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효자 첨지중추부사 전오륜(全五倫)

2009. 10. 27. 11:56 인물열전

 

조선시대 효자 첨지중추부사 

전오륜(全五倫)


시대  조선 후기

본관  용궁(龍宮)

호     어주(漁洲)

 

1631(인조 9)-1720(숙종 46),

용궁면 가야리 출신,

자는 천숙(天叔), 호는 어주(漁洲), 본관은 용궁,

원발(元發)의 11세손,

이성(以性)의 손자,

통사랑(通仕郞) 상구(尙耉)의 아들,

오상(五常)의 동생, 오복(五福)ㆍ

오위(五緯)의 형, 갈

암 이현일(葛菴 李玄逸)과 남악 김복일(南嶽 金復一)의 제자이다.


성격이 관후(寬厚)하고 예의가 있어 유명하고, 편모 슬하(慈侍下)에서 유학(幼學)으로서


1660년(현종 1)

증광 진사시에 3등 78위로 합격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를 봉양함에 힘을 다하고 뜻을 순하게 하여 어머니의 나이가 100세에 이르고 자신의 나이 70여세이나 조석에 맛있는 음식을 손수 간검하였으며, 어머니가 죽자 추우나 더우나 매일 성묘를 하여 80여세가 넘어서도 한결같았다.


정성을 다하여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시느라고 과거(科擧)를 포기하였고,

 

1670년(현종 11)

어머니가 100세일 때 도적을 만나 70세로서 어머니를 업고 피난하니 도둑들도 감동하여 "참된 효자이니, 이 집 물건은 조금도 다치지 말라."라고 했다.


또한 1714년(숙종 40)

에 암행어사 이병상(暗行御史李秉常)이 이 얘기를 듣고, 조정에 천거하기를,

"전오륜은 그 어머니를 봉양함에 성심을 다하고 마음을 순하게 가지고, 모시는 정성이 지극하였으므로 그 어머니의 향년이 100세에 이르고, 전오륜의 나이는 70여 세가 되도록 조석으로 맛있는 음식을 스스로 친히 검사하여 올리고, 항상 불편함이 없도록 보살펴 드렸고,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서는 매일 성묘(省墓)를 하며 춥고 더움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나이 84세인데도 시종여일(始終如一) 늙음에 이르러서도 성효(誠孝)함에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가히 나라에서 포상(褒賞)함이 합당한 지라. 청컨대, 전오륜이 죽기 전에 특별히 한 관직을 제수하옵소서."라고 하니, 왕이 갸륵하게 여겨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除授)하였다.

또, 효행을 아름답게 여긴 현감 이지석(李志奭)은 주나라의 효자 노래자(老萊子)의 이름을 따서 내무당(萊舞堂)이라는 세 글자를 현판에 써서 그의 집에 붙이고 시와 서기(序記)를 지었다.

 

1730년(영조 6)

효행으로 대사헌에 증직되었다


 용궁향교(龍宮鄕校)의 <세심루기(洗心樓記)>를 지었고, 성리학을 열심히 공부하여 매우 깊이 들어가 문집인 <어주집(漁洲集)>, <내외교수편(內外交修篇)>,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 <사무사설(思無邪說)>,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등을 저술하였다.


 그가 남긴 시 한 수를 소개하면,

 "글도 말도 넓고 넓어 스스로 약속하지 못하니,

앞날의 어찌됨을 짐작도 힘들 수밖에,

늘그막에 낯익은 도덕의 큰물 이에 나서니,

웃는 슬기로 살 인생이 저절로 트이네."

라고 하였다.


 또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김세흠(金世欽)의 시폐소(時弊疏)를 대신 초안한 바 있었는데, 그 일부를 소개하면,


 "국방 요세지대인 남한산성(南漢山城)에는 군량을 저축해 둠으로써 불시의 필요시에도 완전 대비되어 국가 변란에 끄떡 않게 하고자 함이 가장 중요하다.

뿐만이 아니건마는 신(臣)이 몰래 듣기로는 남한산성(南漢山城)의 대장(大將)이 임의로 산성미(山城米)를 양반 집에 빌려주고 즉시 그 해로 반납하지 않고 버려둬서 여러 해를 묵히는 가운데 빈껍데기 장부만 남았다 하니 혹시라도 나라 변이 닥칠 때 어찌 응급되리까?

나라의 작은 걱정이 아니련마는 조정 대관(大官)들도 염려로 삼지 않음을 보고, 신(臣)은 속으로 걱정되오니 원컨대 전하께서 따로 사람을 골라 뒀다가 불시에 출동시켜 문서와 현물을 따져서 내주었던 놈이나, 받아 내어간 놈이나 중죄(重罪)로 다스리고 조금도 빈틈을 주지 않는다면 군량이 충족해지는 동시에 불의의 변란에도 응변될 수 있으오리다.

그리고 군인이 시골에서 와 번(番) 서는 자들은 궁성(宮城)을 지킴에 가장 책임이 무겁건만,

신이 듣는 바로는 근래 번(番) 나올 사람이 나오지 않고, 품꾼을 사서 대신 서 있게 하고는 임의로 돌아가 버리면 이른 바 품삯군인 장돌뱅이거나 아니면 양반 집 아랫것들이므로 품값을 바라고 나와 섰을 뿐 국방의 책임이 목숨보다 무거운 줄은 깜깜히 모르는 채 적군(敵軍)이 쳐들어 왔을 때

그 품꾼들은 그저 버리고 달아날 뿐일 터인데, 어떻게 궁(宮)과 성(城)이 지켜지며 창피도 면해질지 국가의 근심이 크나크오니

 전하께서는 병권(兵權) 당국을 감독하게 하여 품꾼 군대의 예를 금하고 금령(禁令)을 범하는 자의 벌을 끔찍하게 내리신다면 군정(軍政)도 소홀을 면하오리다."라고 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국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유사시를 대비하여 군량미(軍糧米)의 부정 유출을 막고 언제 침공을 받을지 모르는 산성의 경계를 일반 서민에서 군인으로 대치하고 병권(兵權) 당국을 철저히 감독하게 하였다.


 [承政院日記] : 1675년(숙종 1) 6월 15일 왕의 비망기(備忘記)에, "진사 전오륜에게 2분(分)을 하사하라."고 하였다. 첨지(僉知, 除授 1715.9.1)를 지냈다.(承政院日記)

 

[참고문헌]

嶺南人物考 

龍宮縣邑誌 1780,

朝鮮환輿勝覽 1929,

竺山勝覽 1934,

醴泉郡誌 1939,

族譜,

司馬榜目

 

▶澗松堂文集(문고 보관)

漁洲先生文集 

(古上 810.819 전65둁)

全五倫 (1631∼1720) ; 字 天, 號 漁洲, 本貫 龍宮.

木活字本. -

[發行地不明 : 發行處不明], 建陽1(1896).

5卷2冊 ; 31.2x22cm.

四周雙邊. 半匡 ; 24.1x17.5cm.有界.

10行20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 黃磻老


目錄


卷之 1.

詩(217首) ; 五言絶句(40首), 五言四韻(12首), 五言古詩(2首),

七言絶句(88首), 附原韻(22首), 七言四韻(63首).


卷之 2.

詩(52首) ;

七言四韻(49首), 七言古詩(3首).

疏 ;

三江書院請額, 代金持平(世欽)陳時弊.

書 ;

 答丁愚潭(時翰), 與金參判, 答蔡錫子(荊龜), 寄近思兒(4).

序 ;

一鄕?重修, 鄕中白首會, 金護軍(龍伯)回榜婚宴.

記 ;

浮翠樓重修, 鄕校門樓小, 洗心樓, 石湖寓居山水圖, 負暄堂, 漁洲陋窩, 霽寒亭, 永慕樓, 湍暎軒, 孝子安東權公(光潤)旌閭.


卷之 3.

傳 ;

孝感傳. 

祭文 ;

祭李孤山, 祭李進士子實, 祭李進士純若, 祭金大而,

祭從叔(2), 祭再從兄(玉章), 祭舍弟參奉嚮諸(2), 祭舍弟攸?,

南山祈雨, 龍潭祈雨.雜著 ;

 說

(孝友昶睦信說, 出繼人本宗無後題主行祭權宜攝行說, 爲所當爲不爲不當爲說, 廉商說, 貨商說),

內外本末交修篇

(操心, 修己, 居家, 睦族, 處鄕, 行世),

自警省篇

(心志, 應接, 行止, 言語, 好惡, 論辨, 財利, 酒色, 敎誨, 以不必二字戒兒輩, 以八思字戒兒輩).


卷之 4.

萊舞堂錄. 


卷之 5.

附錄 ; 行狀, 輓詞(20), ?辭.


跋 ; 全洪九.



《내외본말교수편(內外本末交修編)》

6조를 지었으며 9조의 계(戒)가 있다. 스승으로는 홍여하(洪汝河), 이현일(李玄逸), 정시한(丁時翰) 등이었고 도의교로서 이유장(李惟樟), 이동표(李東標), 채형구(蔡荊龜), 내형 김태기(金泰基), 김이기(金履基), 김세흠(金世欽) 등이 있다.

이 문집은 후손 홍구(洪九)·병철(炳哲)·상욱(相旭) 등이 1896년 황번로(黃磻老)의 교감과 서문을 받고 난 뒤 비용을 모아 1896년 간행하였다.

시(詩)

는 제재(題材)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율격이 다양하다.

疏의 「삼강서원청액소(三江書院請額疏)」

는 정몽주(鄭夢周)와 이황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삼강서원을 짓고 그곳에 사액을 내려줄 것을 청한 글로 정몽주와 이황의 학덕이 국가와 민족에게 끼친 영향을 상세히 기술하고 현인을 존중하는 풍토가 충효의 길임을 강조하고 있다.

「내외본말교수편(內外本末交修篇)」

에서는 군자의 도에는 반드시 내외와 본말이 있어야 한다고 수신제가를 위해서는 자제들이 실행해야 할 덕목으로 조심(操心), 수기(修己), 거가(居家), 목족(睦族), 처향(處鄕), 행세(行世) 등을 설명하고 있다.

「자경편(自警篇)」

은 수신의 글로서 심지(心志), 응접(應接), 행지(行止), 언어(言語), 호오(好惡), 논변(論辨) 등의 생활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이밖에도 관원의 공정한 선발, 군기(軍紀)의 엄정, 도량형(度量衡)의 올바른 시행 등을 주장한

「대김지평(세흠)진시폐소(代金持平(世欽)陳時弊疏)」 등이 있다. 이 문집은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철저히 무장한 향촌지식인의 구도적 자세와 실천적 의지가 돋보이는 문집이다.

 당대에 효행으로 널리 이름을 났었거니와 그는 성(誠)과 경(敬) 사상을 몸소 체인하고 생활 속에서 이를 굴절 없이 적용한 선비로서 후세에 기억될 만하다.

또한 퇴계학이 관념적 담론에서 그치지 않고 이처럼 삶의 현장에서 통일적으로 실천되었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조선시대 중추부(中樞府)에 둔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으로 정원은 8원이다. 위로 영사(領事: 正一品) 1원, 판사(判事: 從一品) 2원, 지사(知事: 正二品) 6원, 동지사(同知事: 從二品) 8원이 있고, 아래로 경력(經歷: 從四品) 1원, 도사(都事: 從五品) 3원이 있다.

 [별칭]

 첨지사(僉知事), 첨지(僉知)


용궁전씨(龍宮全氏) 

본관명  용궁(龍宮)

성씨명   전씨(全氏)

본관소재지  경상북도(慶尙北道) 예천군(醴泉郡)

시조  전방숙(全邦淑)

  

본관 연혁 

 용궁(龍宮)은 경상북도 예천군(醴泉郡)에 속한 지명으로 신라시대에 축산현(竺山縣)·원산현(園山縣)이라 하였는데,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예천군의 영현이 되었다. 995년(고려 성종 14)에 용주(龍州)로 승격되었다가, 목종 때 군으로 강등되었다. 1018년(현종 9)에 용궁으로 고쳐서 상주(尙州)에 편입하였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두면서 독립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현으로 고쳤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안동부 용궁군이 되었고, 1896년 경상북도 용궁군으로 승격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폐지되어 신하면(申下面)은 의성군(義城郡)에, 나머지는 용궁면 등으로 분할되어 예천군에 편입되었다.

성씨의 역사 

 도시조(都始祖) 전섭(全聶)은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로 BC 18년 온조(溫祚)가 백제를 개국할 때 오간(烏干), 마려(馬藜),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간(屹干), 곽충(郭忠), 한세기(韓世奇) 등 9사람과 함께 공을 세워 십제공신(十濟功臣)으로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다.

전씨(全氏)는 도시조인 전섭으로부터 18본이 분적되었으며, 우리나라 전씨는 단본이라 할 수 있다.

용궁전씨(龍宮全氏)의 시조 전방숙(全邦淑)은 도시조인 전섭(全聶)의 28세손이다. 《전씨대동보(全氏大同譜)》에 의하면 고려 충렬왕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올랐으며,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용궁의 옛 지명)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용궁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분적종 및 분파 

 용궁전씨는 정선전씨(旌善全氏)에서 분적한 성씨이다.

주요 세거지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월평리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송평리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만화리

경상북도 울진군 온정면 금천리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문량리

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 효동리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삼귀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용궁전씨는 8,693가구 총 27,706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尹昌鉉, 보명사, 1929)

《한국지명연혁고(韓國地名沿革考)》(權相老, 동국문화사, 1961)

《韓國人의 姓譜》(삼안문화사, 1986)

《姓氏의 고향》(중앙일보사, 2002)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傳統族譜文化社(http://www.genealog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