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독립유공자 [전석구(全錫九)]

2019. 2. 8. 19:09 인물열전

독립유공자 공훈록

 

유공자정보

관리번호/33433

성명/전석구

한자/全錫九

이명/金五成

성별/

생년월일/

1896-10-24

사망년월일/

1970-12-08

본적/경상남도 합천 雙冊 下新 469

주소/

慶南 陜川 雙冊 下新 469

 

공적정보

운동계열/3.1운동

수록정보/독립유공자공훈록 16(2006년 발간)

포상년도/2005

훈격/건국포장

 

공훈록

19193월 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김창숙(金昌淑) 등의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작성한 이른바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 날인하였다.

3·1운동 직후 김창숙은 망국의 책임을 져야 할 유교가 이번 독립운동에도 참여치 않았으니 세상에서 오유(汚儒) 부유(腐儒)라고 매도할 때에 우리는 어찌 그 치욕을 견디겠는가?”라고 한탄하고 유림을 중심으로 한 국제 활동을 추진하였다.

1차 유림단 운동 또는 파리장서 운동으로 불리는 이 운동은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동참하지 못했던 유림 137명이 서명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민족대연합전선을 완성하였다. 또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유림계에도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1968) 4257

韓國儒林獨立運動 巴里長書略史(巴里長書碑建立委員會, 1973) 6

파리장서 서명자 연구(임경석, 대동문화연구 38, 2001) 432

3·1운동 50주년기념논집(동아일보사, 1969) 296

벽옹일대기(心山記念事業會, 1969) 98

면우집(아세아문화사, 1894) 4762

高等警察要史(慶尙北道警察部, 1934) 247251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137, 8935

 

  

9 호서유림단(湖西儒林團)의 파리 장서(巴里長書)

 

천도교와 기독교 및 불교의 3종교단이 합동하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전국적인 독립운동을 개시하였는데, 유림단측에서도 별도로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보냈다.

 

당초 천도교가 독립운동을 계획했을 때 민족대표로서 각계의 증진을 포섭하기로 하고, 윤용구(尹用求한규설(韓圭卨박영효(朴泳孝윤치호(尹致昊김윤식(金允植송병준(宋秉畯) 및 이완용(李完用) 등에게 교섭하다가 실패한 일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가 구귀족(舊貴族) 친일파(親日派) 등으로 일제(日帝)에게 경악을 주려는 것이었으며 유림(儒林) 측에 교섭했다는 말은 오직 한용운(韓龍蕓)이 영남의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에게 교섭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는 말이 있을 따름으로 이도 그리 확실한 이야기는 아니다. 유림측의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진정서를 제출할 운동은 을미(乙未 [195]) 국모시해(國母弑害)와 삭발령(削髮令)에 의병을 일으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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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洪州)를 점령했던 호서(湖西)의 유종(儒宗)인 전 승지(承旨)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 모의에 참여한 사람으로는 김덕진(金德鎭안병찬(安炳瓚김봉제(金鳳濟임한주(林翰周전양진(田穰鎭최중식(崔中式) 등 대부분이 의병 경력자들이었다.

 

그들이 만든 서한은 지금은 그 문장을 찾을 길이 없으나 그 요지는 여러 차례에 걸친 일본의 기신배약(棄信輩約)을 들고 고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시해에 온 국민이 품는 분울한 정을 말하고, 끝으로 우리의 국토를 찾고 이씨왕조(李氏王朝)를 일으킬 뜻을 기술하였다고 한다.

 

이 서한은 이영규(李永珪)가 서울에 사는 동문인 임경호(林敬鎬)에게 전하고 임경호는 전국 연락원의 책임을 맡았으며, 또한 파리에 발송하기 위하여 해외로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같은 운동이 영남(嶺南)에서 유종(儒宗)으로 추대되는 곽종석을 대표로 서울에서 3·1의거를 목격한 김창숙(金昌淑) 등이 주동으로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서한이 작성되어 김창숙이 서울에 가져와 있다는 소식이 유진태(兪鎭泰)에 의하여 임경호에게 알려져 이덕위(李德委) 집에서 유진태의 소개로 임경호와 김창숙이 만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호서 유림의 계획과 영남 유림의 계획이 그 목적이 같음을 알고 양 계획을 합동하기로 하여 작성된 서한을 비교검토하기로 하고 영남본(嶺南本)을 전용학(田溶學)이 홍성으로 가지고 내려갔다.

 

그러던 중 사기(事機)가 급하여 부득이 빨리 대표가 서울을 떠나게 되매 임경호는 김창숙에게 단독으로 대임(大任)을 맡아 주도록 부탁하여 3월 하순 김창숙이 중국 상해로 떠났는데, 김복한의 교정본은 이때까지 오지 않고 서울에서 주선한 유림들의 공의로 양쪽에서 지은 글이 서로 뜻이 같으나 영남본이 해괄간명(該括簡明)하다 하여 김창숙은 영남본을 그대로 가져갔으며, 서명(署名) 순서도 영남의 곽종석을 필두로 하고 김복한은 2번째로 하였다.

 

김복한은 서한이 떠나 후 서명 순서에 대하여 주위에서 물의가 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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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모든 것은 우리의 성의에 있는 것이지 어찌 서명의 선후를 다투겠는가? 비록 가장 말석에 참여한다 해도 달게 여기겠다.”

 

하고 영남본에 대하여는 대체로 찬의를 표하되 오직 그 문귀 중에 대명대화(大明大化)니 대인무(大仁武) 등의 어귀는 오늘날의 이적(夷狄)의 웅자(雄者)에게 쓰는 말이 못되어 너무 비하(卑下)한 것이 탈이라는 뜻으로 평하였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김복한은 파리평화회의에 모인 구미 각국을 아직도 오랑캐로 보고 있는 것이다.

 

호서본(湖西本)의 원문 사본은 하나는 김복한의 차자(次子)인 김노동(金魯東)이 보관하다가 잊어버리고, 하나는 제자 전용욱(田溶彧)이 보관하다가 해방전에 신변이 위험하여 소가하여 아직까지 그 외에서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간 대표파견에 관한 비용은 김복한의 제자 황일성(黃佾性)이 조달하였다고 한다.

 

그후 파리 장서(長書)로 불리우는 이 서한은 김창숙이 중국 상해(上海)에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으며 또한 국내 각 향교(鄕校)에 우송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412일 경북 성주(星州)시장의 만세운동으로 체포된 유림 송회근(宋晦根)[서명자·송준필(宋逡弼)의 아들]에 의하여 탄로되었는데, 우선 곽종석 등이 피검되어 재판을 받고 김복한은 6월초에 피검되었으나 중병으로 구금을 면하였다.

 

그후 86일 홍성경찰서에 구금되었고, 이어 공주 감옥으로 이감되어 1212일까지 1백여일 동안 옥고를 치루었다.

 

곽종석의 재판기록이나 김복한에 대한 일제의 처사를 돌이켜보면 후일 33인의 공판도 그렇지만 이들이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어서 그런지 왜적은 이 문제를 그리 크게 문제시하지 않고 가볍게 다룬 감이 있다.

 

김복한 (金福漢)

최중식 (崔仲軾)

백관형 (白觀亨)

유호근 (柳浩根)

유준근 (柳濬根)

이길성 (李吉性)

전양진 (田穰鎭)

안병찬 (安炳瓚)

김덕진 (金德鎭)

임한주 (林翰周)

김봉제 (金鳳濟)

김상무 (金商武)

김택주 (金澤柱)

이종춘 (李鍾春)

송주헌 (宋柱憲)

김지정 (金智貞)

송철수 (宋喆洙)

이태식 (李泰植)

김학진 (金鶴鎭)

신직선 (申稷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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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수 (李來修)

전병식 (全炳軾)

고석진 (高石鎭)

이이익 (李以翊)

박정선 (朴正善)

황택성 (黃宅性)

박준 (朴埈)

박은용 (朴殷容)

정근 (鄭根)

전석구 (全錫九)

이병회 (李炳回)

고제만 (高濟萬)

고순진 (高舜鎭)

고예진 (高禮鎭)

김영식 (金榮植)

김양수 (金陽洙)

김상진 (金相震)

장영구 (張永九)

김영찬 (金永贊

출처 : 전씨(全氏) 광장
글쓴이 : 전과웅 (55세/정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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