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마토 축제(la tomatina)’의 도시 부뇰(Bunol)로
- 매년 8월 마지막 주 수요일, 스페인 발렌시아의 작은 도시 ‘부뇰(Bunol)’은 온통 붉은색으로 변한다. ‘토마토 축제(la tomatina)’를 즐기러 온 각국의 사람들이 사정없이 던진 토마토 때문이다. 이 축제는 1944년 토마토 값 폭락에 분노한 농부들이 시의원들에게 분풀이로 토마토를 던진 것에서 유래됐다. 토마토를 던지고 맞는 행위는 사람들에게 쾌감을 안겨주었고 이후 ‘부뇰’의 연중 행사가 됐다. 1944년 농부들이 토마토를 던진 시간은 실제 8월 마지막 주 수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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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마토 축제가 열리는 스페인의 부뇰은 한바탕 붉은 전쟁이 벌어진다. / photo AP
- 64회를 맞는 올해 ‘토마토 축제’에는 4만여명이 참가해 신나는 토마토 싸움을 벌였다. 현지 언론은 “일본, 호주,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스페인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이 대거 참여했다”며 “전투에선 잘 익은 토마토만 선별해 사용했다”고 전했다. 이번 축제에는 약 100톤의 토마토가 사용됐다고 한다. 스페인의 ‘붉은 정열’을 느낄 수 있는 ‘토마토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지난 8월 26일 스페인 ‘부뇰(Bunol)’에 다녀왔다.
하루 전부터 기차역엔 노숙 관광객 북적
마드리드에 있었던 나는 축제 전날인 8월 25일 저녁 발렌시아로 향했다. 마드리드에서 발렌시아까지 가는 첫 기차는 아침 7시에 출발한다. 하지만 이 기차를 탈 경우 오전 11시에 시작하는 축제시간을 맞추기 힘들어 하루 전날 미리 출발했다. 발렌시아 기차역에 도착하니 밤 11시40분. 이미 부뇰로 가는 마지막 기차는 끊긴 상태여서 첫 차가 뜨는 새벽 6시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소위 ‘노숙’을 하기 위해 역 근처를 서성이고 있는데 어디선가 한국인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반가워 다가갔더니 영국에서 6개월째 어학연수를 하고 있는 백성준(25)씨와 그의 여자친구 심정은(27)씨다. 그들 역시 ‘토마토 축제’를 즐기기 위해 스페인으로 휴가를 왔다고 한다. 백씨는 “계획에 없던 휴가로 평상시보다 2배 이상 비싼 비행기를 타고 왔지만 기대된다”며 “재미있는 것은 어학원에 다니는 스페인 친구들은 ‘토마토 축제’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도 그의 말에 동감했다. 마드리드에 있는 호스텔에서 스페인 사람들에게 ‘토마토 축제’에 간다고 하니 그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토마토를 던지고 맞는 것이 왜 재미있는지 모르겠다.” “토마토 축제? 그게 뭐야?” ‘토마토 축제’가 스페인 사람보다는 외국인에게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축제라는 느낌을 받았다.
밤 12시 반을 넘어서자 기차역으로 한국인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대부분 5명 이상의 남녀 단체 여행객들이었다. 20명 정도의 한국인들이 발렌시아 역 앞에서 ‘노숙’을 했다. 침낭을 가져와 ‘노숙’하는 외국인들도 간혹 보였다. 새벽 5시가 되자 발렌시아 기차역은 야간기차를 타고 온 손님들로 붐볐다. 그들 중엔 흰색 티셔츠와 반바지, 그리고 운동화를 맞춰 입은 외국인 학생들도 있었고 흰 우비를 입은 사람들도 보였다. 기모노를 입은 일본인, 빈 수박통을 뒤집어쓴 미국인 등도 보였다. 기차역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선 전쟁터에 나가는 ‘전사’들처럼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죽다 살아났다’ ‘축제 후 일주일간 토마토 냄새만 맡아도 구토가 난다’…. 드디어 악명 높은 ‘토마토 축제’를 향해 기차가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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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마토를 실은 첫 트럭의 등장.
- 물안경·헌 옷 필수! 아침부터 술판 벌이기도
발렌시아 기차역에서 출발한 지 약 40분 만에 부뇰역에 도착했다. 사람들을 따라 축제가 열리는 중앙광장으로 향했다. 거리 곳곳에는 티셔츠와 물안경, 수중 카메라를 파는 사람들이 보였다. 물안경과 헌 옷은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준비물이다. 토마토 파편이 눈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물안경이나 스키용 고글을 착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토마토가 옷에 물들면 잘 지워지지 않기 때문에 마음껏 놀고 버릴 수 있는 헌 옷도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토마토물이 잘 드는 흰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유독 많았다. 죄수 복장을 한 사람부터 여자 분장을 한 게이(남자 동성애자)들까지 다양한 ‘패션’의 관광객들이 축제 분위기를 흥겹게 만들었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누구든지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해줬다. 중앙광장 근처에는 맥주와 샹그리아(와인에 과일류를 첨가한 스페인의 전통적인 가정음료)를 판매하는 곳이 많아 아침부터 ‘술판’이 벌어진 모습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과도한 음주로 취한 사람들도 간혹 있었다.
오전 10시. 자리를 잡기 위해 천막으로 둘러싸인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축제가 열리기 며칠 전 부뇰의 주민들은 마을의 건물과 창문을 비닐과 천으로 감싸는 작업을 한다. 토마토 전쟁이 벌어지면 마을은 사람이고 건물이고 온통 토마토 범벅이 되기 때문이다. 골목의 중간쯤에 들어왔을 땐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할 만큼 사람들로 가득 찼다. 건물 옥상의 주민들은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차가운 물을 뿌렸다. 하지만 물을 찔끔찔끔 뿌리며 사람들을 애타게 만들었다.
토마토 실은 대형 트럭 등장하자 올레! 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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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물 위에서 토마토 축제를 지켜보는 부뇰 마을의 주민들.
- 뜨거운 열기는 곧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골목 안에서 대치한 남자들은 서로의 윗옷을 찢기 시작했다. 마치 종이를 찢듯이 너무 쉽게 옷을 반으로 찢었다. 특히 지나가는 아시아 남자들의 윗옷은 거의 서양 남자들이 다가와 찢었다. 서로 기분 나쁘지 않게 웃으며 장난치듯이 옷을 찢었고 환호성도 여기저기서 들렸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일본 아저씨는 덩치 큰 서양 남자들에 의해 윗옷이 찢어지자 스스로 옷을 찢으며 골목 안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기도 했다. 곧 찢어진 옷을 서로 던지기 시작했다. 물에 적셔진 옷은 맞으면 제법 아팠다. 나중엔 골목 안에서 패가 갈려 옷을 던지기 시작했는데 분위기가 살벌해지기도 했다. ‘걸레가 된 옷’을 토마토 삼아 한참 던지고 놀고 있는데 축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바로 그때 토마토를 가득 실은 트럭이 보이기 시작했다.
발 디딜 틈 없는 좁은 골목으로 대형트럭이 들어오면서 열기는 극에 달했다. 사람들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공식 주제곡인 ‘올레 올레 올레(Ole Ole Ole)’를 부르며 축제 분위기에 흠뻑 취했다. 트럭 위에서 토마토를 던지는 사람도 밑에서 맞는 사람도 뭐가 그리 좋은지 웃음소리와 통쾌한 비명소리가 난무했다. 나도 어느새 그들과 ‘붉은 전사’가 되어 ‘토마토 전쟁’에 빠져있었다.
이 축제에선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다. 단단한 토마토에 맞으면 아플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토마토를 찌그러뜨린 다음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머리 위로는 수없이 많은 토마토가 날아다녔고 아래로는 케첩처럼 뭉개진 토마토 잔해가 발목까지 차올랐다. 간혹 장난이 심한 외국인들은 동양 여자들의 옷을 찢거나 토마토를 옷 속 깊숙이 집어넣는 일들을 서슴지 않았다. 처음 옷 속으로 토마토가 들어왔을 땐 너무 당황했지만 나도 ‘복수’를 해주며 축제를 즐겼다.
한 시간 만에 축제 끝! 인파 몰려나오며 또 한번 전쟁
토마토 사투가 한 시간쯤 흐르자 ‘토마토 전쟁’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하지만 즐거움도 잠시. 골목에서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좁은 골목에 수많은 인파가 한꺼번에 몰려 자칫 미끄러지면 밟혀죽을 것 같았다. 현장에서 나는 정말 이렇게 외쳤다. “Help me(살려주세요).” 골목 안을 빠져나왔을 땐 ‘압사의 흔적’이 남았다. 신고 있던 신발 한 쪽을 잃어버렸고 온몸은 망신창이가 되었다. 절대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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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마토를 던지는 사람과 맞는 사람 모두 하나가 되어 축제를 즐긴다.
- 축제가 끝나면 소방차가 와서 청소를 하는데 토마토에는 정화기능을 가진 산 성분이 있어 축제 후에는 도시가 깨끗해진다고 한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청소원과 주민들이 힘을 합해 30여분 만에 토마토에 물든 마을을 원래의 깨끗한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다고 한다. 기차역으로 가는 길 곳곳엔 주민들이 고무호스를 이용해 여행객들의 몸을 씻겨주는 장면이 눈에 띄었다. 주민들의 열정적인 참여가 돋보였다. 실제 이 축제는 계획부터 진행, 그리고 마무리까지 시민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특징이다. 덕분에 참가자들은 실컷 즐기는 데만 몰두하면 된다.
토마토 잔해가 남아있는 찝찝한 몸을 움직여 기차역으로 갔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역무원이 꼼꼼히 체크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옷차림! 윗옷을 걸치지 않은 사람은 역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윗옷을 버린 남자들은 급하게 옷을 구하러 다녔고 그중엔 여자 민소매티를 입고 통과하는 젊은 남자들도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토마토 냄새가 기차 안에 진동했지만 그것마저 즐거웠던 ‘토마토 축제’였다.
바르셀로나의 ‘모누멘탈(Monumental)’ 투우경기장
시민단체들 경기장 앞에서 ‘투우 반대’ 시위
경기장 안은 만석… 환호·야유로 열기 가득
프랑스 파리의 중심, 에펠탑이 가장 잘 보이는 트로카데로(Trocadero) 광장에서 지난 6월 18일 국제 동물애호단체 ‘동물을 인도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PETA·People for the Ethical Treatment of Animals)’ 회원들이 투우 반대를 외치며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이날 ‘PETA’ 회원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진 소를 연상케 하는 퍼포먼스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런 일은 비단 어제오늘의 ‘이슈’가 아니다. 파리뿐 아니라 멕시코·워싱턴 등에서도 ‘투우 반대’ 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숱한 황소가 오락거리로 죽어가는 현실이 인도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페인에서는 투우경기로 매년 황소 1만2000여마리가 죽는다. 6개의 화려한 화살이 등에 꽂힌 채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황소의 모습은 꽤 잔인하다. 하지만 이런 반대 운동에도 불구하고 ‘투우’는 여전히 스페인을 상징하는 대표 상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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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부터)바르셀로나 ‘모누멘탈’투우경기장 앞에서 ‘투우 반대’팻말을 들고 서있는 시위자. / 투우 경기 중 숨진 투우사를 기념한 동상.
- 투우경기를 보기 위해 바르셀로나에 있는 ‘모누멘탈(Monumental)’ 투우경기장을 찾았다. 투우경기장의 맞은편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시민단체가 ‘투우 반대’ 운동을 하고 있었다. 흰 옷에 빨간색 페인트를 칠한 그는 ‘투우는 그만, 피는 싫어요(STOP, BULLFIGHT NO MORE BLOOD)’ 팻말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를 본 한 운전자는 “여기는 에스파냐다!(Aqui es Espa촀a)”라며 시위에 거부감을 나타냈고 또 다른 운전자는 박수를 치고 지나가기도 했다. 투우장 매표소에 줄 서 있으면서 시민단체 쪽을 다시 보았을 때 그들 중 한 명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치며 ‘생각 좀 하고 살라’는 뜻의 몸짓을 나에게 보였다.
시민단체의 투우 반대 운동에도 불구하고 투우장에는 수많은 관광객과 현지인들이 들끓었다. 소를 죽이는 행위에 정당성이 없음을 주장하는 이들의 외침은 미약해 보였다. 저녁 6시에 시작된 투우 경기는 총 6번에 걸쳐 진행됐다. 투우사가 소를 완전히 압도하는 눈빛과 몸짓을 선보이며 목숨을 끊는 광경은 탄성을 자아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투우사들이 주저하거나 창이 제대로 꽂히지 않을 경우 거침없는 야유가 쏟아졌다. 반복되는 경기는 아무 영문도 모를 소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한없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표정을 찡그리자 옆에 있던 60대로 보이는 할아버지는 “도살장에서 죽는 것보단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투우사 역시 소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운명에 처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실제로 스페인의 유명한 투우장 앞에는 현장에서 숨진 투우 영웅을 기리는 기념비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스페인에서 만난 세비야 대학생 후안(24)씨는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건 플라멩코와 투우”라며 “반대운동이 일어나도 관광 상품으로 이미 알려져 있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투우 자체를 없앨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투우나 투우사의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투우사가 몇 년 전만 해도 대대손손 물려받는 유망한 직업이었지만 요즘에는 선망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 유럽은 해외여행을 꿈꾸는 이들에게 최고 선망의 지역이다. 최근 46일간 홀로 유럽 6개국을 다녀온 한성대 멀티미디어공학과 김혜련씨의 여행기를 몇 차례에 걸쳐 싣는다.
/ 부뇰(스페인) = 글·사진 김혜련 hry110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