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민족 문화 유산의 수문장,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상징 전형필

2009. 9. 4. 06:39 인물열전

 

일제강점기   민족 문화 유산의 수문장,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상징

전형필(全鎣弼

 

1906∼1962.

문화재 수집가. 본관은 정선(旌善). 자는 천뢰(天賚), 호는 간송(澗松)· 지산(芝山)· 취설재(翠雪齋)· 옥정연재(玉井硏齋). 서울 출생.


중군(中軍, 西班, 정3품) 계훈(啓勳)의 증손으로, 내부주사(內部主事) 및 참서관(參書官)을 지낸 명기(命基)의 아들이다.


증조 때부터 서울 배우개(지금의 서울 종로4가) 중심의 종로일대의 상권을 장악한 10만석 부호가의 상속권자이다. 


 1. 사립박물관 보화각 설립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법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 일제식민통치 아래 말살되어가는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하여 우리 민족문화 전통을 단절시키지 말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문화의 결정체인 미술품을 인멸되지 않게 일당(一堂)에 모아 보호하여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오세창(吳世昌)을 따라다니며 민족문화재 수집보호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물려받은 막대한 재력과 오세창의 탁월한 감식안, 그리고 이런 문화적 민족운동에 공명하는 많은 지식인들의 후원으로 이러한 소망은 순조롭게 이루어져갔다.


그래서 장차 우리 미술사 연구의 요람을 건설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당시에는 한적한 교외이던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하여 필요한 부지를 확보하고(1934), 1938년 일제의 강력한 물자통제령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북단장 내에 보화각(葆華閣)을 건축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을 설립하였다.

 

2. 서화수집

 그 사이에 그는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서화에 일가를 이룬 오세창의 측근 문사들과 교유를 가졌다. 권동진(權東鎭)·민형식(閔衡植)·고희동(高羲東)·지운영(池雲英) 등의 전배(前輩)들과 이상범(李象範)·노수현(盧壽鉉)·이마동(李馬銅)·김영랑(金永郞) 등의 동년배들이 그들이다.


이들과의 교유 속에서 그의 탁월한 예술감각은 자신의 서화 자체를 가경(佳境)에 이르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감식안을 청람(靑藍)의 경지로 향상시켜놓았다.


그러나 그는 이런 자신의 능력을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 10만석 가산을 탕진한다는 비방을 들을 정도로 오직 문화재 수집에만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우리 미술사에서 서성(書聖)·화성(畵聖)으로 높이 추앙할 수 있는 김정희(金正喜)와 정선(鄭歚)의 작품이 집중적으로 수집되어 그에 대한 올바른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게 한 것을 비롯하여, 심사정(沈師正)·김홍도(金弘道)·장승업(張承業) 등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화적은 물론, 서예작품까지 총망라하였고, 고려 및 조선 자기와 불상·불구·와전 등에 이르는 문화재들을 방대하게 수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 미술사 연구를 위한 인접자료인 중국 역대미술품을 수집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3. 문헌자료 수집

 문헌자료의 구비를 위하여


1940년부터는 

관훈동 소재 한남서림(翰南書林)을 후원, 경영하면서 문화사 연구에 필요한 전적을 수집하여 한적(漢籍)으로 1만권의 장서를 이루어놓았고, 당시 국내외에서 발간되는 문화사관계 서적들도 가능한 한 수집하여 장차 연구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4. 교육사업과 미술연구소 설립

 그리고 인재양성이 또 하나의 절실한 문제임을 통감하고


1940년 6월

재단법인 동성학원(東成學園)을 설립하여 재정난에 허덕이는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를 인수하여 육영사업에 착수하였다.


광복 후에는 잠시 보성중학교장직을 역임하기도 하고(1945.10. ∼1946.10.), 문화재보존위원회 제1분과위원에 피촉(被囑)되기도 하였으나(1954), 항상 공직에 나가는 것을 피하고 시은(市隱)을 자처하였다.


1960년 

김상기(金庠基)·김원룡(金元龍)·진홍섭(秦弘燮)·최순우(崔淳雨)·황수영(黃壽永) 등과 같이 고고미술동인회(考古美術同人會)를 발기하여 운영의 핵심을 담당하면서 1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62년

 1월에 죽자,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문화포장이 추서되고, 1964년 대한민국문화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그뒤 그의 자제와 동학들이 북단장에 한국민족미술연구소(韓國民族美術硏究所)를 설립하고 그가 마련해놓은 연구자료를 토대로 미술사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해감으로써 그 유지를 계승하고 있다.


보화각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으로 개칭되어 연구소에 부속되어 있다.

 

[참고문헌]

旌善全氏總譜

澗松先生의 逝去를 哀悼한다(考古美術同人會, 考古美術 19·20, 1962)

澗松文華 1(韓國民族美術硏究所, 1972) 

 

▷ 중군(中軍)

 ① 조선시대 각 군영(軍營)에 속한 종이품(從二品) 서반 무관(武官)으로 정원은 1원이다. 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수어청(守禦廳)·총융청(摠戎廳) 등 5군영의 대장(大將)이나 사(使)의 버금 벼슬로 아장(亞將)이라고 하였다.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는 제수를 받을 수 없었다. 각 군영에서 대장 또는 사를 보좌하면서 실무를 맡아 보았다. 군안(軍案) 관리, 시취(試取)·고강(考講) 감독, 군기검사, 훈련감독 등의 임무를 맡았다. 

 ② 경기·충청·전라·경상·강원·황해·평안·함경 각 도의 감영중군(監營中軍)으로 감사(監司)의 다음인 버금 벼슬이다. 경기도의 황해중군(黃海中軍)·수원중군(水原中軍)·통어중군(統御中軍), 충청도의 병영중군(兵營中軍)·수영중군(水營中軍), 전라도의 병영중군·좌수영중군·우수영중군·제주중군(濟州中軍), 경상도의 좌병영중군·우병영중군·통영중군(統營中軍)·산성중군(山城中軍)·좌수영중군, 황해도의 병영중군·수영중군, 함경도의 남병영중군·북병영중군, 평안도의 병영중군 등 각 군영의 버금 벼슬로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이었다. 

 ③ 개성유수(開城留守)·강화유수(江華留守)의 다음인 버금 벼슬이다. 개성중군(開城中軍)·강화중군(江華中軍)이라고 하였다. 


간송미술관 

[澗松美術館]


한국민족미술연구소, 남한서울미술관, 1938년설립, 서울성북구, 서울특별시의미술관, 박물관


한국 최초의 민간미술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해 있으며 1966년 전형필(全鎣弼:1906~62)의 수집품을 바탕으로 한국민족미술연구소 부설 미술관으로 발족했다. 전형필은 1929년부터 우리나라 전적·서화·도자기·불상 등의 미술품 및 국학자료를 수집하여, 1936년 지금의 미술관 건물인 보화각(保華閣)을 지어 보관해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태평양전쟁과 8·15해방, 남북분단 등 국내외의 격동 속에서 미술관을 일반에게 공개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후 아들인 성우(晟雨)·영우(暎雨)가 유업을 이어 1965년 가을부터 한국 고미술품 및 전적 정리작업을 시작, 〈고간송전형필수집서화목록 故澗松全鎣弼蒐集書畵目錄〉 상·하권을 간행했다. 1966년 정리작업 진행중에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이 발족되었다. 미술관은 연구소의 부설기관으로 미술품의 보전·전시업무를 맡고 있으며 연구소는 이를 바탕으로 미술사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1층과 2층에 전시실이 있으며 소장품은 전적·고려청자·조선백자·불상·불구(佛具)·부도·석탑·그림·글씨·와당·전 등 다양하다. 그중 〈훈민정음〉(국보 제70호)을 비롯하여 10여 점이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많은 유물들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1971년의 개관전시회 '겸재전'(謙齋展)을 시작으로 매년 봄·가을 2회에 걸친 수장품 전시회와 함께 논문집 〈간송문화 澗松文華〉를 발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