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機張)전씨(全氏)

2009. 12. 24. 17:38 인물열전

기장(機張)전씨(全氏)

 

본관 연혁

기장(機張)은 본래 경상남도 양산시(梁山市)에 위치한 지명으로 505년(신라 지증왕 6)에는 갑화량곡현(甲火良谷縣)으로 불렸고, 685년(신문왕 5) 9주 5소경제로 개편하면서 삽량주(歃良州: 梁山)에 편입되었고 757년(경덕왕 16)에는 기장현으로 개명하여 동래군에 속하게 하였다. 995년(성종 14)에는 양주군에, 1018년(현종 9)에는 울주군에 예속되기도 하였고, 차성(車城)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1391년(공양왕 3)에 기장군으로 승격되었다. 1394년(태조 3) 기장현으로 개편되었다. 1456년(세조 1)에는 동래진의 좌익이 되었다가 1599년(선조 32)에 폐현되어 남쪽은 동래군에, 북쪽은 울산군에 편입되어 울산군 하미면이 되었다. 1617년(광해군 9)에 기장현으로 복원되었고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동래부(東萊府)에 속해 있다가 1896년에 경상남도 기장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동래부가 폐지되어 기장현도 기장면(機張面)이 되어 동래군에 예속되었다. 1973년 동래군이 폐지되고 양산군에 병합되었고, 1980년에 기장면이 기장읍으로 승격하였다. 기장면(機張面)은 양산군(梁山郡)에 속하였다가 1995년 기장군으로 승격하면서 부산광역시로 편입되었다.

 

성씨의 역사

도시조(都始祖) 전섭(全聶)은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로 BC 18년 온조(溫祚)가 백제를 개국할 때 오간(烏干), 마려(馬藜),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간(屹干), 곽충(郭忠), 한세기(韓世奇) 등 9사람과 함께 공을 세워 십제공신(十濟功臣)으로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다.

전씨(全氏)는 도시조인 전섭으로부터 18본이 분적되었으며, 우리나라 전씨는 단본이라 할 수 있다.

기장전씨(機張全氏)의

시조 전영(全泳)은 도시조인 전섭(全聶)의 30세손이다.

고려 충숙왕 때 문과에 합격하여 형부전서(刑部典書)와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로서 훈공을 세웠고,

공민왕 때 기장백(機張伯)에 봉해졌으며 기장(機張)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후손들이 그곳에 세거하면서 정선전씨(旌善全氏)에서 분적하여 그를 시조로 삼고 기장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상서형부 [尙書刑部]

육부의 하나로, 법률·소송·형옥(刑獄)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다. 태조 때 의형대(義刑臺)라 하여 설치, 관원으로 어사(御使)·시랑(侍郞)·낭중(郞中)·원외랑(員外郞) 등을 두었다가 곧 형관(刑官)으로 개칭한 것을 995년(성종 14) 관제 개혁 때 이 이름으로 고쳤다. 그후 1275년(충렬왕 1) 전법사(典法司)로 개칭하였다가 1298년 형조(刑曹)로 개칭하였으며, 1308년 이감전색(以監傳色)·도관(都官)·전옥(典獄)을 병합하여 헌부(讞部)로 개편하였다가 곧 전법사로 고쳤다. 1356년(공민왕 5) 형부(刑部), 1362년 전법사, 1369년 이부(理部), 1372년 다시 전법사로 되었다가 1389년(공양왕 1) 형조로 다시 고쳐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관원으로는 문종 때를 표준으로 판사(判事:종1품 宰臣이 겸직) 1명, 상서(尙書:정3품) 1명, 지부사(知部事:종3품 타관 겸직) 1명, 시랑(정4품)·낭중(정5품)·원외랑(정6품) 각 2명, 율학박사(律學博士:종8품) 1명, 율학조교(律學助敎:종9품) 2명과 이속(吏屬)으로 주사(主事) 2명, 영사(令史) 6명, 서령사(書令史) 4명, 계사(計士) 1명, 기관(記官) 6명, 산사(算士) 2명, 장수(杖首) 2명을 두었다.

 

▶전서 [典書]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의 정3품 관직.

1308년(충렬왕 34)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기존의 전리사(典理司)·군부사(軍簿司)·판도사(版圖司)·전법사(典法司) 4사를 선부(選部)·민부(民部)·언부(讞部) 등 3부로 고쳤다. 전서는 이 때 4사를 3부로 고치면서 4사의 장(長)인 상서(尙書)를 명칭만 바꾼 것이다. 정3품 중앙 관직으로 선부와 민부에 3명, 언부에 2명을 두었다.

1327년(충숙왕 14) 3부를 다시 4사로 복구할 때 판사로 고치면서 전서는 없어지고,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상서, 1362년에 6사의 판서(判書), 1369년 6부의 상서, 1389년(공양왕 1)에 6조의 판서가 전서를 대신하였다.

이어 1392년(태조 1) 조선이 건국되면서 조선도 고려시대의 관제를 그대로 계승해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의 6조를 설치하고, 이 6조의 장관을 전서라 하였다. 품계는 정3품이다.

그러나 중앙관청인 6조의 장관이 직위가 낮은 정3품이라 6조는 국사에 깊이 참여하지 못하고, 단순한 정무 집행기관의 역할밖에 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1405년(태종 5) 관제를 개혁하면서 6조의 전서를 판서로 고치고, 정2품으로 승격시켜 의정부(議政府)에서 관장하던 실권을 맡게 하였다. 전서는 이후 다시는 등장하지 않았다.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판사농시사(判司農寺事)

고려·조선시대에 둔, 사농시의 으뜸벼슬. 품계는 정삼품이다.

 

▷ 사농시(司農寺)

고려시대에, 나라의 제사에 쓸 곡식과 적전(籍田)의 일을 맡아보던 관아. 뒤에 전농사, 저적창, 전농시 따위로 여러 차례 이름을 고쳤다

 

분적종 및 분파

기장전씨는 정선전씨(旌善全氏)에서 분적한 성씨이다.

 

기장전씨(機張全氏)의 과거 및 취재 합격자

문과

전내훈(全鼐勳) 전성유(全性有) 전홍일(全弘一)

 

주요 세거지

함경남도 단천군 단천읍 봉양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기장전씨는 68가구 총 223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尹昌鉉, 보명사, 1929)

《한국지명연혁고(韓國地名沿革考)》(權相老, 동국문화사, 1961)

《韓國人의 姓譜》(삼안문화사, 1986)

《姓氏의 고향》(중앙일보사, 2002)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傳統族譜文化社(http://www.genealog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