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병마절도사, 총융사, 포도대장 전동흘(全東屹)

2009. 10. 29. 20:35 인물열전

 

남도병마절도사, 총융사, 포도대장

전동흘(全東屹)

 

시대  조선 후기

본관  천안(天安)

자    사탁(士卓)

호    가재(佳齋)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무신.


1651년(효종 2)

무과에 급제하고, 용맹을 인정받아 북벌을 기도하던 효종에 의하여 발탁되었다. 이상진(李尙眞)· 소두산(蘇斗山)과 함께 3걸로 불렸다. 내외의 무관직을 역임한 뒤 수령이 되어 여러 군현을 다스렸다.


1662년(현종 3)

고부군의 환곡허록사건(還穀虛錄事件)과 관련하여 일시 처벌받았고, 1672년경에는 정초중군(精抄中軍)이 되기도 하였다.


1673년 

함경도남병사에 임명되어 이후 4년간 봉직하였다.

이때 함경도 군향(軍餉) 환곡(還穀)의 부족분 7,706석의 탕감을 관철시켜 백성들의 칭송을 들었다.


그 뒤 총융사를 거쳐 포도대장에 이르렀다.


일찍이 철산부사가 되어 억울하게 죽은 장화(薔花)·홍련(紅蓮)의 원한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朝鮮名臣錄 


▷남병사 [南兵使] 


조선시대 무관의 종2품 관직.

원명은 남도병마절도사(南道兵馬節度使)로 함경도의 북청(北靑) 남병영(南兵營)에 주재하였다.

그 밑에 우후(虞侯) ·방어사(防禦使) ·첨절제사(僉節制使)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만호(萬戶) ·절제도위(節制都尉) 등을 두었으며, 고종 말기까지 존속하였다. 


▷총융사(摠戎使)

 

조선시대 총융청(摠戎廳)의 으뜸 벼슬로 종이품(從二品) 서반 무관(武官)으로 정원은 1원이다. 

 총융청의 관원으로는 총융사(摠戎使: 從二品) 1원, 중군(中軍: 從二品) 1원, 천총(千摠: 正三品 堂上) 2원, 진영장(鎭營將: 正三品 堂上) 4원, 파총(把摠: 從四品) 2원, 초관(哨官: 從九品) 10원, 교련관(敎鍊官) 15원, 기패관(旗牌官) 2원 등이 있었다.  


▷포도대장(捕盜大將)

 

조선시대 포도청(捕盜廳)의 으뜸 벼슬인 대장(大將)으로 종이품(從二品) 서반 무관직(武官職)으로 정원은 좌포도청(左捕盜廳)과 우포도청(右捕盜廳)에 각 1원씩이다.

 좌포도대장(左捕盜大將)·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이라고 불렀다. 포도대장은 한성부(漢城府)의 좌윤(左尹)·우윤(右尹)을 역임한 자를 후보로 추천하여 임명하였으며, 임금이 왕릉(王陵)으로 거둥할 때 현직 포도대장이 임금을 수행(隨行)할 경우에는 임시로 직책을 대표할 자를, 현직 또는 전직의 장신(將臣) 중 서울에 있는 자 1인을 병조(兵曹)에서 상신, 임금의 재가를 받아 임명하였다.

포도대장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도총관(都摠管)을 겸할 수 없었다. 

 1894년(고종 31) 좌·우포도청이 합하여 경무청이 설치됨에 따라 경무청의 장관 경무사(警務使)로 개칭되었다. 

 [별칭] 

 포장(捕將)

 

▷철산군 [鐵山郡]


평북 서쪽 끝에 있는 군.

면적  약 456 ㎢ 

인구  8만 1,125(1943) 

행정구분  1읍 25리 

면적 약 456 km2. 인구 8만 1,125(1943). 동쪽은 선천군, 북쪽은 의주군, 서쪽은 용천군에 접하고, 남쪽은 황해에 면해 있다.

강남산맥(江南山脈)의 끝 부분이 군내에 뻗어 있어, 이것이 낮고 평평하며 해안에서 침강하여 반도와 많은 도서(島嶼)를 이루었으며, 복잡한 리아스식해안을 이룬다.

군내에는 평지는 드물며 구릉의 기복이 심하다. 주요한 구릉으로는 북쪽에 천두산(天頭山:668 m)을 비롯하여 망일산(望日山:613 m) ·입봉(笠峰:512 m) 등이 솟아 있으며, 하천으로는 동쪽 선천군과의 경계를 대천강(臺川江), 중부를 창포천(滄浦川), 북서부를 교강천(橋江川) 등이 흘러 연안에 약간의 평지를 이루고 있다.

도내에서 가장 긴 해안선을 가지고 있으나, 리아스식 해안과 간석지가 발달하고 넓고 간만의 차가 심하여 양항이 없다.

도서로는 가도(않島)를 비롯하여 탄도(炭島) ·대화도(大和島) 등 30여 개의 섬이 앞바다에 있는데, 그 중에 가도는 제일 큰 섬으로 면적 15.4 km2, 해안선 길이 36 km이다.

해안지방에 위치하여 내륙지방보다는 따뜻한 편이나 겨울에는 대륙성 기후로서 북서풍이 심하게 불어 몹시 춥다. 1월 평균기온 -9.3 ℃, 8월 평균기온 24.8 ℃, 연평균기온은 9.2 ℃이며 연강수량은 944.9 mm이다.

 

▷ 장화홍련전

 

줄거리

      한글본의 경개는 다음과 같다.

      세종조에 평안도 철산에 배무룡이라는 좌수가 있었는데, 그의 부인이 선녀로부터 꽃송이를 받는 태몽을 꾸고 장화를 낳고, 이태 후 홍련을 낳았다. 홍련이 다섯 살 때에 부인이 죽어, 좌수는 후사를 얻기 위하여 허씨에게 재취하였다. 허씨는 용모가 추하고 심성이 사나웠으나 곧 삼형제를 낳았다. 허씨는 소생이 생긴 뒤 전실의 딸들을 학대하기 시작하였다.

       장화가 정혼을 하게 되자, 혼수를 많이 장만하라는 좌수의 말에 재물이 축날 것이 아까워 장화를 죽이기로 흉계를 꾸며, 큰 쥐를 취하여 장화의 이불 속에 넣었다가 꺼내어 좌수에게 보이고 장화가 부정을 저질러 낙태하였다고 속여, 아들 장쇠를 시켜 못에 빠뜨려 죽였다. 그 순간 범이 나와 장쇠의 두 귀와 한 팔, 한 다리를 잘라가 장쇠는 병신이 되었다. 이에 계모는 홍련을 더욱 학대하고 죽이려 하였다. 홍련은 장쇠에게서 장화가 죽은 것을 알았고, 또 꿈에 장화가 현몽하여 원사한 사실을 알고, 장화가 죽은 못을 찾아가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로부터 그 못에는 주야로 곡성이 났으며, 원사한 두 자매가 원정을 호소하려고 부사에게 가면 부사는 놀라서 죽었다. 이런 변고로 부사로 올 사람이 없었는데, 마침 정동우라는 사람이 자원하여 부사로 부임하였다. 도임 초야에 장화 . 홍련이 나타나 원사한 시말과 설원해주기를 간청하였다. 이튿날 부사는 좌수 부부를 문초한바, 장화는 낙태하여 투신자살하였고, 홍련은 행실이 부정하더니 야음을 틈타 가출하고 종무소식이며, 장화의 낙태물이라고 증거물을 제시하는 것을 본바 낙태물인 것 같아서, 좌수 부부를 훈방하였다. 그날 밤 꿈에 두 소저가 나타나 계모가 제시한 낙태물의 배를 갈라 보면 알 것이라 하고 사라졌다.

        이튿날 부사는 다시 그 낙태물을 살피고 배를 갈라 본즉 쥐똥이 나왔다. 이에 부사는 계모를 능지처참하고 장쇠는 교수형에 처하였으며, 좌수는 훈방하였다. 그리고 못에 가서 자매의 시신을 건져 안장하고 비를 세워 혼령을 위로하였더니, 그날 밤 꿈에 두 자매가 다시 나타나 설원해준 일을 사례하며, 앞으로 승직할 것이라 하였다. 그 뒤 그 말대로 부사는 승직하여 통제사에 이르렀다. 한편, 배좌수는 윤씨를 삼취로 맞았는데, 꿈에 두 딸이 나타나 상제가 전세에 못다한 부녀의 연분을 다시 이으라고 하였다는 말을 전하고, 윤씨부인은 꿈에 상제로부터 꽃 두송이를 받은 태몽을 꾸고 쌍동녀를 낳아 꿈을 생각해서 장화와 홍련이라 이름하였다 두 자매가 장성하여 평양의 부호 이연호의 쌍둥이와 혼인하여, 유자생녀하고 복록을 누리며 잘살았다.


 핵심정리

  작가 : 미상

  형식 : 가정 소설

  주제 : 권선징악, 계모의 전처 소생 학대의 비리와 그에 따른 결과를 보여주어 후세인에 대한 권계를 시도.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의의 : 계모형 가정 소설의 표본


 이해와 감상


     필작자 . 연대 미상의 고전소설이다.

효종연간에 전동흘이 평안도 철산부사로 가서, 배좌수의 딸 장화와 홍련이 계모의 흉계로 원통하게 죽은 사건을 처리한 실력담을 소재로 하여 쓴 한문본을 대본으로 하여 썼다.

국한문본 . 한글본으로 이루어진 유파문학으로서 공안류소설인 동시에 가정형 계모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한문본 및 국한문본의 경개는 좌수가 자매의 혼을 위로하는데 까지이다.

한문본은 전동흘의 철산부사 재임 시에 겪은 실력담을, 그의 6대손 만택의 간청에 의하여 박인수가 1818년 섣달 초하룻날에 쓴 것이다. 이 한문본은 전동흘의 8대손 기락 등이 1865년에 편찬한 《가재사실록》과 《가재공실록》에 실려 있고, 국한문본은 《광국장군전동흘실기》에 실려 전한다.

 한글필사본은 신암본과 의산본이 있으며, 한글목판본은 자암본 . 송동본 . 불란서동양어학교본 등과 신활자본으로 세창본 . 영창본을 비롯하여 동계본이 있다.

       이 소설의 작자를 알 수 있는 이본은 한문본밖에 없다. 그리고 창작연대를 추정하는 데도 실담선행설과 한글본선행설이 있다. 전자는 전동흘이라는 실제 인물의 실제 이야기를 기초로 하여 한문본이 숙종 24년 또는 영조 34년에 창작되었고, 이 한문본에 근거하여 한글본이 순조, 철종 이후에 번역 또는 창작되었을 것이다. 그에 비해 후자는 가재사실록의 기록을 볼 때 순조 18년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장화홍련전의 소설 구조를 살펴보면 장화와 홍련이 물에 뛰어드는 것을 분기점으로 하여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전자는 '계모학대형 소설'의 구조를, 후자는 '공안류 소설'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태몽 설화, 적강화소, 청조의 길안내 전설, 원혼의 공청출현설화, 재생환생 설화 등 여러 가지 설화를 포용하고 있다.

이로 보아 이 소설은 어떤 하나의 실담이 소설화하였다고 보기보다는 어떤 이야기가 상당한 시간을 지나면서 많은 다른 이야기와 화소들을 첨가시켜 다듬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즉, 작자에 의한 하나의 창작이라기보다 어떤 이야기의 골격을 중심으로 발전을 거듭한 적층문화적 성격을 지녔다고 봄이 타당하다.

      이 소설에서도 고대소설의 원을 푸는 해법의 방법 속에 한계성을 발견하게 된다. '눈물의 삶, 순종, 인고의 삶'에 입각한다면 당연히 자신의 누명을 사랑을 통해 벗겨야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후반부 클라이막스에서는 철저한 복수의 양상을 보여준다. 물론 권선징악적 결론을 위한 장치랄 수도 있지만 고대소설이 극복하지 못한 부정적 모습의 표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장화홍련전의 뛰어난 점은 인물의 전형성과 인물간의 대립, 갈등 양상이 치밀하다는 점이다. 장화홍련전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가 약간씩 기형적인 성격을 소유하고 있다. 구태의연한 방법인 선인 악인의 대립을 심화시킴에 의해 흥미를 유발시키려 하지만 선인 자체도 약간의 문제성이 있다.

장화홍련은 극심한 어머니 콤플렉스의 소유자, 계모는 열등컴플렉스에 빠져 전처 소생에 대한 학대를 일삼고 자식인 장쇠까지 불행에 빠뜨린다. 배좌수는 우유부단하고 용렬한 인물이라서 갈등을 풀지 못하고 가정을 파탄으로 몰고 간다. 이와같이 장화홍련전에는 개별 인물의 왜곡된 성격 때문에 인물 간에 극도의 대립을 보인다.

이 문제를 풀 사람은 배좌수 밖에 없지만 그의 성격 또한 우유부단하기 때문에 중간적 존재로서의 역할을 못하고 파란으로 몰고 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