 청나라 말기 및 중화민국 초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무술변법(戊戌變法)이라 불리는 개혁의 중심적 지도자이다. 고향에 사숙을 열고 량치차오 등을 교육하였으며 베이징·상하이에 면학회(勉學會)를 조직하는 등의 활동을 시작하여 '변법자강책(變法自彊策)'으로 개혁을 지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캉유웨이 [康有爲] (두산백과)
● 왕수난[王樹枏(왕수남)]
중국의 학자. 쓰촨[四川] ·깐쑤[甘肅] ·신장[新疆] 등 각 지방관을 지냈으며 민국수립(民國樹立) 후 성의회의원(省議會議員) ·중의원의원(衆議院議員) ·참정원참정(參政院參政)을 거쳐 국사관총재(國史館總裁)를 역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왕수난 [王樹枏(왕수남)] (두산백과)
○ 황종희[黃宗羲]
중국 명말·청초의 사상가. 박람(博覽)과 실증(實證)을 존중하고, 청나라 학문에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 명대의 철학사(哲學史)라고 할 《명유학안(明儒學案)》, 군주 독재제도를 통렬히 비판한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은 명저(名著)로 알려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황종희 [黃宗羲] (두산백과)
● 왕선산[王船山]
중국의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사상가. 이름은 부지(夫之)이다. 그는 주자 이래 중국 유학의 유심론적 성격에 대해 체계적인 비판을 시도하고, 송의 장횡거(張橫渠)의 소박한 유물론을 매개로 하여 '기'(氣)만이 우주의 실체이자 또한 음양의 대립적 통일이며, 만물의 생성 소멸은 기의 이합집산 및 변화에 의한 운동태(運動態)라고 생각하였다.
한편 형이하계(形而下界), 즉 감각계에서의 상극모순의 조화태(調和態)로서의 '이'(理)를 세우고, 형이상적ㆍ초월적인 이를 부정하였다. 이 이는 인간의 욕구에 수반하는 것으로서, 개별적인 인간의 욕구가 서로 충족되는 곳에 천리(天理)의 대동(大同)이 이루어지며, 인욕(人欲)의 개별성은 이 보편적인 천리의 대동에서 총족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여 송학 이래의 '이선기후'(理先氣後), '천리(天理)를 보존하고 인욕을 멀리한다'는 양명학의 '심외무물'(心外無物)이라는 유심론적 명제가 다같이 극복된다.
이가 모순의 변증법적 통일로서가 아니라 조화태로서 기에 선천적으로 내재한다고 하는 관념론적 관점은 극복하지 못하였다고 하여도, 그가 중국의 유물론 철학의 발전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 그는 청조 지배에 반항하여 평생 벽지에 은둔하였기 때문에, 『독통감론』(讀通鑑論), 『독사서대전』(讀四書大全說), 『주역외전』(周易外傳) 등 여러 저작은 사후 180년 정도가 지난 청말에 동향(同鄕)의 증국번(曾國藩)의 손에 의해 간행되기까지 햇빛을 볼 수 없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왕선산 [王船山]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 고염무[顧炎武]
요약 중국 명말 ·청초의 사상가. 명나라 말기, 당시의 양명학이 공리공론을 일삼는 데 환멸을 느끼고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학에 뜻을 두었다. 실증적(實證的) 학풍은 청조의 고증학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대표 저서에 《일지록(日知錄)》, 《천하군국이병서(天下郡國利病書)》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염무 [顧炎武] (두산백과)
● 김평식[金平植]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운동가. 대한독립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다 노장파와 소장파가 대립하자 노장파와 함께 기원독립단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대한통의부에 가담했으나 갈등으로 이탈, 의군부를 결성하고 일제 기관파괴와 주구 숙청을 위하여 활동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평식 [金平植]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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