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0. 17:42ㆍ 인물열전
경산전씨(慶山全氏)
[본관이칭]
옥산전씨(玉山全氏)
[상세내용]
◆본관 연혁
경산(慶山)은 경상북도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압량소국(押梁小國) 또는 압독소국(押督小國)으로 불렸다가 102년(신라 파사왕 23)에 점령당하여 군이 설치되었다. 642년(선덕여왕 11) 김유신(金庾信)을 군주로 추대하고 압량주가 설치되었고, 750년(경덕왕 9)에 장산군(獐山郡)으로 개편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 장산현(章山縣)으로 축소되었다가, 1310년(충선왕 2)에 경산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317년(충숙왕 4)에는 국사 일연(一然)의 고향이라 하여 현령으로 승격되었으며, 1390년(공양왕 2)에는 공양왕비의 출신지라 하여 지군사(知郡事)로 승격되었다. 1391년 경산군으로 승격하였다. 1395년(태조 3) 다시 현으로 강등되어 계속 유지되어 왔다. 1601(선조 34)~08(선조 41)년에는 대구부에 잠시 병합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하양(河陽)·자인현(慈仁縣)과 함께 군으로 승격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하양·자인군 등을 경산군으로 병합하였고, 1956년 경산면이 경산읍으로 승격하였고, 1989년에 경산시로 승격되었고 1995년에는 경산군을 통합하였다.
◆성씨의 역사
도시조(都始祖) 전섭(全聶)은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로 BC 18년 온조(溫祚)가 백제를 개국할 때 오간(烏干), 마려(馬藜),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간(屹干), 곽충(郭忠), 한세기(韓世奇) 등 9사람과 함께 공을 세워 십제공신(十濟功臣)으로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다.
전씨(全氏)는 도시조(都始祖)인 전섭으로부터 18본이 분적되었으며,
경산전씨(慶山全氏)의 시조 전영령(全永齡)은
도시조 전섭(全聶)의 27세손이다.
《전씨대동보(全氏大同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 신종 때에 신호위 대장군(神虎衛 大將軍)(종3품)을 지냈고 옥산군(玉山君: 지금의 경산)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정선전씨(旌善全氏)에서 분적해서 그를 시조로 삼고 옥산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신호위 (神虎衛)
좌우위(左右衛)· 흥위위(興威衛)와 함께 3위라 불리는 부대로 995년(성종 14)에 정비되었다.
개경(開京)의 수비는 물론 변방수비의 임무까지 지고 있는 경군의 핵심 주력부대였다.
신호위는 보승(保勝) 5영(領)과 정용(精勇) 2영으로 총 7,000명의 군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소속된 무관직을 문종 때의 기준으로 보면 정3품의 상장군(上將軍) 1명, 종3품의 대장군(大將軍) 1명, 정4품의 장군(將軍) 7명, 정5품의 중랑장 14명, 정6품의 낭장 35명, 종6품의 장사 1명, 정7품의 별장 35명, 정8품의 산원 35명, 정9품의 위 140명, 종9품의 대정 280명이었으며, 녹사도 2명 있었다. 이들은 국가의 관료체계 속에 편재되어 전시과(田柴科)를 지급받았다.
▶6위 [六衛]
고려 전기 중앙군 조직인 좌우위(左右衛)·신호위(神虎衛)·흥위위(興威衛)·금오위(金吾衛)·천우위(千牛衛)·감문위(監門衛)를 합쳐 부르는 말.
이군(二軍)과 함께 팔위(八衛)로 불리면서 중앙군의 핵심을 이루었다. 998년(목종 1) 개정된 전시과(田柴科)의 지급 대상자 속에 이미 6위·제위(諸衛) 등의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시기는 대략 995년(성종 14)경으로 추측된다.
고려 초기 병권(兵權)이 지방의 호족(豪族)들에게 분산되어 있는 상황 아래서 고려 정부는 병권을 중앙으로 집중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는데, 6위는 이들 호족들의 사병을 해체하여 국가의 공병(公兵) 조직으로 재편성한 것이다.
성종은 중국의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6위 조직 역시 당(唐)나라의 부병제를 모델로 삼았다. 이에 농민층을 주요한 선군(選軍) 대상으로 삼았고, 교대로 중앙에 번상(番上)하게 하였다.
6위 가운데 주력을 이루는 것은 좌우위·신호위·흥위위 3위로서 이들은 6위의 전체 병력 42령(1령=1천 명) 가운데 32령을 차지하였다. 이들 부대에는 보병과 기병의 병종(兵種) 구분으로 추측되는 보승(保勝)과 정용(精勇)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주현군(州縣軍)의 보승 정용으로부터 번상되는 순수한 의미의 번상군이었다. 이들은 중앙군의 주력부대로서 상경시위(上京侍衛)·출정(出征)과 방수(防戍)·역역(力役) 등 일반 군사력으로서의 임무를 띠었다.
나머지 3위는 특수부대로서 기능의 분화에 따라 첨가되었다. 금오위는 도성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부대였는데, 정용 6령과 역령(役領) 1령이 속해 있었다. 이 중 정용 6령은 번상군으로 보이지만, 역령은 죄수들의 복역을 감독하는 특수부대였다. 뒤에 비순위(備巡衛)로 개칭되었다. 천우위는 왕을 시종하는 의장대(儀仗隊)였는데, 상령(常領) 1령과 해령(海領) 1령이 속해 있었으며, 각각 육상과 해상에서의 의장대 임무를 맡았다.
감문위는 도성의 각 문에 배치되어 출입을 감시하던 부대로 1령으로 구성하였는데, 부모의 봉양이나 질병·노쇠 등의 특별한 사정에 의해 입속된 군인층도 있었다. 역령·상령·해령·감문령 등의 특수부대들은 그 기능상 항상 도성에 머물러 있어야 했으며, 따라서 번상군이 아닌 상비군으로서 존재하였다. 이들은 일종의 직업군인으로서 역령·해령·감문군 등은 전시과 토지를 지급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분적종 및 분파
경산전씨는 정선전씨(旌善全氏)에서 분적한 성씨이다.
◆주요 세거지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류산리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남전리
경상남도 합천군 덕곡면 장리
경상남도 창녕군 대합면 일원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선천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경산전씨는 4,558가구 총 14,742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경산전씨(慶山全氏)의 인물들]
전경창, 전백영, 전한
[경산전씨(慶山全氏)의 과거 및 취재 합격자]
고려문과
전백영
무과
전덕운,전무성,전양,전윤중,전응명,전침,전희립
문과
전경창,전응창,전한,전헌
[참고문헌]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尹昌鉉, 보명사, 1929)
《한국지명연혁고(韓國地名沿革考)》(權相老, 동국문화사, 1961)
《韓國人의 姓譜》(삼안문화사, 1986)
《姓氏의 고향》(중앙일보사, 2002)
傳統族譜文化社(http://www.genealog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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