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전씨(慶州全氏)

2009. 12. 14. 10:02 인물열전

 

경주전씨(慶州全氏)


[본관이칭]

계림전씨


[상세내용]


본관 연혁

경주(慶州)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기원전 57년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를 형성,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로 하고,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65년(신라 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 시조가 탄생하여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다.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다. 935년(고려 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왕건에 항복하자 경주로 개칭하고 식읍을 주었고, 그를 사심관으로 삼았다. 비로소 처음으로 경주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유수(留守)를 두어 영동도(嶺東道)에 속하게 하였다. 1008년(목종 11) 때 낙랑군(樂浪郡)이라 별칭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 때 계림부(鷄林府)로 개편하였다. 1202년(신종 5) 경주 야별초의 반란으로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219년(고종 6) 동경으로 환원되었다. 1413년(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로 개칭한 이후 1415년 병마절도사영을 두었다가 1417년 울산으로 이전하였다. 1637년(인조 15)에 속현인 자인현이 분리 독립하였다. 1895년(고종 32) 군면 폐합으로 경주군이 되었고, 1955년 경주읍과 내동면 전역, 천북면과 내남면 일부가 통합되어 경주시로 승격했으며, 경주군은 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1989년에는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개칭되었다. 1955년에는 경주군과 통합하여 시로 승격하였다.


성씨의 역사

도시조(都始祖) 전섭(全聶)은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로 BC 18년 온조(溫祚)가 백제를 개국할 때 오간(烏干), 마려(馬藜),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간(屹干), 곽충(郭忠), 한세기(韓世奇) 등 9사람과 함께 공을 세워 십제공신(十濟功臣)으로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다.

전씨(全氏)는 도시조인 전섭으로부터 18본이 분적되었으며, 우리나라 전씨는 단본이라 할 수 있다.

경주전씨(慶州全氏)의 시조

전공식(全公植)은 도시조 전섭(全聶)의 27세손이다.

부(父)는 안찰사 위렬공 전의이다.

고려 고종 때 병마사(兵馬使 정3품)를 지냈고,

1236년(고종 23)에 몽골군이 침입했을 때 형(금오위 대장군 전공열)과 함께 물리쳤다. 

1271년(원종 12) 안렴사(按廉使)가 되어 공을 세워 계림군(鷄林君: 경주의 옛 지명)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정선전씨(旌善全氏)에서 분적해서 그를 시조로 삼고 경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고려시대  병마사

고려 때 동·북 양계(兩界)의 군권을 전담하던 지휘관으로서 품계는 정3품이며, 989년(성종 8년)에 처음 설치하였다. 옥대(玉帶)와 자금(紫襟)을 달며 왕이 친히 부월(斧鉞, 도끼)을 주어 진(鎭)에 부임했다.


▶안렴사(按廉使)

고려 최고 지방행정구획인 5도의 장관.


[분적종 및 분파]

경주전씨는 정선전씨(旌善全氏)에서 분적한 성씨이다.


[경주전씨(慶州全氏)의 인물들]

전광용

[경주전씨(慶州全氏)의 과거 및 취재 합격자]


무과

전극성, 전영, 전응길, 전인남, 전취명, 전태정, 전흥복


문과

전흡


주요 세거지

함경남도 북청군 이곡면 상리

함경남도 북청군 거산면 하입석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경주전씨는 1,892가구 총 6,005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尹昌鉉, 보명사, 1929)

한국지명연혁고(韓國地名沿革考)》(權相老, 동국문화사, 1961)

韓國人의 姓譜》(삼안문화사, 1986)

姓氏의 고향》(중앙일보사, 2002)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傳統族譜文化社(http://www.genealog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