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17. 20:42ㆍ 인물열전
[A]
정선 전씨 족보 서[1829년]
[ 번역문 (2021년 전과웅) ]
모든 사람(含生)의 윤리(倫理)는 그 어버이를 사랑함을 알지 못했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늘 어버이를 존중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백성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사는 사람들이 그의 조상(祖上)을 존중(尊重)함을 알지 못했다고 하지 말라. 또한 형과 아우가 사이가 좋음을 알지 못했다고 하지 말라. 조상(祖上)으로는 증•고조(曾•高祖)에 이르고 형제(兄弟)에서 친소(親疏)에 따라 상복(喪服)을 입는 모든 종인(宗人)이 오직 근본(根本)을 돈독히 생각합니다.
예절(禮節)을 잘 아는 사람은 능히 이것[근본을 돈독히 여기는 것]을 지나쳐 가면 제사(祭祀) 지내는 곳에서 상복(追服)을 능히 입지 못하고, 도덕의 밑바탕 되는 장소에서 조상(祖上)을 추모(追慕)하는 일을 못 할 것이다. 비록 효자(孝子)이고 어진 사람이라고 해도 그 정을 다하지 못하게 되고, 제사(祭祀)의 규율(規律)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도다. (어찌 제사의 규율에 맞게 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름이나 세대(世代)의 차례(항렬) 역시 상세(詳細)하게 표현(表現)함을 얻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부족(不足)함이 세력(勢力)을 얻어 고착(固着)되니 책임(責任)을 면(免)하기 어렵도다. 그러하니 어진 효자(孝子)이라도 종래(從來)는 기분이 상쾌함을 얻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보첩(譜牒)을 작성(作成)해야 할 필요성(必要性)이 생기게 된 것이 아닌가?
선조(先祖)들의 뜻을 이어받기 위하여 상계(上系)로부터 종인(宗人)들을 기록하고, 그 시조(始祖) 아래로는 후손(後孫)들을 열거(列擧)하여 모두 기록(記錄)하여야 한다.
문헌(文獻) 기록(記錄)이 부족(不足)한 바는 나의 죄(罪)가 아니요. 간신히 문헌(文獻)이 있어도 상고(詳考)해보면 멀고 먼 옛날이라서 거칠고 멀어서 심하게 흩어지고 성기고 아득함에 소속되어 있다.
[아주 옛적 기록이라서] 역시 감히 [문헌이] 존재(存在)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는 나의 무궁(無窮)한 생각에 의지해 본다. 이는 또한 어진 효자(孝子)가 부족(不足)한 바가 있지만 온 마음을 다한 결과이도다.
옛날 사람은 여러 종인(宗人)들을 지파로 나누고 그에 따른 방에 분별하여 각자 기록(記錄)하여 족보(族譜)를 만들었다.
중국(中國)의 명문가(名門家)인 조군이씨(李氏)와 농서이씨[농서낭야의 왕족]는 서로 합할 수 없도다. 근원(根源)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시조(始祖)의 근원(根源)을 찾아 밝히고 상고(上考)해보니 또한 겨우 수십 대에서 그쳤다. 오직 두씨(杜氏)는 1,000여 년이 끊이지 않고 세보(世譜)가 이어졌으니 당시에 극히 번성(繁盛)하였음이 널리 알려졌다. 그러함은 역시 산(山)의 음덕(蔭德)이 가문(家門)에게 이어져 머물렀기에 가능(可能)하였다.
대체로 상계(上系) 역사(歷史)를 알기가 위의 중국(中國) 명문가(名門家)의 근원(根源)을 찾기처럼 어렵다. 정선 전씨(旌善全氏)는 고려(高麗) 태사(太師) 전이갑(全以甲)公이 왕(王)을 도와서 충성(忠誠)한 큰 업적(業績)이 있었다. 세월(歲月)이 흘러 그 후손(後孫)들이 조정(朝廷)에서 관리(官吏)로 많이 일하였고 여러 대에 걸쳐서 덕망(德望)이 높고, 융성(隆盛)하게 되었다.
국사책을 보면 고려(高麗) 시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기록문(記錄文)에 등재(登載)되어 있으므로 상고(詳考)가 가능(可能)하다.
조선(朝鮮) 시대에 이르러 역시 대대로 뛰어난 인물(人物)이 배출되어 시(詩)와 예(禮)가 끊임없이 전해졌고,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도암(陶菴) 이재(李縡)公이 시(詩)를 읊고 서술(敍述)한 문헌(文獻)이 전해져 왔도다. 이 모든 것이 믿음과 검증(檢證)이 되었다.
고려(高麗) 시대 이전(以前) 족보(族譜)의 계통(系統)에 이르러서는 구묘(舊墓)에서 명문(銘文)이 나왔으나 여러 역사책(歷史冊)을 상고(上考)하고. 기록(記錄)을 찾았으나 없고 불가능(不可能)하여 신라 백제 연대(年代)의 기록(記錄)은 적지 않게 의심(疑心)하게 되었다. 비록 정선군(旌善君) 묘지석(墓地石)에 기등재(旣登載)된 “영종”이란 묘호(廟號)가 기록(記錄)에 없었지만 이를 감히 내려놓을 수 없어서 가승(家乘)으로서 전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묘지(墓誌)와 묘표(墓表)에 따라 족보(族譜)를 간행(刊行)하였고, 그 자손(子孫)들 모두가 감히 폐기할 수 없어서 그 내용(內容)을 따르고 유지(維持)하였다. 종인(宗人)들을 계통(系統)별로 구분(區分)하여 이미 대동보(大同譜)를 간행(刊行)한 바 있다. 그 후 후손들이 이어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번성하였으므로 이를 반영(反影)하여 다시 간행(刊行)하게 되었다.
대동보(大同譜)를 완성(完成)하고서는 견문(見聞)이 좁고 식견(識見)이 얕은 유생(儒生)인 나(예조판서 홍석주)에게 서문(序文)을 부탁하였다.
태사(太師) 전이갑(全以甲) 상계 16세는 의심스러운 바탕이 있어서 우기기에는 불가능(不可能)하나, 태사(太師) 이후(以後) 지금에 이르기까지 900여 년은 관(貫)이 달라도 12파가 사당(祠堂)에 조상(祖上)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차례가 한 곳의 빈 곳이 없이 일관(一貫)되게 내려왔도다.
또한 옛날에는 족보(族譜)가 일찍 있지 못함이라. 여러 대를 걸친 먼 후대(後代)의 자손(子孫)이 번성(繁盛)함이 수백 수천을 헤아림과 같다. 이 번성함의 근원(根源)은 태사(太師) 전이갑(全以甲) 公이니, 공(公)이 덕망(德望)을 쌓음이 없었다면 어찌 이처럼 지금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후손(後孫)들은 또한 선조(先祖)를 능히 잊지 말아야 한다. 대대로 독실하게 종인(宗人)의 뜻에 마땅하게 족보(族譜)를 닦아야 한다. 그 번성함이 불어나서 그치지 말게 하여야 한다.
구보(舊譜)는 을묘(乙卯)년에 간행하였고[1795년], 35년 후 새로운 족보(族譜)를 또 이루었다. 그 일을 주관한 이는 태사(太師) 전이갑(全以甲)公의 25세손 치선(致善)이니 영남지방에서 서울로 700리 왕래하였다. 무릇 8년 동안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종인(宗人)들을 만나서 처음과 끝까지 노력하여 편집(編輯)을 마치었으니 가령 족보(族譜)가 소리치더라도 이 공로(功勞)는 역시 기록(記錄)해야 할 일이로다.
순조29년 1829년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예문관제학 풍산 홍석주 서
[B]
[“신라 백제 시대의 기록을 적지 않게 의심되었다.”에 대한 의견]
1. 예조판서 홍석주의 기록
고려 시대 이전 족보의 계통에 이르러서는 구묘에서 돌에 새긴 명문이 나왔으나 여러 역사책을 상고하고. 기록을 찾았으나 없고 불가능하여 신라 백제 연대의 기록은 적지 않게 의심하게 되었다.
至麗朝以前譜系及得於舊墓幽石之刻者稽諸史策或不能無踶信以羅濟年代考之頗有可疑
2. 의견
1829년
당시 상황으로서는 예조판서 홍석주의 견해는 틀림없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021년
현재 상황으로는 신라 백제 시대의 역사에 대해 의심이 많이 개선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금석문(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이 나와서 백제 시대와 통일신라 시대에 호족으로 활동하였음이 고증되었기 때문입니다.
1829년 당시 학자(예조판서 홍석주)의 견해는 그 당시의 학계와 전씨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신라 백제 시대의 기록은 아주 오래되어서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뿐일 정도입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제가 알기로는 전씨에 대한 기록이 한 건도 없습니다.
(삼국사기에 전씨 기록이 1건 나오나 학자들이 김씨의 오기라고 한 기록을 본 적은 있습니다.)
구전(口傳)에 의한 족보 이외는 객관적인 자료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삼국시대 역사에서 전씨 성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하고 이를 고증할 방법에 대해 종인들의 마음속에 큰 숙제로 대대로 내려왔었습니다.
1960년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 있었으니 세종시 전의면 비암사 삼층석탑 꼭대기에서 발견된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 (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이었습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암적갈색 연질납석으로 만든 불상이며 국보 제106호입니다.
명문(銘文)에 전씨(全氏)에 대한 기록이 나와서 신라 백제 시대의 구전(口傳)이 일거에 객관적인 고증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큰 홍복(洪福)을 받은 것이며 오랜 염원이 해결되는 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은 우연한 기회에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쌍류리에 살고 있던 한 학생이 비암사의 3층 석탑 위에 탑 일부분이었던 것을 주지 스님에게 건의하여 동국대 황수영교수에게 제출하게 된 것입니다. 학술적으로 인정되어 국보에 지정되게 이르렀던 것입니다.
구전(口傳)이 아니고 객관적인 全氏의 기록은
673년(신라 문무왕 13)경으로 추정되는 금석문(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 명문(銘文)이 최초이고
989년(성종 8) “전보인이 나주목경학박사(羅州牧經學博士)로서 후학을 근실히 가르쳐 포상을 받았다.”는 고려사 문헌이 최고로 오래된 정사(正史) 기록입니다.
금석문과 고려사 기록으로 보아도 아주 오랜 역사를 지낸 씨족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C]
[ 해문(1990년 경오보) ]
諸生物의 倫理가 그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지 못함이 없고 옛골에 사는 사람들도 그의 祖上을 높이는 것을 알지 못함이 없는 理由는 其 兄弟로 말미암아 七•八寸에 이르러 種族이 됨에 따라 오직 根本을 알아 서로 우애를 敦篤케 위함이다. 禮를 아는 선비라야 能히 함이니 추상치 못하고 本源地를 能히 알지 못하면 비록 孝道하는 子孫과 어진 사람이라도 또한 能히 其 情을 다하지 못함이라
어찌 祭祀 지내고 本源의 땅을 추구치 못하고 姓名과 世代의 차례 또한 자랑하지 못함은 形勢가 그러함이라 孝子와 어진 사람의 마음이 이로써 快치 못하니 이러한 즈음에 族譜를 닦는데 그 어버이를 비롯 위로 始祖까지 뜻이 없는 곳이 없고 其 始祖로부터 아래로 後裔된 子孫까지 行列이 없어 아니함이라 文獻이 傳하지 못함은 내 죄가 아니라 事實 文獻이 있어 상고할 수 있는, 즉 비록 깊이 其 옛날 먼 世代에 分散하여 성글고 아득한 族屬이라도 또한 함부로 할 수 없음을 알아서 나의 無窮한 생각을 傳함이다. 또한 孝子와 어진 사람의 마음이라 옛부터 族譜한 사람이 여러 百家가 가지를 나누고 결을 分別하여 姓名을 알게 되니 趙氏가 사는 마을에 李氏가 祖上을 같이할 수 없고 농서량야(隴西琅瑘)의 왕이 太原을 統合할 수 없으니 其 根本을 미루고 其 根源을 거슬러 數十代를 살펴서 알 수 있으니 오직 杜氏의 歷代가 千年 以上 世譜가 끊어지지 않았으니 當時 사람들이 일러 가로대 極히 盛한 일이니 亦是 祖上의 山所의 음기라 하더라.
그 어려움이 이 같은데 旌善 全氏들이 高麗 太師 諱 以甲公의 忠精으로 큰 事蹟이 밝고 맑아서 王을 일으켜 흐르는 빛이 子孫에 비치어 官과 爵이 서로 있고, 世代로 이름난 德이 높아서 國史記에 보였고 圃隱 鄭文忠과 牧隱 李穡 李文靖公의 글에서 可히 詳考할 수 있다.
李朝때 亦是 代代로 준수한 사람이 있어 詩와 禮를 傳함이 막히지 않아서 退溪 李文純公 陶菴 李文正公이 다 노래를 읊어서 敍述한 文獻이 傳하니 믿을 만한 證據가 되었다.
高麗朝에 이르기 이전에 族譜의 世紀를 옛 墓地石에 새긴 글을 얻었으나 모든 歷史를 詳考하니 혹 의심남이 있으나 其 子孫으로 敢히 폐할 수 없어서 그대로 保存하여 드디어 諸宗을 分別하고 族譜를 닦아서 이미 世上에 펴냈으니 또 繼承하고 또 새로 生長한 者 더욱 繁盛하니 또 合해서 거듭 發刊하여 役事가 마치메 나에게 序文을 지으라 하니 내 넉넉지 못한 선비라
太師 以上 十六世는 진실로 能히 알지 못하여 疑心나는 바 있으나 太師 以下 지금까지 九百餘年에 其 貫을 달리함이 있어도 昭와 穆인 父子의 座席이 秩序가 整然하여 한 곳도 闕힘이 없어 이 같으니 예로부터 族譜가 일찍이 있지 못한 바라 하물며 其 싹의 後裔가 千百으로 計算할 것 없는 데다 根本을 太師로 하니 積德함이 크지 않으면 어찌 이에 미치겠는가? 이제 其 孫들이 能히 其 先祖를 잊지 않고 世代를 닦아 族譜를 만들어 守族하는 義理가 篤實하여 其 불어남이 더욱 끝이 없으리라.
먼저 族譜를 乙卯年에 發刊한 뒤 三十五年에 또 이루니 其 일을 主張한 太師의 三十五世인 致善이가 嶺南으로부터 서울까지 七百里를 往來하며 여러 宗人을 규합하여 始作한 지 八年만에 마치니 可히 칭찬할 만하도다.
上之二十九年(純祖二十九年 西紀 一八二九年) 己丑
자헌대부예조판서겸예문관제학 풍산 홍석주 서
[D]
[ 원문 ]
[原文]
含生之倫莫不知愛其親者閭巷之人莫不之知尊其祖者亦莫不知親其昆弟者由其祖而及於曾高
由其昆弟而及於緦功之宗族惟敦本知禮之士能之過此以往則祭祀之所不能追服紀之所不能逮
雖孝子仁人亦不能盡其情也夫豈唯祭祀服紀之所不及哉雖名字世次亦有不可得而詳者焉是固
勢之所不能免也然孝子仁人之心終以是爲未恔也於是乎有譜牒之作繇其親而上之凡爲其先者
無不志焉繇其先而下之凡爲其裔者無不列焉文獻之所不及非吾罪也苟文獻之有稽則雖邃古荒
遠之代分散疏邈之屬亦不敢不存而識之以寄吾無窮之思此亦孝子仁人乏所盡心也古人爲譜者
累百家支分房別各自爲書趙郡之李不兼隴西琅瑘之王不通太源其推本溯源率亦厪數十世而止
唯杜氏歷千餘歲不絶其世譜當時號爲極盛然亦止於山陰一宗耳盖其難知此旌善之全自高麗太
師諱以甲以精忠丕績光贊興王流光雲仍圭組枂續其奕世名德之隆見於國史及圃隱鄭文忠公牧
隱李文靖公之文者可稽也至李朝亦代有俊人不贊詩禮之傳退溪李文純公陶菴李文正公皆爲歌
咏敍述之文獻之傳已皆信而有徵矣至麗朝以前譜系及得於舊墓幽石之刻者稽諸史策或不能無
踶信以羅濟年代考之頗有可疑而世傳家乘不敢下筆且羅朝雖無英宗之號旣載於旌善君墓地故
從誌表刊譜其子孫亦皆不敢廢而存之遂合諸宗之別以爲大譜旣刊而行于世矣其繼而生且長者
滋益繁則又合而重刊焉役旣完問序于余余陋儒也自太師以上十六世固不能質其所疑然自太師
以下距今爲九百餘歲其貫之別凡十有二而昭穆秩然一闕遺是亦自古譜牒之所未嘗有也况其苗
裔之盛不啻以千百計而皆本於太師非積德之盛何以及此今其孫又能不忘其先而世修其譜牒以
篤於收族之義宜其滋益繁未艾也舊譜之刊在乙卯後三十五年而新譜又成主其事者太師之二十
五世孫名致善自大嶺之南走京師七百里往來諸宗人間首尾凡八歲不懈以卒就是譜鳴呼是亦可
書也已
上之二十九年己丑
資憲大夫禮曹判書兼藝文館提學 豐山 洪奭周 序
〇 親 친할 친
1. 친하다(親--) 2. 가깝다 3. 사랑하다 4. 가까이하다 5. 사이 좋다 6. 손에 익다 7. 숙달되다 8. 어버이 9. 친척 10. 혼인 11. 신부(新婦), 새색시 12. 몸소, 친히(親-)
〇 由 말미암을 유, 여자의 웃는 모양
1. 말미암다 2. 쓰다 3. 좇다, 따르다 4. 행하다(行--) 5. 등용하다(登用ㆍ登庸--) 6. 보좌하다(補佐ㆍ輔佐--) 7. 꾀하다 8. 같다 9. 길, 도리(道理) 10. 까닭 11. 말미, 휴가(休暇) 12. 움(나무를 베어 낸 뿌리에서 나는 싹) 13. ~부터 14. 오히려
〇 緦 삼베 시
1. 삼베(삼실로 짠 천) 2. 시마(緦麻: 가는 베로 만들어 상사(喪事)에 입는 옷) 3. 소원해지다 4. 생각하다 5. 생각하는 모양
〇 恔 쾌할 교, 쾌할 효
1. 쾌하다(快--: 마음이 유쾌하다) 2. 유쾌하다(愉快--) 3. 기분(氣分) 좋다 a. 쾌하다(快--: 마음이 유쾌하다) (효) b. 유쾌하다(愉快--) (효) c. 기분(氣分) 좋다 (효)
〇 繇 역사 요, 말미암을 유, 점사 주
1. 역사(役事: 토목이나 건축 따위의 공사) 2. 노래, 가요(歌謠)(=謠) 3. 어조사(語助辭)(=於) 4. 고요(皐陶: 중국 고대의 전설상의 인물) 5. 무성하다(茂盛--) 6. 우거지다 7. 흔들리다(=搖) 8. 멀다...
〇 苟 진실로 구, 구차할 구
1. 진실로(眞實-), 참으로 2. 다만, 단지(但只) 3. 겨우, 간신히 4. 만약(萬若) 5. 구차하게(苟且--) 6. 바라건대 7. 잠시(暫時) 8. 구차하다(苟且--), 구차(苟且)하게 굴다 9. 미봉하다(彌縫--:
〇 稽 상고할 계
1. 상고하다(詳考--), 조사하다(調査--) 2. 헤아리다 3. 논의하다(論議--), 상의하다(相議ㆍ商議--) 4. 묻다, 점을 치다 5. 셈하다, 세다 6. 견주다
〇 邃 깊을 수
1. 깊다 2. (학문의 깊이가)심오하다(深奧--) 3. 정통하다(精通--: 어떤 사물에 대하여 깊고 자세히 통하여 알다) 4. 멀다, 아득하다 5. 시간이 오래다
〇 邈 멀 막
1. 멀다 2. 아득하다 3. 근심하다(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하다) 4. 업신여기다
〇 隴 고개 이름 롱, 고개 이름 농
1. 고개의 이름 2. 땅의 이름 3. 산(山)의 이름 4. 두둑(논이나 밭을 갈아 골을 타서 만든 두두룩한 바닥) 5. 언덕 6. 사물(事物)의 형용(形容) 7. 섬서성(陝西省)의 딴 이름 8. 성(姓)의 하나
〇 琅 옥돌 랑, 옥돌 낭
1. 옥돌(玉-) 2. 금옥(金玉) 소리(쇠와 옥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 3. 문고리 4. 고을의 이름
〇 瑘 땅 이름 야
1. 땅의 이름
〇 溯 거슬러 올라갈 소, 물 삭
1. 거슬러 올라가다 2. 거스르다 3. 맞서다 4. 따라 내려가다 a. 물 (삭)
〇 厪 겨우 근, 노력할 근
1. 겨우 2. 조금 3. 작은 집 4. 노력하다(努力--) 5. 힘쓰다 6. 부지런하다(=勤)
〇 奕 클 혁
1. (부피, 규모 등이)크다 2. 아름답다 3. 겹치다, 잇닿다(서로 이어져 맞닿다) 4. 근심하다(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하다), 시름겨워하다 5. 익히다, 배우다 6. 아름다운 모양 7. 가볍게 춤추는 모양
〇 枂 벗길 월
1. (나무 껍질을)벗기다
〇 贊 도울 찬
1. 돕다 2. 밝히다 3. 참례하다(參禮--) 4. 기리다, 칭찬하다(稱讚--) 5. 나아가다 6. 알리다, 고하다(告--) 7. 뵙다, 보다 8. 이끌다 9. 전달하다(傳達--) 10. 천거하다(薦擧--), 추천하다(推薦--)
〇 徵 부를 징, 음률 이름 치
1. 부르다 2. 징집하다(徵集--) 3. 소집하다(召集--) 4. 구하다(求--), 모집하다(募集--) 5. 거두다, 징수하다(徵收--) 6. 징계하다(懲戒--) 7. 밝히다 8. 증명하다(證明--), 검증하다(檢證--) 9. 이루다...
〇 踶 밟을 제, 힘쓸지, 달릴 치
1. 밟다 2. 뒷발질하다 3. 발굽 a. 힘쓰다 (지) b. 심력을 기울이다 (지) c. 달리다 (치)
〇 頗 자못 파
1. 자못 2. 꽤, 상당히(相當-) 3. 매우, 퍽 4. 몹시, 대단히 5. 비뚤어지다 6. 편파적이다(偏頗的--: 공정하지 못하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다) 7. 불공평하다(不公平--) 8. 치우치다 9. 반듯하지 못하다
〇 滋 불을 자
1. 붇다, 증가하다(增加--) 2. 늘다, 많아지다 3. 번식하다(繁殖ㆍ蕃殖ㆍ蕃息--) 4. 자라다, 생장하다(生長--) 5. 우거지다, 무성하다(茂盛--) 6. 잦다(잇따라 자주 있다), 많다 7. 심다, (씨를)뿌리다...
〇 固 굳을 고
1. 굳다, 단단하다 2. 굳어지다, 굳히다 3. 완고하다(頑固--), 고루하다(固陋--) 4. 우기다(억지를 부려 제 의견을 고집스럽게 내세우다) 5. 독점하다(獨占--) 6. 가두다, 감금하다(監禁--)
〇 距 상거할 거, 막을 거
1. 상거하다(相距--: 서로 떨어져 있다), 떨어지다 2. 떨어져 있다 3. 걸터앉다 4. 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到達--) 5. 막다, 거부하다(拒否--) 6. 거절하다(拒絶--), 물리치다
〇 闕 대궐 궐
1. 대궐(大闕) 2. 대궐문(大闕門) 3. 조정 4. 흠 5. 궐하다(闕--: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빠뜨리다) 6. 이지러지다(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없어지다) 7. 이지러뜨리다(이지러지게 하다) 8. 파다 9. 뚫다
〇 여항[ 閭巷 ]
인가(人家)가 모여 있는 곳. 서민이 모여 사는 마을. 여리(閭里). 여항(閭巷).
[네이버 지식백과] 여항 [閭巷]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 용어사전), 2012.)
〇 昆弟 [곤제]
형과 아우
〇 시공[ 緦功 ]
시마(緦麻) 3월복(月服)과 소공친(小功親) 5월복, 대공친(大功親) 9월복을 아울러 이르는 말. 이는 복제(服制)를 행하는데 있어, 그 친(親)과 효(孝)의 지극함을 표현하는 3년상은 하지도 못하면서 시마•소공•대공의 복제는 따진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됨. [참고어]복제(服制).
[네이버 지식백과] 시공 [緦功]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〇 緦麻 [시마]
상복(喪服)의 하나. 가는 베로 만들어 종증조(從曾組)ㆍ삼종 형제(三從兄弟)ㆍ중증손(衆曾孫)ㆍ중현손(衆玄孫)의 상사(喪事)에 석 달 동안 입는 복(服)
〇 소공 [ 小功 ]
정의
상례(喪禮)의 오복제도(五服制度)에 따른 상복.
내용
소공에는 5개월간 상복을 입는데 이때의 상복을 소공복(小功服)이라 하고, 소공복을 입는 친족의 범위를 소공친이라고 한다.
소공친은 할아버지 형제의 내외(증조부·종조부·종조모), 아버지의 사촌형제 내외(종숙부·종숙모), 6촌형제(재종형제), 4촌형제의 아들(종질), 형제의 손자(종손) 등과, 외가로 외할아버지·외할머니·외아저씨(외삼촌)·이모 등이 해당된다. 시집간 여자의 경우는 남편의 형제, 남편형제의 손자, 남편 사촌형제의 아들, 남편형제의 부인(동서) 등이 소공복친의 범위에 든다.
그런데 소공복을 5개월간 입는 것은 원칙적인 규정이고, 실제로는 경제적 이유나 일상 생활조건에 따라 줄여지기도 했다. 상복을 입는 기간이 줄어지는 것을 강복(降服)이라고 하는데, 가령 소공이면 한 등급 낮은 시마(媤麻)에 해당하는 기간과 복장을 하게 된다. 시마는 3개월간 상복을 입는 것이며 시마복도 소공복과는 다른 모양으로 짓는다.
소공복을 짓는 재료는 숙포(熟布)로서 대공복보다는 가는 베를 사용하는데, 김장생(金長生)의 『가례집람(家禮輯覽)』에는 11새[升]로 규정되어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공 [小功]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〇 추복 [ 追服 ]
상례(喪禮) 의식의 하나로써, 부모가 돌아갔을 때 나이가 어렸거나 어떤 사고로 인하여 상복(喪服)을 입지 못하였다가 나중에 상복을 입는 것.
[네이버 지식백과] 추복 [追服]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〇 체사 [ 逮事 ]
이미 죽은 선왕(先王)이나 조상을 살아 있을 때 섬기거나 본 것.
〇 邃古 [ 수고 ]
아득한 옛날. 멀고 먼 옛적
〇 "오성칠망(五姓七望)": 중국역사상의 명문집안
글: 천애간점역사(天涯看點歷史)
성씨(姓氏)는 우리들 모두의 일생을 따라다니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성씨도 적지 않게 탄생하고, 적지 않은 복성(複姓)은 단성(單姓)으로 바뀌었다. 지금 통계를 내보면, 단자성과 쌍자성을 합치면 수량이 1만개에 이른다.
현재의 성씨는 이미 고대의 계급제도는 없다. 왜냐하면 고대에는 '오성칠망'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들 성씨를 가진 사람은 고대의 명문망족이었다. 이는 상류사회의 명함을 하나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나 같다. 고대의 황실조차도 '오성칠망'에 속하는 사람과 결혼할 자격이 없었다. 그렇게 보면 정말 이들 일족으로 태어나는 것은 하나의 특권이라 할 수 있다.
그중 "오성(五姓)"은 이(李), 최(崔), 노(盧), 정(鄭), 왕(王)을 가리킨다. "칠망(七望)"은 농서(隴西), 조군(趙郡), 청하(淸河), 범양(范陽), 박릉(博陵), 형양(滎陽), 태원(太原)이다. 간단히 말해서 '칠망'은 7개의 가족을 가리킨다.
첫째, 이씨는 '농서이씨'와 '조군이씨'이다.
400년의 동진시기에, "이"성은 처음에 '리(理)'였으나, 천천히 바뀌어서 '이(李)'로 바뀐다.
그중 농서이씨중 가장 유명한 인물중 하나는 바로 당나라때의 저명한 시인인 이상은(李商隱)이다. 그가 쓴 <무제>는 사랑을 읊은 시중에서 대표적이다:
상견시난별역난(相見時難別亦難) 서로 만나기도 어렵지만 헤어지는 것도 어렵구나
동풍무력백화잔(東風無力百花殘) 봄바람이 힘을 잃으니 꽃들이 모두 지누나
춘잠도사사방진(春蠶到死絲方盡) 누에는 죽을 때까지 실을 뽑아내고
납거성회루시건(蠟炬成灰淚始乾) 초는 재가 되어야 눈물이 마른다.
조군이씨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당나라때 저명한 음악가 이구년(李龜年)이다. 시성 두보는 <강남봉이구년>이라는 시를 지은 바 있다. 이를 보면 이구년은 당나라때 시인들이 무수히 배출되는 시대에 역시 스타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최씨를 보자. 최씨는 동한에서 시작한다. 삼국시대 이전의 그 동한이다.
최씨라는 성은 지금은 그렇게 많이 볼 수 있는 성씨가 아니지만, 유명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모두 12명의 재상을 배출했고, 그 중에는 당태종때의 재상인 최인사(崔仁師)가 있다.
태원왕씨. 인구조사에 따르면, 왕씨는 중국인구중 가장 많은 성씨중 하나이다. 그러나 고대에 왕이라는 성씨는 정말 일반적이지 않았다. 부유한 가정이고, 명문귀족이었다. 이 성씨는 그 글자가 의미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왕자(王者)'의 기질이 있었다.
동한시기의 왕윤은 바로 태원왕씨이다.
그후에 동진에서 3명의 황후를 배출한다. 효무제의 황후 왕법혜(王法慧), 간문제의 황후 왕간희(王簡姬), 진애제의 황후 왕목지(王穆之). '5성7망'중에서 황후를 가장 많이 배출한 성씨이다.
범양노씨. 가장 유명한 인물은 '초당사걸'중 하나인 노조린(盧照隣)이다. 그외에 10명의 재상을 배출한다. 당나라때만 8명이다. 당나라때 재상은 노씨들이 싹슬이했다고 말해도 될 정도이다.
형양정씨. 서한시기의 성씨이다. 마찬가지로 10명의 재상을 배출한다.
시대가 바뀌면서, 성씨는 한 사람의 부호가 되어 버린다. 더 이상 신분의 상징은 아니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하나의 진보이다. 어쨌든 중국은 현재 새로운 시대에 처해 있고, 등급이 분명한 봉건사회는 이미 역사가 되었다.
아무도 이런 시대가 나쁘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든지 노력만 하면 자신이 세운 목표를 실현할 수 있고, 자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정상적이고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있다.
[출처] "오성칠망(五姓七望)": 중국역사상의 명문집안|작성자 shanghaicrab
〇 농서 [ 隴西 ]
분류
문학 > 중국 환타지 문학의 원류를 찾아서
농산[隴山] 서쪽 지역을 두루 칭하는데,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서쪽, 황하 동쪽 지역에 해당함.
[네이버 지식백과] 농서 [隴西]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 용어사전), 2012.)
〇 溯源 소원
①물의 근원(根源)지를 찾아 상류로 거슬러 올라감 ②어떤 사물(事物)이나 일의 근원(根源)을 찾아 밝히고 상고함
〇 丕績 (비적)
훌륭하게 여길 만한 큰 공적(功績)
〇 流光 (유광)
1 물결에 비치는 달
2 흐르는 물과 같이 빠른 세월(歲月)
〇 圭組 (규조)
조정관원이 일사에 쓰는 홀과 갓끈, 전하여 조정관원
〇 苗裔 (묘예)
여러 대를 걸친 먼 후대(後代)의 자손(子孫)
〇 不啻
1 다만 …뿐만 아니다. (=不止)
2 …와 같다.
〇 수족 (收族)
친족간에 촌수와 항열에 따라 택호를 붙여, 00 아재(아저씨), 00 할배(할아버지) 하고 부르는 것을 '수족收族, 修族'이라고 한다. 그리고 친족간에 이렇게 부르는 것을 '호척呼戚'이라고 한다.
〇 未艾
1. 그치지 않다 2. 다하지 않다
〇 圃隱 鄭文忠
정몽주 [ 鄭夢周 ]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시호 문충(文忠)
고려후기 문하찬성사, 예문관제학, 인물추변도감제조관 등을 역임한 관리. 학자, 문신.
[네이버 지식백과] 정몽주 [鄭夢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〇 牧隱 李文靖
이색 [ 李穡 ]
자 영숙(穎叔), 호 목은(牧隱), 시호 문정(文靖)
고려후기 대사성, 정당문학, 판삼사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학자.
[네이버 지식백과] 이색 [李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〇 退溪 李文純
이황(李滉)
이칭/ 경호(景浩), 퇴계(退溪), 퇴도(退陶), 도수(陶叟), 문순(文純)
조선전기 성균관대사성, 대제학, 지경연 등을 역임한 문신.학자.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황(李滉))]
〇 陶菴 李文正
이재 [ 李縡 ]
이칭별칭
자 희경(熙卿), 호 도암(陶菴), 한천(寒泉), 시호 문정(文正)
조선후기 대사헌, 이조참판, 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네이버 지식백과] 이재 [李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홍석주 [ 洪奭周 ]
이칭별칭
자/성백(成伯), 호/연천(淵泉), 시호/문간(文簡)
유형/인물
시대/조선
출생 – 사망/1774년(영조 50) ~ 1842년(헌종 8)
성격/문신
성별/남
본관/풍산(豊山)
저서(작품)/연천집, 학해, 영가삼이집 등
대표관직(경력)
충청도관찰사, 이조판서,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손부
정의
1774(영조 50)∼1842(헌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백(成伯), 호는 연천(淵泉). 할아버지는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이며, 아버지는 우부승지 홍인모(洪仁謨)이다. 약관에 모시(毛詩)·경례(經禮)·자사(子史)·육예백가(六藝百家)의 글을 모두 읽어 일가를 이루었다.
생애
또한 한번 읽은 글은 평생 기억할 정도로 총명해 동료들이 감탄하였다. 1795년(정조 19) 전강(殿講)에서 수석을 해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전을 받고, 그 해 춘당대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사옹원직장을 제수받았다. 1797년 승정원주서가 되고, 1802년(순조 2) 정언이 되었으며, 1807년에는 이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가선대부에 올라 병조참판이 되고, 1815년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그 뒤 1832년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거쳐, 183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손부를 제배받고 1842년에 졸하였다.
활동사항
지위가 정승에 이르렀는데도 자품이 고요하고 겸허해 처하기를 평민과 같이하였다.
그리고 학문이 심수하고 의리에도 정통해 시서역예(詩書易禮)의 교훈과 성명이기(性命理氣)의 철학에 달통하였다. 그는 특히 도학가적인 문학론을 전개해 “심외무부(心外無父)요 도외무심(道外無心).”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문(文)’이란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닦아지고 학문이 쌓이면 그것이 덕(德)도 되고 도(道)도 되며, 어(語)도 되고 문도 된다. 바로 도·덕·어·문이 하나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은 마음의 공부도 없이 입만으로 인의성경(仁義誠敬)을 외치므로 말은 문과 맞지 않고 마음은 말과 응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진(秦)·한(漢)의 고문(古文)을 소급해 올라가야 한다면서 의고문가(擬古文家: 秦漢派)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진·한의 고문은 한유(韓愈)·구양수(歐陽修) 같은 대문호도 미칠 수 없음을 탄식했는데 하물며 우리가 그를 배우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하였다.
이어서 삼라만상이 쉬지 않고 변하므로 지금에 와서 복고가 안 되는 것은 재주가 없어서가 아니라 형세가 그렇게 되어 안 되는 것이라며 시의에 맞는 진솔한 글을 쓸 것을 역설하였다.
김윤식(金允植)은 “보취(步趣)에 법도가 있어 구확(矩矱: 법)의 밖을 넘지 아니하며, 우여용용(紆餘舂容)해 감격적이면서도 상하지 않으니 실로 치세(治世)의 글이다.”라고 평하였다.
저서로는 『연천집』·『학해(學海)』·『영가삼이집(永嘉三怡集)』·『동사세가(東史世家)』·『학강산필(鶴岡散筆)』 등이 있고, 편서로는 『속사략익전(續史略翼箋)』·『상예회수(象藝薈粹)』·『풍산세고(豊山世稿)』·『대기지의(戴記志疑)』·『마방통휘(麻方統彙)』·『상서보전(尙書補傳)』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순조실록(純祖實錄)』
『헌종실록(憲宗實錄)』
『매산집(梅山集)』
『호암전집(湖岩全集』
『연천집부편가상(淵泉集附編家狀)』
『조선유교연원』(장지연, 회동서관, 1922)
『조선유교사』(현상윤, 민중서관, 1949)
「고문(古文)의 원류와 성격」(김도련, 『한국학논총』 2, 1979)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홍석주 [洪奭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