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1. 21:32ㆍ 인물열전
성균진사 두암 전선생(全滎) 유허비문 [成均進士 斗岩全先生遺墟碑文]
대저 명예(名譽)와 덕(德)이 있음은 사람들이 칭송(稱頌)하고 사모하는 바이다. 그 유풍(遺風)이 가히 오랜 세월 동안 영향을 주므로 비록 수백 년 후에도 그 살던 마을과 놀던 곳을 반드시 사람들이 칭송(稱誦)하게 됩니다. 곧 관련된 터에 유허비(遺墟碑)가 있음은 그 공덕의 불망(不忘)을 기록한 바이니 가히 멈추지 아니할 것이다.
완산전씨(完山 全氏)는 예부터 초계에서 우러러보는 망족(望族)으로 이책(二冊)고을에 그 세거(世居)하였다.
그 선조(先祖)에 성균진사(成均進士) 두암(斗岩) 휘(諱)에 형(滎) 자(字)에 달보(達甫) 일호(一號) 매은(梅隱)은 증(贈) 이조판서(吏曹判書) 탁계선생(濯溪先生) 치원(致遠)의 손(孫)이요 수족당(睡足堂) 우(雨)의 자(子)이다.
대대(代代)로 문행(文行)으로 이어왔으며 젊어서부터 배움에 뜻을 두어 힘썼고 또 글씨 공부를 하여 다못 종요(鍾繇)와 왕휘지(王羲之)의 묘법(妙法)을 얻었다. 일찍이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창석(蒼石) 이준(李埈) 양(兩)선생(先生)의 문하(門下)에 왕래하여 깊이 그 추허(推許)를 얻었다.
또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을 쫓아 김공(金公)이 신사(信使)를 받들어 일본(日本)에 가게 됨에 동행(同行)하기를 권(勸)하여 일본국(日本國)에 도착하였다. 일본사람들이 그 화려한 필력(筆力)을 사모하여 글씨를 청(請)하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글씨를 얻은 자는 서로가 보배(寶玩)로 소문내고 서옥(瑞玉)과 비취옥(翡翠玉)같이 받드니 예물(禮物)의 보물이 산더미처럼 쌓였으나 다 물리치고 받지 아니하였다.
이로부터 더욱 공경하고 복종하니 원근(遠近)에서 높이 칭송(稱頌)하였다. 장차 돌아오려 하니 사람들이 정제(整齊)된 은(銀) 한 자루를 가지고 나룻가에 늘어서서 송배(送拜)하거늘 공(公)이 나루에 이르러 종들에게 명하여 은(銀)이 들은 자루를 바닷물에 던졌다.
저들이 모두가 크게 부르짖어 해동(海東)의 청사(淸士)라 하고 그로 말미암아 그 지명(地名)을 투은포(投銀浦)라 하였다.
귀국하여 김공(金公)이 나라를 빛나게 하였으니 조정(朝廷)에 상신(上申)하여 벼슬이 내려지도록 하려 하니 공(公)이 사양(辭讓)하여 이르기를 “섬나라에 건너감은 다만 구경차 간 것이요 이로 인해 벼슬을 받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라 하였다.” 공(公)의 그 높은 뜻을 알고 다시는 강청(强請)을 아니 하였다 한다.
후(後)에 사마시(司馬試)로 성균진사(成均進士)가 되었으나 은거(隱居)하여 강학(講學)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여생(餘生)을 마쳤다 별세하여 도계서원(道溪書院)에 향사(享祀)하였다.
대개 공(公)이 글씨로 타국에서 이름을 떨친 연고로 오늘날에 이르러 고을과 나라에서 서예(書藝)를 말하면 반드시 으뜸으로 꼽힌다. 이는 특별히 서예가(書藝家)로서 길이 남을 일이며 그 폐백(幣帛)을 물리치고 은(銀)을 던지고 벼슬을 사양하고 영화(榮華)를 마다하니 맑은 뜻과 고상(高尙)한 지조(志操)가 사우(師友) 학문의 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이는 그 학덕(學德)의 실상(實相)이니 이 과정을 아는 자 적을 것이다.
공(公)의 12세손 혁열(爀烈)이 그 아우 명열(明烈)로 더불어 이미 집을 지어 공(公) 양세(兩世)를 우모(寓慕)하고 또 돌을 세워 공(公)의 끼친 터를 드러내어 나에게 방문하여 비문(碑文)을 청(請)하였다. 내 이 고을에 살고 일찍이 공(公)의 유풍(遺風)을 들은 적이 있어 능히 사양치 아니하고 곧 그 일을 차례로 하여 이어
명왈(銘曰)
덕(德)을 쌓아 재주로 노나니 성문(聖門)에 전하는 바이네
덕(德)이 재주의 근본이니 이것이 없으면 곧 치우친다네
학(學)을 심고 덕(德)을 쌓으니 재주를 겸하였다네
신필(神筆)에 들어서니 섬나라에까지 이름을 떨쳤네
진보(珍寶)도 작게 보니 천함과 뜻이 맞지 아니하네
우아한 지조(志操)가 높이 이루었으니
덕(德)이 아니면 어찌 그러하리
덕(德)과 재주가 아울러 온전하니 공(公)이 곧 이와 같다네
후세(後世)사람이 칭송하고 사모 하러니 어찌 이를 아니 보리
花山 權龍鉉 撰
星山 李憲柱 謹書
[자료제공] 경남 합천군 청은 전호열
◎ 전형 [ 全滎 ]
출생-사망
1609 ~ 1660
주요작품
《가락국김수로왕비》
조선 인조(仁祖) 때의 서예가. 본관 전주(全州). 자 달보(達甫). 호 매은(梅隱).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636년(인조 14) 통신사 임광(任絖)일행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글씨로 명성을 떨쳤으며, 1647년 김해(金海)의 《가락국김수로왕비(駕洛國金首露王碑)》의 비문을 썼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형 [全滎]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김세렴 [ 金世濂 ]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소학》, 《성리자의》, 《독서록》 등을 간행하여 도민의 교화에 힘썼다. 평안도관찰사를 지냈으며, 대사헌 겸 홍문관제학, 도승지를 거쳐 호조판서로 승진되었다. 문집에 《동명집》, 저서에 《동명해사록》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세렴 [金世濂]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조선 통신사 행렬도
이 그림은 1636년(인조 14) 조선 후기 제4차 통신사 일행이 일본 에도(江戶)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린 행렬도이다. 당시 통신사행의 목적은 일본의 태평성대를 축하하는 한편 일본 정세를 탐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사행의 총책임자격인 정사正使는 임광任絖, 부사副使는 김세렴金世濂이었으며 사행단의 총인원은 475명이었다. 이 그림에는 조선 통신사 일행과 그들을 호위하는 왜인들의 모습이 잘 묘사되었다. 특히 통신사 일행은 모두 말을 타고 있고 이들 하나하나에 호위 왜인들이 4~5명에 이르러 조선통신사 일행의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또한 통신사 구성원들의 상단에 이들의 직책이 기록되어 있고 행렬의 순서와 의장儀仗, 기물들도 상세히 묘사되어 당시 통신사의 규모와 역할을 물론 그 현장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 통신사 행렬도 (e뮤지엄)
◎ 鍾繇(종요)
중국(中國) 삼국시대(三國時代) 위나라(魏--)의 대신(大臣)ㆍ서예가(書藝家)(151~230). 자(字)는 원상(元常). 조조(曹操)를 도운 공(功)으로 위나라(魏--) 건국(建國) 후 태위(太尉)가 되었다. 해서(楷書)에 뛰어나 후세(後世)에 종법(鍾法)으로 일컬어졌으며, <선시표(宣示表)>, <묘전병사첩(墓田丙舍帖)> 따위가 법첩(法帖)으로 전(傳)한다.
◎ 왕희지 [ 王羲之 ]
중국 동진(東晉)의 서예가. 중국 고금(古今)의 첫째가는 서성(書聖)으로 존경받고 있다.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예술로서의 서예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예서(隸書)를 잘 썼고, 당시 아직 성숙하지 못하였던 해 ·행 ·초의 3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완성한 공적이 있으며, 현재 그의 필적이라 전해지는 것도 모두 해 ·행 ·초의 3체에 한정되어 있다. 오늘날 전하여오는 필적만 보아도 그의 서풍(書風)은 전아(典雅)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품이 높다.
[네이버 지식백과] 왕희지 [王羲之]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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