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문관검열, 예조정랑 전극항(全克恒)

2009. 10. 15. 07:20 인물열전

 

예문관검열, 예조정랑

전극항(全克恒

  

[문과]

 인조(仁祖) 2년 (1624) 갑자(甲子) 정시1(庭試) 병과(丙科) 2위 

 

[인적사항]      

    자   덕구(德久), 덕고(德古)

    호   규천(虯川)

    생년   신묘(辛卯)1591

    합격연령   34

    본관   옥천(沃川)

 

[이력사항] 

   전력 : 진사(進士)

   관직 : 예조정랑(禮曹正郞)

   관직 : 한림(翰林)

   타과 : 광해군(光海君) 4년(1612) 임자(壬子) 진사시(進士試)

 

[가족사항] 

   [부]      전  식(全  湜)

   [조부]    전여림(全汝霖)

   [증조부]  전  혼(全  焜)

   [외조부]  홍천서(洪天敍)

   [처부]    조기원(趙基遠)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1590(선조 23)∼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덕고(德古)·덕구(德久), 호는 규천(虯川). 대사헌 식(湜)의 아들이다. 정경세(鄭經世)와 이준(李峻)을 사사(師事)하였다.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대교(待敎)를 거쳐 예문관검열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예조정랑으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호종하던 중 인조의 명에 따라 다시 한양으로 되돌아가 성을 지키다 전사하였다.

특히, 시에 뛰어났고, 박람강기(博覽强記)하여 선진들로부터 경이와 찬탄을 받았다. 도승지에 추증되고,


1778년(정조 2)

정려되었다.

 

[참고문헌] 

仁祖實錄

正祖實錄

愚伏集 

 

[관련 전거 정보]

 

國朝人物志  潭全州人郡守鏗子都承旨世璋孫乙卯進士癸亥文科判敦寧府事入耆社享年九十七同上全克愃一作恒字德久號虯川沃川人知事湜子壬子進士甲子文科檢閱丙子亂不知所終同上


 

▶대교(待敎)

  

 조선시대 예문관(藝文館)의 정팔품(正八品) 관직으로 정원은 2원이다. 

 1401년(태종 1)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을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나눌 때 수찬관(修撰官)을 대교(待敎)로 고쳤다. 통칭 한림(翰林)이라 불렀고, 사신(史臣)이라고도 했다.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는 정원이 1원이며, 정구품(正九品)에서 정칠품(正七品)의 문관 중에서 선임하였다. 1776년(정조 1)에 규장각을 창설하면서 처음으로 두었다.

 [별칭] 

 한림(翰林), 사신(史臣)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조선시대 예문관(藝文館)에 소속된 정구품(正九品) 관직이다. 위로 영사(領事: 正一品)가 1원으로 영의정(領議政)이 예겸하며, 대제학(大提學: 正二品), 제학(提學: 從二品), 직제학(直提學: 正三品), 응교(應敎: 正四品) 각 1원, 봉교(奉敎: 正七品), 대교(待敎: 正八品) 각 2원, 검열(檢閱: 正九品) 4원이 있다. 

 1392년(태조 1) 건국 당시에는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의 직관(直館: 正九品)으로 설치하였다가 1401년(태종 1) 예문춘추관을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분리 개편할 때 검열로 바꾸어 예문관에 정원 4원을 두었다. 승지와 더불어 왕의 측근에서 일하는 근시(近侍)로 지칭되며, 사실(史實)의 기록과 왕명의 대필 등을 맡았으므로 사신(史臣)이라고도 한다. 또 같은 예문관 관직인 봉교(奉敎: 正七品) 2원, 대교(待敎: 正八品) 2원과 함께 8한림(八翰林)이라 하였으며, 상하번(上下番)으로 나누어서 좌·우사(左右史)를 삼았다. 춘추관의 기사관(記事官)을 겸직하였다. 

 [별칭] 

 사신(史臣), 사관(史官), 한림(翰林) 

 

▶예조정랑(禮曹正郞)

 

 조선시대 예조(禮曹)에 둔 정오품(正五品) 관직으로 정원은 3원이다. 위로 예조판서(禮曹判書: 正二品), 예조참판(禮曹參判: 從二品), 예조참의(禮曹參議: 正三品 堂上) 각 1원이 있고, 아래로 예조좌랑(禮曹佐郞: 正六品) 3원이 있다. 

 예조정랑을 지낸 사람은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제수 받을 수 없었다. 정랑의 관장(管掌) 하에 계제사(稽制司), 전향사(典享司), 전객사(典客司) 등의 분장(分掌)이 있었다.

 

▶도승지(都承旨)

 

 조선시대 승정원(承政院)의 육승지 중 수석 승지로서 도령(都令)이라고도 하였다.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정원의 6방(房) 중 이방(吏房)의 사무를 관장하였다. 육승지는 모두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을 겸임하였으며, 특히 도승지는 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의 직제학(直提學)과 상서원(尙瑞院)의 정(正)을 겸임하도록 되어 있었다. 도승지를 한번 지내면 하위직(下位職)으로 내려갈 수 없었다. 

 1392년(태조 1) 개국과 함께 중추원(中樞院)에 도승지를 두었다가, 1400년(정종 2)에 중추원의 승지(承旨)가 독립하여 승정원이 되었다. 1401년(태종 1)에 지신사(知申事)로 고쳤다가, 세종 때부터 승정원에 도승지(都承旨)와 그 밑에 좌승지(左承旨)·우승지(右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우부승지(右副承旨)·동부승지(同副承旨) 등 모두 육승지를 두었다. 모두 정삼품 당상관으로 정원은 각 1원이었다.

 왕이 내리는 교서(敎書)나 신하들이 왕에게 올리는 글 등 모든 문서가 승정원을 거치게 되어 있어, 도승지는 왕의 비서장 격으로서 그 임무가 매우 중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