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義兵)을 일으킴 [ 학송 전유형 ]

2023. 2. 1. 20:45 인물열전

 

의병(義兵)을 일으킴

 

학송 전유형

 

1592년 4월 13일

왜놈들이 우리나라 국경을 침범해서 14일 부산을 함락시키고 15일 동래를 습격하였다. 동래부사 송상현이 사태가 이미 틀렸음을 알고 호상(胡床)에 앉아 움직이지 않으므로 적이 와서 무기로 협박하여 항복시키려 했지만, 송상현은 굴복하지 않고 죽음에 다다라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태연하였다. 적도 이에 의롭게 여겨 관을 갖추어 산에 장사지내주었다. 이때는 나라가 200년 동안이나 태평스러워 백성들이 병란을 모르고 지냈던 때였으므로, 동래가 함락된 후에는 왜기(倭旗)를 보기만 하여도 모두 산이나 들로 도망가서 수령도 금하지 못하였으니 군사의 가련함을 앉아서 볼 뿐이요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적은 사납게 다니면서 마구 찌르고 빼앗으니, 마치 아무도 없는 땅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열흘이 채 못되어 이미 상주에 도달하였고 순변사 이일(李鎰)이 적과 싸우다 패하여 말을 버리고서 혼자 충주로 도망하였다.

 

그러나 조령(鳥嶺)에는 아군이 없어 1592년 4월 27일에 적이 그 빈틈을 타 조령을 넘어

 

1592년 4월 28일

드디어 충주를 함락시켰다. 여기 순변사 신립(申砬)이 싸우다가 죽고 참모의(參謀議) 김여물(金汝岉) 또한 전쟁 중에 죽었다.

 

적의 칼날은 이기는 것을 기회로 삼아 앞으로 향하는데, 앞에는 아군이 없으니 사태는 급하고 계책은 궁하여, 임금께서도 도읍을 버릴 의논을 하시었다. 이달 그믐날 임금님을 모신 수레가 서쪽으로 모셔지고 평양에 머물다가 평양에서 의주로 옮겨 모셔졌는데,

 

다행히도 조상님들께서 사기를 북돋아 주신 효력에 힘입어 분개하여 붓을 던지고 촌집으로부터 일어난 자가 한 백여 명이나 되었다. 처음에는 의병이 일어나지 않아서 유형(全有亨)이 격문을 지어서 백성들을 깨우쳤는데 그는 말하기를

 

“ 대대로의 조상 무덤이 있는 고향과 잘 자란 커다란 나무들을 조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선대왕의 덕택이 아닌 것이 없고

기둥을 올리고 처마를 내리고 편안히 살며 밥을 먹는 것이 임금님의 은혜 아닌 것이 없으니

구차하게 사는 것은 곧게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물며 숨는다고 해도 반드시 죽을 것이라면 어찌 한번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가 죽지 않겠는가?

무릇 죽음은 한 가지일 것인데 마땅히 죽을 때 죽으면 죽는 것도 오히려 영화일 것이다.”

라고 하였다.

 

1592년 5월 6일

전에 좌랑을 지낸 조헌이 편지로 나를 불러서 말하기를

자네가 삼한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지체 높은 집안으로서 차마 왜놈의 백성이 될 수야 있겠는가?”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좌랑이여 좌랑께서 정말로 내 마음을 아시는구려” 하면서 드디어 둘이 같이 울다가 내가 붓을 잡아 격서를 초안하고 기(旗)를 이름하여 의병을 모집하는 기(旗)라고 하였다.

 

1592년 5월 20일에는

김천일이 군사를 일으켰고 전에 좌랑을 지낸 신경행이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지가 한 보름쯤 되었다고 하는 것을 들었다.

 

1592년 7월

명나라 군사가 요동을 건넜다는 것을 들었고 곧이어

 

1592년 12월에는

천자께서 많은 군사를 보내주어서 도착하였다.

 

[原文]

 

萬曆二十年壬辰四月十三日倭奴犯國十四日陷釜山十五日襲東萊府使宋象賢知事去坐胡床不動賊臨之以兵脅使降象賢不屈臨死神色自若賊義之具棺葬于山當此時國家升平二百年後也民不知兵東萊陷後望見倭旗盡迸山野守令不能禁連帥束手坐觀而已賊橫行搶掠如入無人之地不十日已至尙州巡邊使李鎰拒賊致衂棄馬脫身奔還忠州於是鳥嶺無兵矣二十七日賊乘虛踰鳥嶺二十八日遂陷忠州都巡邊使申砬死之參謀議金汝岉亦死於亂兵中賊鋒乘勝所向無前事急計窮乃發聖上去邻之議是月晦日大駕西幸駐平壤自平壤移御義州幸頼祖宗扶養士氣之效慷慨投茟起自蓬蓽者以百數當初義兵未起有亨作一檄諭諸士民其略曰桒梓喬木傳自祖父莫非先王之澤上棟下宇安居粒食無非聖主之恩偸生不如直死况與其竄匿而必死無寧一戰而死國夫死一也而死於當死死猶榮矣五月初六日前佐郞趙憲步至槐山以書招我握手泣曰子以三韓舊族其忍爲倭奴之民乎我應之曰佐郞佐郞實獲我心遂相與呼哭使我操筆草檄名其旗曰招募義兵之旗二十日聞金千鎰起前佐郞辛景行獎卛同志誓天擧義者十有五日矣七月聞天兵渡遼十二月天子繼發大兵

 

[출처] 학송일기

 


 

 

◎ 舊族 [구족]

옛적에 지체가 높았던 오래된 집안.

 

◎ 삼한갑족 [ 三韓甲族 ]

우리나라의 옛적부터 대대로 門閥(문벌)이 높은 집안

[네이버 지식백과] 삼한갑족 [三韓甲族] (한자성어•고사명언구사전, 2011. 2. 15., 조기형, 이상억)

 

 

◎ 송상현 [ 宋象賢 ]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로 재직하였고 왜적을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사후 충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동래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송상현 [宋象賢]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이일(李鎰)

조선시대 지중추부사, 비변사당상, 훈련원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일(李鎰))]

 

◎ 신립(申砬)

신립은 조선전기 함경도남병사, 삼도순변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1546년(명종 1)에 태어나 1592년(선조 25)에 사망했다. 글읽기보다 무예 닦기를 좋아하여 22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임진왜란 전에는 북방의 야인들을 소탕하여 육진을 지키고 용맹을 떨쳤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삼도순변사로 임명되어 충주로 내려갔다. 조령을 요충지로 삼아 잠복 전투를 하자는 건의를 무시하고 기병 활용을 통한 정면돌파를 주장하여,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적과 맞섰으나 중과부적으로 포위되어 참패를 당하자 남한강에 투신, 순절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립(申砬))]

 

◎ 김여물(金汝岉)

선조 즉위년인 1567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7년(선조 10)에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문무를 겸비했으나 성품이 호탕하고 법도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해 높은 벼슬자리에는 등용되지 못하였다.충주도사(忠州都事), 담양부사를 거쳐, 1591년에는 의주목사로 있었으나, 서인 정철(鄭澈)의 당으로 몰려 파직,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이 무략에 뛰어남을 알고 옥에서 풀어 자기 막중(幕中)에 두려고 하였다. 그런데 도순변사로 임명된 신립(申砬)이 재능과 용기가 뛰어나고 충의로운 선비임을 알고 자기의 종사관으로 임명해줄 것을 간청해 신립과 함께 출전하였다.신립이 단월역(丹月驛)에 이르러 몇 명의 군졸을 이끌고 왜적의 북상로인 조령(鳥嶺)의 형세를 정찰할 때, 상주(尙州)에서 패주해 온 순변사 이일(李鎰)을 만나 조령 방어의 어려움을 알고 충주로 가 배수의 진을 치기로 결정하였다.김여물은 이것을 반대하고, 적은 수의 군사로 많은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먼저 조령을 점령해 지키며, 그렇지 못하면 평지보다는 높은 언덕을 이용해 왜적을 역습하는 것이 좋겠다고 강력히 주장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결국, 충주의 달천(㺚川)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신립을 따라 탄금대(彈琴臺) 아래에서 용전분투했으나 왜적을 당하지 못해 강에 투신, 순국하였다.충주 싸움의 패배를 예견하고 아들 김류에게 “삼도(三道)의 근왕병(勤王兵)을 요청했으나 한 사람도 응하는 자가 없다. 우리들이 힘을 다해 싸우나 아무런 도움이 없으니 안타깝다. 남아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본시 바라는 바이지만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고, 또 장한 뜻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한갓 재가 되어버리니 하늘을 우러러 한숨만 지을 뿐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또, 가족에게는 “내가 이곳에서 죽더라도 우리 일가는 모두 임금님의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돕되 결코 난을 피해 다른 곳으로 도망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광해군 초에 충절로써 정려(旌閭)되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뒤에 종래의 포상에 의심스러운 데가 많다고 하여 고쳐진 일도 있으나 1639년(인조 17)에 아들 김류의 청에 의해 다시 정표(旌表)되었다.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1788년(정조 12)장의(壯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리고 순조 때에는 신립 등과 함께 임진왜란 때 순의(殉義)한 충주달천의 옛터에 제사를 지내 충절을 기렸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여물(金汝岉))]

 

◎ 조헌 [ 趙憲 ]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규 등 승병과 합세해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뛰어난 학자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헌 [趙憲]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김천일 [ 金千鎰 ]

조선 중기의 문신 ·의병장. 임진왜란 때 나주에 있다가 고경명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왜적에게 점령된 서울에 결사대를 잠입시켜 싸우고, 명나라 제독 이여송의 군대를 도왔으며, 진주성을 사수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자결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천일 [金千鎰]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신경행 [ 辛景行 ]

조선 중기 문신. 종사관으로서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고 청난공신에 책록되고 영성군에 봉해졌으며 병마절도사에 이르렀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경행 [辛景行]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