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전씨 시조 백제 개국 공신 전 섭 이야기

2008. 5. 10. 08:04 인물열전

 

1세.             백제 개국 공신 환성군

 

(百濟 開國 功臣 歡城君)


               전   섭(全   聶) 


  시조  全聶은  백제 개국공신이시다.


  公은 고구려 동명왕의 세째 아들 온조(溫祚)가 부여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건국할때


  전섭(全聶), 오간(烏干), 마려(馬黎), 을음(乙音),  조성(趙成), 해루(解婁), 흘우(屹于), 곽충(郭忠), 한세기(漢世奇) 등과 함께 온조를 도운 10명의 공신중의 한사람으로 후에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습니다.


  Tbroad 중부방송은 "방송위원회와 천안시의 지원을 받아 7개월 동안 제작한 이 프로그램은 '삼국유사',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왕조실록'등의 고문헌과 '동여비고', '조선팔도고금총람도' 등 고지도가 백제의 첫 도읍을 직산으로 비정하고 있다는 점을 새롭게 부각했다"고 설명했습니다.

  1부 '부아악의 비밀'에서는 온조와 비류가 도읍지를 찾기 위해 올랐던  '부아악(負兒嶽 )'의 위치를 규명하기 위해 삼국사기 등 문헌 기록과 현장을 비교할 예정입니다.

  2부 '서거정, 직산을 말하다'에서는 과거 직산현 일대 지형과 충남 천안시 입장면(구 직산현) 위례산성 일대에 남아있는 각종 유물 유적을 통해 백제초도 직산설에 한 발 접근합니다.

  제작진은 특히 서울대 임효재 교수팀이 10여년 전 위례산에서 출토한  석물(石物)의 나머지 반쪽을 찾아내 이 석물의 성격을 규명하는 작업도 공개합니다.

  제작진은 천안지역에 터를 잡고 매년 백제 개국공신의 시제를 지내고 있는 '조성', '전섭', '마려' 후손들의 시조설을 학술적으로 뒷받침할만한 근거도 찾아냈다고 밝혔습니다.


  여기에 삼국사기 권제23 백제본기의 시조조(始祖條)를 실어서 백제의 건국과정과 위례성이 우리고장의 직산 지방이었음을 확인하여 봅니다.


[百濟始祖溫祚王 其父鄒牟 惑云朱夢 (백제시조온조왕 기부추모 혹운주몽)]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그의 아버지는 추모이고 또 주몽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의 건국 설화가 모두 전설적이다.  그러나 백제의 건국시조는 그렇지 않으며 계통이 뚜렷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고구려나 신라의 건국설화는 란생설(卵生設)로부터 시작되었으나   백제의 건국설화는 그와는 다릅니다.  뚜렷하게 부계(父系)와 모계(母系)를 밝혔습니다.   이와 같이 온조와 비류의 아버지 계통을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우리는 두 가지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옮겨와서 살았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남쪽으로 옮겨온 그들은 고구려의 영토권 내에서 벗어나 그보다도 훨씬 남쪽에 건국한 사실입니다.


  고구려에서 벗어난 사실은 그들 일행이 건국을 위한 이동이 아니고 부왕인 주몽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태자로 책봉되지 못한 사실 때문에 일종의 망명행각이라고 봅니다.


  망명의 행각중에 대방의 고지에 그들이 세운 백제도 낙랑과 마한 사이였을 것으로 보며 많은 북방의 이동 민족과 한사군에 항거하는 토착세력과 이들이 합세하여 강력한 해양국가를 건설하고 주변과 투쟁하면서 성장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지역에 뿌리를 박고 있던 기성세력의 반발로 국경분쟁을 일으키고 드디어는 물길을 통하여 남하합니다.


[遂與烏干馬黎等 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수여오간마려등 십신남행 백성종지자다)]


  비류와 온조는 오간, 마려, 전섭 등 십신과 더불어 남쪽으로 길을 떠났고 따르는 백성들도 많았다는 뜻입니다.


일행과 함께 남하했던 열사람의 신하들은 온조를 포함한 십제공신(十濟功臣)을 말한다.


  열사람의 신(臣)을 정확하게 밝히면  온조(溫祚),  오간(烏干),  마려(馬黎),  을음(乙音), 전섭(全聶), 조성(趙成), 해루(解婁), 흘우(屹于),  곽충(郭忠),  한세기(漢世奇) 등이다.


  이중 왕족인 비류, 온조는 부여씨(扶餘氏)로 오늘날의 서씨(徐氏)의 시조가 되었고 나머지 아홉분의 성씨 중에 다섯분의 성씨는 현재에 전해지고 나머지 네분은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중도에 변성이 된 것으로 봅니다.


  현전하고 있는 다섯 성씨 중에 전섭(全聶)과 조성(趙成)도 온조와 함께 남하했다가 이곳 직산지방에서 백제건국에 큰 공적을 남기고 인근 지방에 낙향하여 살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백제 개국공신 조성은 경양군(慶陽君)에 피봉되었고 전섭은 환성군(歡城君)에 피봉된 것을 보면 경양과 환성은 모두 직산을 중심으로 한 주변의 지방명입니다.  (경양은 경양포로 오늘날의 아산만의 일각이고    환성은 천안의 옛 지명이기도 하며 천안시에서 서남향에 있는 풍세면 일대를 이른 말입니다.)


  온조를 보필하고 백제건국에 큰 공을 세운 조성은 명문가인 직산조씨 시조로 백제대장군이며 개국공신의 수공신(首功臣)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직산지방에 머물러 살았으며  그의 묘소는 직산의 성산 사동(蛇洞)에 있다고 한다.      1985년 직산조씨의 문중에서 신도비(神道碑)를 시조가 정착했다는 직산면 군동리에 세운 바 있습니다.


앞에서 밝힌 직산지방이 위례성이었다는 사실은 이것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한편 정선 전씨(全氏)의 시조로 추앙되고 있는 전섭(全聶)은 관계에서 물러나 지금의 천안군 풍세면에 우거하며 살았다고 하며 그의 후손들이 지방에 군거하고 있으며 세계(世系)를 62세(世)로 백제건국과 연대를 거의 같이 하면서 시조의 신도비를 이곳에 세워 그의 온조왕 보필의 공적과 백제건국의 공훈을 높이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조씨와 전씨 양가의 시조가 이곳에 머물러 누대를 살아왔으며 봉군의 작위를 받은 사실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온조왕과 위례성의 관계를 더욱 확실하게 하고 있으며 ‘위례성’이 백제의 첫 서울임을 의심할 바 없게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직산 조씨의 시조 경양군 조성과 천안 전씨의 시조 환성군 전섭의 봉군에 관해서 알아본다.   봉군(封君)이란 국가가 공신이나 훈신에게 내리는 작위의 하나로 대개 봉군을 받는 사람이 사는 지방명을 붙이거나 아니면 특수한 업적에 따라 짓는 것이 보통입니다.


  여기 두 분의 봉군은 지명을 따라 내려진 것으로 오늘날의 경양포와 천안지방이다. 십신이 온조와 더불어 백제건군의 작업을 할 때에는 BC와 AD가 교체되는 아득한 시기이다.    약 2000여년 전에 과연 봉군이라는 제도가 있었을까 하면서 걱정하는 이가 없지 않습니다.  허나 그렇게만 생각할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한 김원룡 박사의 말을 다시 빌려 추려보면 “삼국의 초기를 신비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비류와 온조가 많은 부족을 이끌고 남하하기 이전의 생활 근거지는 분명히 중국의 영향을 받던 지역이다.   즉 만주의 졸본강 유역을 가르킨다. 그것도 중국문화가 펼쳐진 곳이다. 중국의 만리장성 안에서는 고도의 문화가 발달하였고 그 주변에도 그것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던 때다.   전한(前漢)이 건국되어 한참 전성을 누리다가 이제 멸망의 사양길을 걷는 때인지라 공(公)과 공(公)이 숱하게 많이 봉해졌음을 사서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런 지역에 살던 그들이 봉군한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다. 그들이 건국하기 수백년 전부터 중국의 영지 안에서는 봉군 행각이 있었음을 덧붙여 둡니다.


  또 한편으로는 봉군의 작위는 후손들이 국가에 주청해서 얻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 나타나는 봉군행각은 고려시대에 와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정선전씨(旌善全氏) 전섭(全聶)의 후손이나  직산(稷山) 조씨(趙氏)의 후손들이 려조(麗朝)에 와서 국가에 주청해서 얻어진 것으로 보는 이도 있음을 아울러 밝혀 둡니다.


비 고:

   ▶섭(聶)

   ▷합할 섭, 소근거릴 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