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8. 12:55ㆍ 인물열전
조선시대 청백리(염근리) 성균관사성 상주목사
전팽령 [全彭齡, 1480~1560]
한국 전기의 문신이다.
1550년(명종 5)
상주목사로 재임 중 청백리의 별칭인 염근에 선발되어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랐으며,
1559년에는
가선대부로 승급하고 부호군에 임명되었다
본관은 옥천(沃川)이다. 자는 숙로(叔老)이고, 호는 송정(松亭)이다. 참판을 지낸 전응경(全應卿)의 아들로 태어났다.
1504년(연산군 10)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24년(중종 1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형조좌랑(정6품)· 공조정랑(정5품)· 사도시첨정(司導寺僉正)(종4품)· 성균관사성·통례원우통례(정3품) 등을 역임한 후 외직으로 나가 평안평사· 단천군수· 삼척부사· 밀양부사· 상주목사 등을 지냈다.
◆사마시 [ 司馬試 ]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선발하는 과거 시험.
◆청백리 [淸白吏]
관직 수행 능력과 청렴(淸廉)·근검(勤儉)·도덕(道德)·경효(敬孝)·인의(仁義) 등의 덕목을 겸비한 조선시대의 이상적(理想的)인 관료상으로, 의정부(議政府)에서 뽑은 관직자에게 주어진 호칭이다. 총 219명이 배출되었으며, 대표적 인물로는 맹사성·황희·이현보·이황·이원익·김장생·이항복 등이 있다.
관직 수행 능력과 청렴·근검·도덕·경효·인의 등의 덕목을 겸비한 조선시대의 이상적인 관료상이다. 의정부·육조 및 경조의 2품 이상 당상관과 사헌부·사간원의 우두머리가 천거하고 임금의 재가를 얻어서 의정부에서 뽑았다. 청백리가 되면 후손들에게 선조의 음덕을 입어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특전도 주어졌다.
1695년(숙종 21)에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청백리를 뽑으면서 살아 있는 경우에는 '염근리', 죽은 후에는 '청백리'라고 호칭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확히는 명종대부터 살아 있는 자는 염근리라는 명칭을 붙여 선발했고, 특별한 과오가 없는 한 사후에는 청백리로 녹선(錄選)하였다.
청백리는 총 219명이 배출되었는데, 맹사성·황희·이현보·이황·이원익·김장생·이항복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대동장고(大東掌攷)》, 《청선고(淸選考)》, 《전고대방(典故大方)》 등에 청백리에 관한 자료가 전한다.
◆염근리[廉謹吏]
청렴하고 매사에 조심성이 있는 관리
◆통정대부 [通政大夫]
정3품의 상계(上階)이다. 1865년(고종 2)부터는 문관뿐만 아니라 종친(宗親)·의빈(儀賓)의 품계로도 함께 사용하였다.
통정대부는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근무일수에 상관없이 능력에 따라 가자(加資) 또는 가계(加階)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봉조하(奉朝賀)가 되어 녹봉(祿俸)을 받는 등의 특권을 누렸다.
◆가선대부 [嘉善大夫]
조선시대의 종2품 아래의 관계(官階).
초기에 문무산계(文武散階)로 사용하였으나 후기에는 종친(宗親)과 의빈(儀賓)의 관계로도 사용하였다. 이 관계에는 군(君) ·위(尉) ·동지사(同知事) ·참판 ·좌우윤(左右尹) ·대사헌 ·내각제학(內閣提學) ·제학 ·세자좌우부빈객(世子左右副賓客) ·부총관(副摠管) ·훈련대장 ·수어사(守禦使) ·통제사 ·개성부관리영사(開城府管理營使) ·군문중군(軍門中軍) ·금군별장(禁軍別將) 등이 해당된다.
◆부호군 [副護軍]
조선시대 오위(五衛)에 속해 있던 종4품의 무관직
정원 69명. 태종 초에는 섭호군(攝護軍)이라 하였다. 1467년(세조 13) 관제개혁 때 부호군으로 개칭하고 법제화하였다. 당시의 정원은 54명이었으나 5위의 기능이 유명무실화하면서 69명으로 늘어났다. 호군(護軍)의 아래, 사직(司直)의 윗 벼슬로, 실직(實職)은 주지 않고, 다만 타직(他職)에서 거관(去官)된 자에게 녹봉(祿俸)만 주기 위하여 둔 벼슬이다.
◆형조
1404년(태종 4) 관제개편 때 정2품 아문(衙門)으로 승격하였다. 처음에는 전서(典書:정3품)·의랑(議郞:정4품)·정랑(正郞:정5품)·좌랑(佐郞:정6품)·주사(主事:정7품) 등의 관원을 두어 수재·화재·간음·도적·투살(鬪殺)·소송 등의 일을 맡아보게 하고, 따로 형조도관(刑曹都官)을 두어 노예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1405년 이후에는 판서(判書)·참판(參判)·참의(參議) 각 1명, 정랑·좌랑 각 4명, 율학교수(律學敎授:종6품)·겸교수(兼敎授:종6품) 각 1명, 별제(別提:종6품)·심률(審律:종8품)·검률(檢律:종9품) 각 2명, 명률(明律:종7품)·율학훈도(律學訓導:정9품) 각 1명의 관원을 두었다. 또한, 형조의 업무를 분장하기 위해 그 예하에 상복(詳覆)·고율(考律)·장금(掌禁)·장례(掌隷)의 4사(司)와 전옥서(典獄署)·장례원(掌隷院) 등의 속아문(屬衙門)을 두었는데, 분장업무는, ① 상복사:중죄에 대한 복심(覆審) ② 고율사:법령의 조사와 형옥(刑獄)의 결정 ③ 장금사:문관(門關)·진량(津梁)·도로·금령(禁令) 관계의 일 ④ 장례사:노예에 관계되는 일 ⑤ 전옥서:죄수에 관계되는 일 ⑥ 장례원:노예의 장부와 소송에 관계되는 일 등이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법무아문(法務衙門), 1895년에 법부로 개칭되었다.
◆공조
조선시대에는 1392년(태조 1) 설치되어 소속부서로는 토목공사를 맡은 영조사(營造司), 공예품의 제작·도량형을 관리하는 공야사(攻冶司), 산림·소택·목재·궁궐의 정원·교통사무·필묵(筆墨)·칠기(漆器)를 맡은 산택사(山澤司)가 있었으며, 소속관청으로는 상의원(尙衣院)·선공감(繕工監)·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전연사(典涓司)·장원서(掌苑署)·조지서(造紙署)·와서(瓦署) 등이 있었다.
관원으로는 판서(判書:정2품) 1명, 참판(參判:종2품) 1명, 참의(參議:정3품) 1명, 정랑(正郞:정5품) 3명, 좌랑(佐郞:정6품) 3명이 있었다. 1894년(고종 31) 공무아문(工務衙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이듬해 다시 농상아문(農商衙門)과 합하여 농상공부(農商工部)로 개편되었다
◆사도시
조선시대 궁중의 쌀과 곡식 및 장(醬) 등의 물건을 맡은 관청.
1401년(태종 1) 7월 공정고(供正庫)로 고쳤다가, 1422년(세종 4) 9월에 도관서( 官署)로 고쳤으며, 1460년(세조 6) 5월 이를 없애고 사선서(司膳署)에 합쳤다가, 1467년 4월 사선서가 사옹원(司饔院)에 합쳐지면서 다시 도관서를 두게 된 뒤 《경국대전》에는 사도시로 이름을 고쳐 올렸다.
관원은 제조(提調:정2품) 1명, 정(正:정3품) 1명, 부정(副正:종3품) 1명, 첨정(僉正:종4품) 1명, 주부 1명, 직장(直長) 1명 등이 있었으며, 이속(吏屬)으로 서원(署員) 8명과 고직(庫直) 3명, 군사(軍士) 1명 등이 있었는데, 뒤에 《속대전》에는 정과 승(丞)을, 또 《대전회통》에는 직장을 없애고 봉사(奉使)를 더하게 되었다. 본래 정2품아문이었다가 정3품아문이 되었으며, 1882년(고종 19)에 없어졌다.
◆우통례 [右通禮]
조선시대 의례(儀禮)를 담당하던 통례원(通禮院)에 두었던 정삼품직.
통례는 조하(朝賀)·제사·찬알(贊謁) 등의 예식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예조에 속해 있는 통례원의 관원으로 좌통례·우통례로 나뉜다. 이는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겸판통례문사(兼判通禮門事)가 1466년(세조 12) 1월 관제개정 때 각각 좌통례·우통례로 개칭된 것이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좌통례는 당상관으로 승진되는 관원인데, 좌통례에 결원이 있으면 우통례로서 근무일수를 계산하지 않고 승진시켰다. 우통례는 이처럼 좌통례를 역임한 후에야 당상관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대전통편》에서는 우통례가 승격 임명되면 재직한 일수를 통산하여 임기가 차야 당상관으로 승품(陞品)했다. 1894년(고종 31) 1차 내정개혁으로 폐지되었다.
통례원의 관원은 정삼품
당하관인 좌·우 통례 각 1명, 종삼품 상례(相禮), 정사품 봉례(奉禮), 정오품
찬의(贊儀) 각 1명, 종육품 인의(引儀) 8명이며, 이속으로 서리(書吏) 8명을
두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종삼품 익례(翊禮) 1명, 종구품겸인의와 종구품 가인의(假引儀)를 6명씩 증원했으며 관원은 식순과 홀기(笏記)를 잘 부르는 목청이 좋은 자를 뽑았다.
◆평사
조선시대에는 평안도와 함경도에 각 1명씩 두었던 정6품의 무관직으로 1466년(세조 12) 병마도사(兵馬都事)를 고친 이름인데 병마절도사의 속료(屬僚)로서 개시(開市)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았다.
◆단천군 [端川郡]
함남 북동부에 있는 군.
[옥천군청] 목담서원 춘향제 열려
연합뉴스
전팽령, 전식, 전유등 삼위를 봉안하고 있는 『목담서원 춘향제』가 4월 8일 오전 11시 동이면 금암리 목담영당에서 목담서원, 옥천전씨 종친회등 유림 및 종친회원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목담서원은 1765년 유림과 후손들이 송정 전팽령의 영정을 봉안하면서 세워져 운영되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린 것을 1936년 다시 복원하면서 영당만을 세우고 전팽령, 전식, 전유선생을 봉안하고 있다.
목담영당안의 영종중 사서공 전식 영정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71호로 지정되어 있고 전팽령이 밀양부사를 그만두고 고향에 왔을 때 지은 양신정은 충청북도 기념물 29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불 타버렸으며 현재의 정자는 1828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정면 삼 칸, 옆면 두 칸 팔 작 목조 기와집으로 현재는 옥천전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양신정은 조선 중기 문신인 송정 전팽령(1480∼1560)이 관직을 떠나 있을 때 글도 가르치고 독서도 하기 위해 지은 정자로, ‘전송정(全松亭)’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인종 1년(1545)에 세워진 건물이며, 소세양의 「양신정기(養神亭記)」에 그 당시의 기록이 남아 전해 오고 있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 12년(1620)에 다시 지었으나, 영조 9년(1733)에 무너져 없어졌다. 지금의 정자는 순조 28년(1828)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 건물은 목담호숫가에 서 있는 목조기와집으로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서쪽 한칸은 온돌로 되어 있고, 주위에는 나지막한 흙돌담이 둘러져 있으며, 소나무숲이 이곳을 둘러싸고 있다.
이 정자는 조선(朝鮮) 인종(仁宗) 원년(元年)(1545) 송정(松亭) 전팽령(全彭齡)이 밀양부사(密陽府使)로 있다가 물러나 쉬면서 글읽는 곳으로 지은 것이데, 선조(宣祖) 30년(1597)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병화(兵火)로 불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光海君) 12년(1620)에 다시 지었으나 영조(英祖) 9년(1733)에 무너져 없어졌었다. 지금 있는 정자는 순조(純祖) 28년(1828)에 다시 지은 정면 측면 각 2칸 규모의 목조와즙의 팔작집이다. 이 정자를 처음 지을 때의 사정을 전하는 소세양(蘇世讓)의 『양신정기(養神亭記)』가 남아 전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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