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형' 아토피, 산에서 답을 찾다
2009. 9. 29. 22:11ㆍ게시판
'천형' 아토피, 산에서 답을 찾다
[오마이뉴스 서부원 기자]
첫 아이는 아토피를 심하게 앓았다. 태어날 때부터 얼굴과 팔, 다리 주변에 열꽃이 피었는데, 그게 오늘날의 '천형'이라는 아토피인 줄 그땐 미처 몰랐다. 사실 그 말 자체가 무척 낯설었다. 남의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너무 안쓰러워서였던지 주위의 어르신들은 당신들의 경험이라며 한두 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피부가 깨끗해질 것이라고 했다. 주변에 그런 애들 많다면서. 우리 부부 역시 계절이 몇 번 바뀌고 아이가 스스로 밥을 떠먹을 때쯤이면 괜찮을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바람과는 달리 증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살갗이 짓물러지도록 긁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낮과 밤이 바뀌어버렸다. 아이의 고통은 맞벌이였던 우리 부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부모로서 괴로워하는 아이를 곁에서 지켜봐야하는 것도 그렇지만, 매일 밤을 설친 채 출근해야 하는 일상은 정말 버티기 힘들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기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고통이 커질수록 귀는 얇아졌다. 아토피에 좋다는 음식 안 먹여본 게 없고, 한방, 양방 가리지 않고 용하다는 병원은 다 찾아다녔다. 홍삼 엑기스는 기본, 수세미즙과 그 쓰다는 인진쑥도 마다하지 않았고, 식용 황토와 숯을 먹이기까지 했다. 마시는 물은 물론 씻을 물조차 가려야 한다기에 값비싼 정수기도 구입했고, 매주 숲이 우거진 자연휴양림으로 순례 다니듯 했다.
한 해 두 해 고통스러운 시간은 흘렀지만, 별반 나아진 게 없었다. 단지 아이가 손톱으로 긁는 대신 손바닥으로 때리고, 아빠, 엄마가 챙겨주지 않아도 보습제를 찾아 바르는 등 스스로 노력하게 됐다는 게 변화라면 변화다. 네 살배기가 진물이 흐르는 상처를 보여주며, 자기도 모르게 손이 가도 닿지 않도록 거즈를 덧대어 달라고 말할 땐 정말 코끝이 시큰했다.
패스트푸드와 과자류는 물론, 기름지고 단 음식과 우유 등은 애초부터 금기의 음식이었다. 유치원에서 친구들이 콜라와 함께 튀김닭과 피자를 먹을 때, 엄마가 싸준 떡과 요구르트를 먹게 했다. 집에 와서는 '나쁜 음식 하나도 안 먹었다'며 으스댔지만, 친구들을 부러워하는 표정이 스쳐 무척 가슴 아팠다. 그야말로 아토피에 대한 '관리'는 끝도 없었다.
좋아지리란 기대가 시나브로 사그라졌지만 병원만은 줄기차게 다녔다. 의사의 '좋아졌다'는 그 말 한마디를 듣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아니 '상태가 나빠지지 않았다'는 말만으로도 충분히 위안 받을 수 있을 정도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의사의 솔직한 '고백'과 명쾌한 처방을 듣고, 스스로 아토피에 맞서는 결심이 섰다. 더 이상 기댈 게 없다는 탄식에서 나온 자구책이었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면서 이런 얘기를 건넸다. 고통스러워하는 환자와 그 가족들 앞에서 꺼낼 수 있는 말은 분명 아니었지만, 그랬기에 더 믿음이 갔고, 나 역시도 그럴 것이라고 수긍하고 있었다.
"아토피가 약을 복용한다고 해서 증세가 호전되는 병이 아니라는 것, 아버님도 잘 아시죠? 얘 스스로 이겨낼 수 있도록 면역력을 길러줘야 해요. 말하자면 그 어떤 약보다 꾸준한 운동이 더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죠."
이 말이 아니었어도, 우리 부부는 아토피에 대해 이미 웬만한 의사만큼의 지식과 정보를 알고 있었다. 두루 알다시피 아토피는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의미다. 곧, 치료제가 아직 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 아토피는 대개 비염과 천식을 동반한다. 짓무른 피부가 깨끗해진다고 해도, 코와 기관지가 몸을 괴롭히게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른바 '면역계 질환 3종 세트'다.
그런데도 병원과 약국을 제 집 드나들듯 하는 건 그저 위로받고자 하는 처절한 몸짓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결국 지금껏 의존했던 '친구 따라 강남 가는' 방식을 접고, 좀더 적극적인 대응을 고민했다. 약 같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통해 '치료'하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몸 안으로부터 아토피의 고통을 '극복'해내는 방법이 분명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체력과 인내력이 필요했고, 그 답을 산에서 찾았다.
일곱 살이 되던 작년 봄부터 우리 부자의 산행이 시작되었다. 집에서 가까운 광주 무등산을 시작으로, 주말을 이용해 순천 조계산, 담양 추월산 등을 거푸 올랐다. 천천히 오르면서 끝말잇기 놀이도 하고, 길가 꽃 이름을 함께 지어주기도 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는 덤도 얻었다.
바위 틈 옹달샘에서 물이 샘솟는 모습도 신기하고, 점심으로 싸 간 김밥을 숲속 그늘에 앉아 아빠와 주거니 받거니 나눠먹는 것도 그렇지만, 정상에 올라 발아래 펼쳐진 풍광을 만끽하는 것은 아이에겐 아주 특별한 경험이다. 산마다의 다양한 경관을 기억하며 이따금 앨범 사진 꺼내보듯 새록새록 다시 떠올리는 건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증거다.
산행이 거듭될수록 좀더 힘든 코스의 산을 가자고 아빠를 졸랐다. 가파른 산일수록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씩 천식 탓에 밭은기침을 하며 힘들어하거나 다리가 풀려 휘청거릴 때도 있지만, 산에 오르는 게 그저 좋단다. 결국 몇 번의 연습만으로 작년 여름 지리산 종주에 도전했고, 사흘 중 이틀 동안 비가 내린 와중에도 무사히 완주했다.
여태껏 수년간 다녀온 병원보다도, 그 긴 기간 동안 먹어온 약보다도, 산에 오른 1년이 아토피에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목과 팔, 다리 등의 접히는 부분에 남아있던 짓무름 자국이 거의 사라졌고, 지금은 좀체 긁지 않는다. 예전의 물컹거렸던 팔과 다리에는 자잘한 근육이 붙어 제법 튼실해지기까지 했다.
의기소침하고 숫기 없는 성격도 많이 좋아졌다. 남들 앞에만 서면 말소리가 기어들어가고 쑥스러워서 뒤로 숨어버렸는데, 이제는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작은 소리로나마 인사를 건넬 정도가 되었다. 이 역시 꾸준한 산행 덕이라고 생각한다.
산에서 만나는 수많은 등산객들로부터 들은 칭찬이 가슴 속에서 자신감으로 살아난 것이다. 어느 산에 가나 '최연소'라는 말이 따라다녔고,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주전부리를 건네며 '장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럴 때일수록 되건네는 인사 소리가 더 커졌고, 깍듯해졌다. 다녀와서는 아무리 피곤해도 산행 중 기쁘고 즐거웠던 소감을 스케치북에 일기처럼, 때론 낙서처럼 남겼다.
사흘간의 지리산 종주를 마치고 난 얼마 뒤, 어디서 들었는지 백두대간이 뭐냐고 물었다. 질문이 그런 뜻은 아니었겠지만 이내 우리 부자는 백두대간 종주를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우선 백두대간의 명산을 꾸준히 오르면서 적응력을 키운 후, 아이가 중학생쯤 되면 두세 구간 정도 쪼개 여름방학을 이용해 종주할 요량이다.
지난 방학 때 설악산과 덕유산 구간을 완주했고, 내달 중 이틀 쉬는 주말을 이용해 속리산과 소백산을 다녀올 예정이다. 물론, 부안 변산, 김제 모악산, 영암 월출산 등 주변의 깨나 알려진 산은 연습 삼아 모두 섭렵했다. 이 정도 페이스라면 초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백두대간 종주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들곤 한다.
불과 1년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산행을 통해 체력과 자신감을 동시에 얻었다. 산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뭐든지 맛있게 잘 먹게 되었고, 얼굴도 환해졌다. 걸핏하면 감기를 앓고, 약을 밥처럼 먹던 때가 아주 먼 옛날이야기처럼 아스라하다.
지금도 주위 사람들은 아토피는 환경병이라며 물 좋고 공기 맑은 시골로 이사를 가야만 나을 수 있다고들 말한다. 여전히 '지푸라기 요법(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뜻에서 나온 말)'으로 조롱하면서도, 밑져야 본전이라며 황당무계한 민간요법을 소개받기도 한다. 다들 과학적인 처방이라 강조하지만 한의원 다르고, 병원 달라 누구의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를 때도 많다.
결국엔 하나다. 이유야 어떻든 짓물러진 피부조차 자기 몸의 일부이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역시 자기의 몸으로 견디고 끝내 이겨내야 한다는 점이다. 자기 몸과는 상극일지도 모르는 외부의 '힘'에 자꾸만 의존하려 해서는 되레 증세를 악화시킬 수도 있다.
우리 부자의 산행은 그저 숲을 만끽하며 좋은 공기를 쐬러 가는 게 아닌 엄연한 '치료'를 위한 행위다. 물론, 숲에서 뿜어 나오는 피톤치드가 좋으리라는 건 조금도 의심치 않지만, 그보다 가파른 산을 오를 때 흘린 땀과 정상에 올라서서 느끼는 성취감과 자신감이 면역력 향상에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믿는다.
아토피와 비염, 그리고 천식까지. 지금도 여전히 힘들지만 완치는 아닐지언정 아이의 단단해진 몸과 의지로 끝내 이겨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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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안쓰러워서였던지 주위의 어르신들은 당신들의 경험이라며 한두 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피부가 깨끗해질 것이라고 했다. 주변에 그런 애들 많다면서. 우리 부부 역시 계절이 몇 번 바뀌고 아이가 스스로 밥을 떠먹을 때쯤이면 괜찮을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바람과는 달리 증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살갗이 짓물러지도록 긁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낮과 밤이 바뀌어버렸다. 아이의 고통은 맞벌이였던 우리 부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부모로서 괴로워하는 아이를 곁에서 지켜봐야하는 것도 그렇지만, 매일 밤을 설친 채 출근해야 하는 일상은 정말 버티기 힘들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기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고통이 커질수록 귀는 얇아졌다. 아토피에 좋다는 음식 안 먹여본 게 없고, 한방, 양방 가리지 않고 용하다는 병원은 다 찾아다녔다. 홍삼 엑기스는 기본, 수세미즙과 그 쓰다는 인진쑥도 마다하지 않았고, 식용 황토와 숯을 먹이기까지 했다. 마시는 물은 물론 씻을 물조차 가려야 한다기에 값비싼 정수기도 구입했고, 매주 숲이 우거진 자연휴양림으로 순례 다니듯 했다.
한 해 두 해 고통스러운 시간은 흘렀지만, 별반 나아진 게 없었다. 단지 아이가 손톱으로 긁는 대신 손바닥으로 때리고, 아빠, 엄마가 챙겨주지 않아도 보습제를 찾아 바르는 등 스스로 노력하게 됐다는 게 변화라면 변화다. 네 살배기가 진물이 흐르는 상처를 보여주며, 자기도 모르게 손이 가도 닿지 않도록 거즈를 덧대어 달라고 말할 땐 정말 코끝이 시큰했다.
패스트푸드와 과자류는 물론, 기름지고 단 음식과 우유 등은 애초부터 금기의 음식이었다. 유치원에서 친구들이 콜라와 함께 튀김닭과 피자를 먹을 때, 엄마가 싸준 떡과 요구르트를 먹게 했다. 집에 와서는 '나쁜 음식 하나도 안 먹었다'며 으스댔지만, 친구들을 부러워하는 표정이 스쳐 무척 가슴 아팠다. 그야말로 아토피에 대한 '관리'는 끝도 없었다.
좋아지리란 기대가 시나브로 사그라졌지만 병원만은 줄기차게 다녔다. 의사의 '좋아졌다'는 그 말 한마디를 듣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아니 '상태가 나빠지지 않았다'는 말만으로도 충분히 위안 받을 수 있을 정도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의사의 솔직한 '고백'과 명쾌한 처방을 듣고, 스스로 아토피에 맞서는 결심이 섰다. 더 이상 기댈 게 없다는 탄식에서 나온 자구책이었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면서 이런 얘기를 건넸다. 고통스러워하는 환자와 그 가족들 앞에서 꺼낼 수 있는 말은 분명 아니었지만, 그랬기에 더 믿음이 갔고, 나 역시도 그럴 것이라고 수긍하고 있었다.
"아토피가 약을 복용한다고 해서 증세가 호전되는 병이 아니라는 것, 아버님도 잘 아시죠? 얘 스스로 이겨낼 수 있도록 면역력을 길러줘야 해요. 말하자면 그 어떤 약보다 꾸준한 운동이 더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죠."
이 말이 아니었어도, 우리 부부는 아토피에 대해 이미 웬만한 의사만큼의 지식과 정보를 알고 있었다. 두루 알다시피 아토피는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의미다. 곧, 치료제가 아직 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 아토피는 대개 비염과 천식을 동반한다. 짓무른 피부가 깨끗해진다고 해도, 코와 기관지가 몸을 괴롭히게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른바 '면역계 질환 3종 세트'다.
그런데도 병원과 약국을 제 집 드나들듯 하는 건 그저 위로받고자 하는 처절한 몸짓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결국 지금껏 의존했던 '친구 따라 강남 가는' 방식을 접고, 좀더 적극적인 대응을 고민했다. 약 같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통해 '치료'하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몸 안으로부터 아토피의 고통을 '극복'해내는 방법이 분명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체력과 인내력이 필요했고, 그 답을 산에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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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틈 옹달샘에서 물이 샘솟는 모습도 신기하고, 점심으로 싸 간 김밥을 숲속 그늘에 앉아 아빠와 주거니 받거니 나눠먹는 것도 그렇지만, 정상에 올라 발아래 펼쳐진 풍광을 만끽하는 것은 아이에겐 아주 특별한 경험이다. 산마다의 다양한 경관을 기억하며 이따금 앨범 사진 꺼내보듯 새록새록 다시 떠올리는 건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증거다.
산행이 거듭될수록 좀더 힘든 코스의 산을 가자고 아빠를 졸랐다. 가파른 산일수록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씩 천식 탓에 밭은기침을 하며 힘들어하거나 다리가 풀려 휘청거릴 때도 있지만, 산에 오르는 게 그저 좋단다. 결국 몇 번의 연습만으로 작년 여름 지리산 종주에 도전했고, 사흘 중 이틀 동안 비가 내린 와중에도 무사히 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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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기소침하고 숫기 없는 성격도 많이 좋아졌다. 남들 앞에만 서면 말소리가 기어들어가고 쑥스러워서 뒤로 숨어버렸는데, 이제는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작은 소리로나마 인사를 건넬 정도가 되었다. 이 역시 꾸준한 산행 덕이라고 생각한다.
산에서 만나는 수많은 등산객들로부터 들은 칭찬이 가슴 속에서 자신감으로 살아난 것이다. 어느 산에 가나 '최연소'라는 말이 따라다녔고,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주전부리를 건네며 '장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럴 때일수록 되건네는 인사 소리가 더 커졌고, 깍듯해졌다. 다녀와서는 아무리 피곤해도 산행 중 기쁘고 즐거웠던 소감을 스케치북에 일기처럼, 때론 낙서처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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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방학 때 설악산과 덕유산 구간을 완주했고, 내달 중 이틀 쉬는 주말을 이용해 속리산과 소백산을 다녀올 예정이다. 물론, 부안 변산, 김제 모악산, 영암 월출산 등 주변의 깨나 알려진 산은 연습 삼아 모두 섭렵했다. 이 정도 페이스라면 초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백두대간 종주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들곤 한다.
불과 1년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산행을 통해 체력과 자신감을 동시에 얻었다. 산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뭐든지 맛있게 잘 먹게 되었고, 얼굴도 환해졌다. 걸핏하면 감기를 앓고, 약을 밥처럼 먹던 때가 아주 먼 옛날이야기처럼 아스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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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엔 하나다. 이유야 어떻든 짓물러진 피부조차 자기 몸의 일부이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역시 자기의 몸으로 견디고 끝내 이겨내야 한다는 점이다. 자기 몸과는 상극일지도 모르는 외부의 '힘'에 자꾸만 의존하려 해서는 되레 증세를 악화시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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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토피와 비염, 그리고 천식까지. 지금도 여전히 힘들지만 완치는 아닐지언정 아이의 단단해진 몸과 의지로 끝내 이겨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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