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전씨 26세 관찰사(안찰사), 밀직사사 위렬공(威烈公) 전의(全懿)

2009. 11. 5. 07:19 인물열전

  관찰사(안찰사), 밀직사사 위렬공(威烈公)

전 의(全 懿)

 

정선전씨 26세이시다.

부(父)는 경상도순문사 전수룡이고,

자(子)는 전라도도병마사 전공렬이다

 

고려 高宗 甲申에

按察使가 되어 도적을 잡아 공을 세웠다. 그러나 중방의 탄핵을 받아 해도에 유배되었다.

 

乙酉년에 

유배가 해제되고 복권되어 조정에서  密直司使를 除授하였다.

都僉議左政丞 하다. 시호를 威烈이라한다.

 

配에貞敬夫人金氏는 司空中書舍人 侍郞 仲龜의 따님이다


 

유배되게 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최충헌(崔忠獻)이 처음에 상장군(上將軍) 송청(宋淸)의 딸에게 장가들어 최이(崔怡) 최향(崔珦)을 낳고 임씨(任氏)에게서 최성(崔珹)을 낳았으며 왕씨(王氏)에게서 최구(崔球)를 낳았다.

최이(崔怡)의 초명(初名)은 최우(崔瑀)이니 누천(累遷)하여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 

최충헌(崔忠獻)이 죽으니 최이(崔怡)가 그 저축한 바 금은(金銀) 진완(珍玩)을 왕께 바쳤다. 이듬해에 또 최충헌(崔忠獻)이 점탈(占奪)한 공사(公私)의 전민(田民)을 각각 그 주인에게 돌려주고 또 한사(寒士)를 많이 선발하여 인망(人望)을 거두었다.

 그 아우 최향(崔珦)과 향(珦)의 장인 수춘후(壽春侯) 왕항(王沆)과 왕항의 아들 사공(司空) 왕종(王琮)과 승선(承宣) 신선주(申宣冑) 및 최충헌(崔忠獻)의 가신(家臣)인 최사겸(崔思謙) 비(婢) 동화(桐花)․성춘(成春)․사자(獅子) 등을 제도(諸島)에 귀양보냈다.

이어 왕항(王沆) 및 왕종(王琮)을 소환(召還)하고 최향(崔珦)을 홍주(洪州)에 양이(量移)하였다.

 향(珦)은 용감하고 시기하며 포학하여 홍주(洪州)에 귀양간 때로부터 마음이 항상 불쾌(不快)하여 크게 집을 짓고 불의(不義)를 많이 행하여 거민(居民)을 침해하고 요란스럽게 하니 전(全) 경내(境內)가 괴로워하였다.

최이(崔怡) 및 주관(州官)이 이를 금(禁)하여도 듣지 않더니 뒤에 최향(崔珦)이 무뢰배를 모아 난(亂)을 일으키고 그 주(州)의 부사(副使) 유문거(柳文) 판관(判官) 전양재(全兩才) 법조(法曹) 이종(李宗) 등을 불렀다.

전양재(全兩才)는 병으로 가지 못하고 유문거(柳文)와 이종(李宗)이 이르니 최향이 면전(面前)에서 묶어 나무에 달았다가 이어 죽이고 또 그 무리를 거느리고 유량재(兩才)가 있는 곳에 이르니 끌어내어다 이를 베고 객사(客舍)의 문루(門樓)에 올라가 쟁(錚)과 북을 치며 호조(呼)하니 고을 사람이 모두 모여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최향이 글로서 폄소(貶所)에 있는 전 장군(前將軍) 유송절(柳松節)을 남해(南海)에서 김수영(金壽迎)을 예산(禮山)에서 부르고 또 박문재(朴文)를 불러 부근(附近)의 주군(州郡)에 격문을 전하여 군사를 내어 돕게 하고 가동(家)을 시켜 창고를 열고 곡식을 군사에게 주었다. 한 군사가 그 가동(家)을 죽이니 이에 주중(州中)이 흉흉하였다.

국가에서 변을 듣고 병마사(兵馬使) 채송년(蔡松年) 지병마사(知兵馬事) 왕유(王猷), 부사(副使) 김의열(金毅烈)을 보내 10령(領)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토벌(討伐)하게 하였다. 최향(崔珦)이 수십인과 함께 도망하여 북산(北山)에 올라갔다. 주인(州人)이 군사를 이끌고 이를 포위하니 최향(崔珦)이 말하기를,

‘나의 형이 여러 해 동안 부르지 않고 또 주관(州官)에게 보호하여 대우하도록 청하지 않으므로 주관(州官)이 능멸하여 나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분노가 쌓여 일찍이 신사(神祠)에 나아가 세 번이나 배교(杯)를 던져 길복(吉卜)을 얻었으며 이에 좌우(左右)의 말을 듣고 경솔하게 난(亂)을 일으켰으니 비록 뉘우친들 어찌 미치랴.’

라고 하였다. 해가 지니 최향(崔珦)의 종자(從者)들이 모두 도망하여 가니 최향이 갈 바를 알지 못하여 바위 벼랑으로 떨어져 석굴(石窟)에 숨었다. 쫓던 군사가 이르니 스스로 목을 찔러 거짓 죽은 체한 것을 군사가 잡아 가두니 옥중(獄中)에서 죽었다.

 안찰사(按察使) 전의(全懿)가 김수영(金壽迎)과 박문재(朴文)를 잡고 또 이문(移文)하여 송절(松節)을 잡아다가 모두 이를 죽였다.

최이(崔怡)가 듣고 기뻐하여 전의(全懿)로 하여금 여당(餘黨)을 모두 잡게 하였다.

전의(全懿)가 최이(崔怡)의 뜻을 맞추어 예산(禮山), 결성(結城), 여양(麗陽), 대흥(大興) 등 7현(縣)의 감무(監務)가 처음에 최향(崔珦)과 함께 통모(通謀)하였다가 일이 패(敗)하자 스스로 면(免)코자 하여 도리어 격문(檄文)을 전하는 자를 잡았다고 무고(誣告)하여 이에 현리(縣吏) 등을 구금(拘禁)하고 국문하니 모두 무복(誣服)하므로 7현(縣) 감무(監務)가 모두 죽었다.

또 홍주인(洪州人)으로 항상 최향(崔珦)에게 왕래(往來)한 자는 경중(輕重)을 불문(不問)하고 모두 이를 죽였으므로 중방(重房)에서 전의(全懿)가 김수영(金壽迎) 등을 천살(擅殺)한 것을 탄핵하여 해도(海島)에 귀양보냈다.

 

▷밀직사

고려시대 왕명의 출납, 궁중의 숙위(宿衛), 군기(軍機) 등을 관장한 관청

991년(성종 10) 중추원(中樞院)을 설치하여 숙위를 맡아보게 하다가, 1009년(목종 12) 중추원 ·은대(銀臺) ·남북원(南北院)을 폐하고 중대성(中臺省)으로 개편하여, 왕명의 출납 ·군기 등의 임무를 더 맡겼다. 사(使) ·부사(副使) ·직중대(直中臺) 등의 관원을 두었다. 1011년(현종 2) 중대성을 중추원으로, 헌종 때는 추밀원으로 고쳤으며, 1275년(충렬왕 1) 처음으로 밀직사라는 이름으로 고쳤다. 1298년 광정원(光政院)이라 고쳤다가 곧 밀직사로 환원하였다.

1310년(충선왕 2) 밀직사의 관질(官秩)을 높여서 첨의부(僉議府)와 함께 양부(兩府)라 불렀으며, 승지(承旨)를 대언(代言)으로 고쳤다. 1354년(공민왕 3) 판사사 ·지신사 ·대언을 녹관(祿官)으로 하고,1356년 문종 때의 구제도로 복귀하여 추밀원으로 하였다. 1362년 다시 밀직사로 고쳐 종2품의 판사사 ·사사 ·지사사 ·첨서사사 ·동지사사 및 정3품의 좌 ·우 대언, 좌 ·우 부대언을 두었다. 1369년 제학(提學)을 학사(學士)로, 대언을 승선으로 고쳤다가 다시 제학 ·대언으로 환원하였다. 밀직사의 이속(吏屬)은 문종 때 별가(別駕) 10명, 주사(主事) 10명, 시별가(試別駕) 2명, 영사(令史) 2명, 기관(記官) 8명, 통인(通引) 8명을 두었다.


▷안찰사

고려 최고 지방행정구획인 5도의 장관.

고려사(高麗史)》 백관지 외직 안렴사조에는 현종 3년(1012) 절도사(節度使)가 혁파된 후 안찰사가 설치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실제로 안찰사가 처음 기록에 나타난 것은 정종(靖宗) 3년(1037)이었다. 이후 충렬왕 2년(1276)에 안렴사(按廉使)로 개칭되고, 충선왕 즉위 후 제찰사(提察使)로 바뀌었다가 다시 충숙왕 후년에 안렴사로 환원되는 과정을 밟았지만 제도로서는 고려말까지 계속되었다.

학자에 따라서는 5도안찰사제를 부정하고 고려의 도(道)가 행정기구의 기능을 갖게된 것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였다고 해석하기도 하나 명종 18년(1188) 제(制)에서 명시된 안찰사의 직능이나 우왕 4년(1387) 헌사의 상언에 명시된 안렴사의 직을 검토해보면 이들은 각 도의 주현을 순안(巡按)하면서 ①수령의 현부(賢否)를 살펴 출척(黜陟)하는일, ②민생의 질고(疾苦)를 묻는 일, ③형옥의 심치(審治), ④조부(租賦)의 수납, ⑤군사적 기능 등을 맡아보았던 것이 확인된다.

이들은 각 주현(州縣)의 수령을 통할하여 중앙정부와 연결하는 중간기구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상급 행정관이면서도 그 관품이 보통 5품내지 6품으로 낮았고, 전임관이 아니라 행정기구를 갖추지 못했으며, 또한 6개월만에 교대하므로 임기가 짧았었다. 때문에 고려후기에는 이를 시정하려는 움직임이 보였는데, 먼저 우왕 5년(1379)에는 안찰사의 임기가 1년으로 연장되었으며, 창왕 즉위년(1388)에는 안렴사를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승격하고 재추로 임명하였다. 또 공양왕 원년(1389)에는 도관찰출척사에게도 행정기구인 경력사(經歷司)를 설치하였다. 또 다음해에는 양계지역에도 도관찰출척사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전국의 지방통치기구가 일원화되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