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으로 나가지 않고 고향 산천에 남아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학(家學)을 연마하며 사는 삶이 그립다. 궁핍하지 않을 정도의 항산(恒産)이 있으면 더 좋을 것이다. '가학'과 '항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는 모두 고향과 가학을 버리고 밖으로 나가면 대단한 무엇이 있는 줄 알았다.
지리산 자락의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沙圖里)에 있는 해주오씨들의 고택 쌍산재(雙山齋). 쌍산재의 오씨들은 개화가 되고, 산업화가 되었어도 밖에 나가지 않고 가학과 고택을 지키며 살았다.
'밖에 나가서 취직하지 말아라'는 게 자식들에 대한 어른들의 당부였다. 집에서 글공부 하며 농사일 돌보고, 한가하게 주변 산천을 노니는 것이 선비의 삶이라는 가치관을 가져 왔기 때문이다.
쌍산재는 5000평이다. 본채 뒤의 대숲과 돌계단을 지나서 100m쯤 가면 서당(書堂)이 별도로 있다.
같은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아주 격리된 공간이다. 이 집안 사람들은 유년 시절부터 이 서당에 기거하는 조부 밑에서 글공부를 하는 게 관례였다.
한학자이면서도 벼슬은 하지 않았던 이 집안 조부는 1948년의 참혹한 살생이 이루어졌던 여순반란사건과 6·25 그리고 지리산의 빨치산을 겪으면서도 집안을 지킬 수 있었다.
빨치산이든 경찰이든 쫓겨서 이 집에 들어오면 집주인의 카리스마 때문에 추적자가 더 이상 추적을 못하고 되돌아가곤 했다고 한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평소의 적선(積善)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800석 정도의 전답이 있었던 쌍산재에는 일하는 머슴들이 많았다. 평소 수십명분의 밥을 짓는 무쇠솥에서 밥을 풀 때도 순서가 있었다.
제일 먼저 집안 어른인 조부님 밥그릇에 담을 밥을 푼다.
그 다음에는 머슴들 밥그릇을 담았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는 솥안의 밥을 모조리 섞어서 집식구들 밥을 펐다. 밥을 할 때 쌀을 위에 놓고 밑에는 보리를 놓으므로 일찍 풀수록 쌀이 많이 섞인다.
일꾼들 밥그릇에 집 식구들 밥보다 더 쌀밥이 들어가도록 배려한 것이다.
일꾼들 1년 연봉인 '새경'을 줄 때도 후하게 줬다.
관례보다 항상 10%를 더 주었다. 보릿고개에는 이자를 받지 않고 양곡을 이웃들에게 빌려주었다.
'당몰 쌍산재'의 덕망은 난리가 났을 때에 그 빛을 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