吉日(길일)은 정말 있나

2010. 1. 6. 06:42혼례(결혼)

[신년특집] 吉日(길일)은 정말 있나
‘진주만 폭격’ 1941년 12월 7일 길일… 일제, 길일 택해 공습 감행?
‘9·11 테러’ 2001년 9월 11일 길일… 우연의 일치인가 택일인가?
‘중국 예식장 초만원’ 2009년 9월 9일 길일… 9자 겹치면 좋은가?
2010년 경인(庚寅)년 새해가 밝아온다. 매번 해가 바뀔 때마다 적잖은 사람들은 새해의 발복을 기원하며 그 해의 길흉(吉凶)을 점친다. 길(吉)하고 흉(凶)한 것은 정말 있는 것일까. 나아가 ‘특별히 좋은 날’을 의미하는 길일(吉日)이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1 대표적 사례 중 하나는 지난 2009년 9월 9일이 었다. 이날은 중국의 신랑·신부들이 결혼식장을 잡기 위해 난리법석을 벌인 날이다. 일부 극성 예비 부부들은 이날 9시 9분 9초로, 초단위까지 ‘9자’에 맞춰 식을 올리기 위해 아우성을 쳤다. “2009년 9월 9일은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하는 대길일(大吉日)”이란 것이 이유였다. 이에 따라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톈진(天津), 광저우(廣州) 등 중국 각 도시의 예식장들은 이 날짜에 맞춰 결혼을 하려는 예비 부부들로 몸살을 앓았다. ‘9자’가 3개 겹친 2009년 9월 9일. 이날은 정말 길일일까. 나아가 길일이란 것이 정말 있을까. 있다면 길일은 대체 무엇일까.

#2 1941년 12월 7일. 이날은 일제가 진주만을 폭격,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한 날이다. 역사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이날은 24절기의 하나인 대설(大雪)로 절기가 바뀌는 날이며 음력으로 따지면 신사(辛巳)년 경자(庚子)월 기축(己丑)일에 해당한다. 음양오행론(陰陽五行論)에 따르면 이날은 신사년의 ‘사(巳)’와 기축일의 ‘축(丑)’이 합(合)을 이루고 경자월의 ‘자(子)’와 기축일의 ‘축(丑)’이 또 다른 합을 이루는 날. 이중으로 합을 이루는 이런 날을 전통적 음양오행론적 시각에선 길일로 본다. 그렇다면 진주만을 폭격하기 전, 일제 군부가 ‘미리 좋은 날을 받았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일제는 과연 길일을 택해 전쟁을 벌인 것일까.

#3 2001년 9월 11일. 이날은 기억에도 생생한 ‘9·11 테러’가 터진 날이다. 음력으로 따지면 신사(辛巳)년, 정유(丁酉)월, 정축(丁丑)일. 음양오행론(陰陽五行論)에 따르면 신사년의 ‘사(巳)’와 정유년의 ‘유(酉)’, 정축일의 ‘축(丑)’, 세 가지가 삼합(三合)을 이루는 길일이다. 설마…. 아랍 테러리스트들이 길일을 택한 것일까, 아니면 단순한 우연의 일치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길일이란 개념 자체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식의 부질없는 것일까.


삼국시대에도 ‘길일 택했다’ 기록

인류는 언제부터 ‘좋은 날과 나쁜 날’을 따지기 시작했을까. 기록은 춘추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자가 편집한 것으로 알려진 중국 최초의 시가집 ‘시경(詩經)’ 위풍(衛風) 편에 “점을 쳐서 흉함이 있는지를 봤다(爾卜爾筮 體無咎言)”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예기(禮記)’에도 유사한 대목이 있다. 백성이 의심하는 바를 결정해 추진하는 방책으로 “길일에 점을 쳐서 실천했다(故曰疑而筮之則弗非也日而行事則必踐之)”는 기록이 나오는 것이다. 이는 국민을 설득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의 하나로 고대부터 점을 활용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나라 때 편찬된 역사서인 ‘북사(北史)’ 열전(列傳) 편에는 고구려의 풍습에 관해 “길일을 택해 장례를 지냈다(擇吉日而葬)”는 기술이 있다. 또 삼국사기(三國史記) 문무왕 하(下)에는 “임금이 ‘이제 길일을 맞아 옛 법을 따라 과인의 여동생으로 짝을 삼으려 한다(今良辰吉日率順舊章以寡人妹女爲伉儷)’고 말했다”는 구절이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 때부터 길일을 택하는 풍습이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공주대 구중회(63) 교수는 “길일을 잡는 풍습은 국가가 생기기 이전 단계인 부족국가 시절부터 존재했다고 봐야 한다”며 “삼국시대 이래 우리나라엔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해 인간의 길흉을 따지는 관리였던 일관(日官)이 있었다”고 말했다.

▲ 폭격을 맞은 진주만 미해군기지 격납고. 일제가 길일을 택해 공습을 가한 것일까.
고대로부터 자신과 소속 집단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따지려 했던 인간은,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해 이를 분석의 ‘틀’로 삼았다. ‘봄·여름·가을·겨울로 해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별의 위치가 조금씩 달라지며, 하늘의 기운 역시 이에 따라 조금씩 변화한다’고 여긴 고대인들은 천체의 변화를 살피는 천문(天文)에 몰두했다. 이때 고대인들이 기준으로 삼은 것이 밤이 가장 긴 날인 동지(冬至)와 낮이 가장 긴 날인 하지(夏至)다. 이들은 태양을 기준으로 서서히 강해지는 양(陽)의 기운은 한여름 하지에 이르러 최고조를 보이다가 이후 서서히 쇠락, 한겨울인 동지에 이르러 가장 취약해진다고 여겼다. 하지만 밤의 길이가 가장 길다고 측정된 바로 그 시점부터 또 다시 밤의 길이는 짧아지기 시작하고, 가장 취약한 상태라고 여겨진 양(陽)의 기운은 서서히 강해지기 시작하면서 태양은 본래의 기운을 되찾아 간다. 이같은 자연현상은 ‘길(吉)한 것은 흉(凶)한 것으로 연결되고 흉한 것은 곧 길한 것으로 이어진다’는 고대의 역(易)사상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길한 것은 무엇일까. 명지대 김종업(기학·氣學) 박사는 “길하다는 것은 천체의 운행이 조화를 이룬 상태를 뜻하며 조화가 깨진 상태를 흉하다고 한다”고 말했다. “양의 기운과 음의 기운, 낮의 기운과 밤의 기운, 좋은 기운과 나쁜 기운이 고루 섞여 조화와 균형을 이룬 때가 길한 상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나 자아(自我)를 갖고 있다. 따라서 각자 이해관계에 따라 사물을 다르게 보게 된다. ‘자신에게 이로우냐 이롭지 않으냐’ 하는 것이 판단의 주요 잣대가 되는 것은 그래서다. 음양오행론에 의거해 길흉화복을 따지는 역학인들이 “모든 사람에게 다 좋은 길일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서로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상태에선 어떻게 길하고 흉함을 구별하는 걸까.
 
음양오행이 조화 이룬 날

음양오행론에선 10개의 천간(天干)과 12개 지지(地支)의 조합으로 이뤄진 ‘60갑자(甲子)’로 길흉을 따진다. 이 이론에 따르면 천지의 모든 만물은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5가지 오행(五行)으로 이뤄져 있고, 각각의 오행은 양(陽)과 음(陰)의 성질을 갖고 있다. 고대인은 이 오행과 음양의 상관관계로 인간사의 길흉을 따졌다.

물(水)은 나무(木)에 생명을 주고, 나무는 타서 불(火)을 도우며, 불 타고 남은 재는 흙(土)이 되고, 흙 속에서 쇠(金)가 나오는 선순환이 이뤄진다. 이것이 오행의 상생(相生) 관계다. 하지만 반대로 물(水)은 불(火)을 끄고, 불은 쇠(金)를 녹이며, 쇠는 나무(木)를 치고, 나무는 흙(土)에서 영양분을 빼앗고, 흙은 물을 뒤엎는 악순환도 생길 수 있다. 이것이 오행의 상극(相剋) 관계다.
▲ 9·11테러가 발발한 2001년 9월 11일은 길일이었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였을까. / photo AFP
옛 사람들은 매해마다 그 해에 해당하는 간지(干支·십간과 십이지)를 붙였다. 이는 연(年) 뿐만 아니라 월(月)·일(日)·시(時) 모두에 해당한다. 2009년은 기축(己丑)년, 2010년은 경인(庚寅)년이 된다. 이런 원리로 따지면 특정 시점의 연·월·일·시에는 저마다 고유한 간지가 부여된다. 고대인들은 이 간지의 상관관계로 길흉을 따졌다.

길흉을 따지려는 어떤 날의 간지(干支)가 ‘정사(丁巳)’라고 치자. 이날의 천간인 정(丁)은 불(火), 지지인 사(巳) 역시 불기운을 갖고 있는 오행이다. 그렇다면 이날은 불기운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겐 길일이 된다. 반대로 이미 불기운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날을 길일로 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불기운을 필요로 하는지, 아니면 이미 불기운을 충분히 가지고 있어서 다른 기운을 필요로 하는지는 그 사람의 태어난 연·월·일·시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길일을 잡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연·월·일·시와 그에 따른 간지를 먼저 살핀 뒤, 그 사람에게 필요한 기운을 가진 날이 언제 오는지를 따져서 정한다. 그런데 10개의 천간(天干)과 12개의 지지(地支)는 자기들끼리 서로 합(合)을 이루기도 하고, 충(?)을 빚기도 한다.

▲ 9자가 겹치는 2009년 9월 9일이 중국에서 길일로 여겨져 결혼식장이 만원을 이뤘다. / photo 로이터
중국의 예식장이 초만원을 이룬 2009년 9월 9일은 기축(己丑)년 계유(癸酉)월 정사(丁巳)일이었다. 음양오행론에 따르면 사(巳)·유(酉)·축(丑), 세 글자는 서로 합(合)을 이루는 삼합(三合)의 관계다. 음양오행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럼 이 날은 길일이었을까. 사주아카데미 노해정씨는 “전통적으로 합을 이루는 날 결혼을 하면 좋은 것으로 인식된 것이 사실”이라며 “하지만 단순히 합이 들어있는 날 결혼했다고 해서 이혼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국민일보 기자 출신 역학인 아가행복작명연구원의 한가경 원장은 “9자와 8자를 유난히 좋아하는 중국인의 풍속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며 “좋아하는 숫자는 나라마다 다른 만큼 길일에 연연해 하지 말라”고 말했다.


“하루하루 길흉에 연연치 말라”

일제가 진주만을 폭격한 1941년 12월 7일은 어떨까. 신사(辛巳)년 경자(庚子)월 기축(己丑)일인 이날은 신사년의 ‘사(巳)’와 기축일의 ‘축(丑)’이 합(合)을 이루고, 경자월의 ‘자(子)’와 기축일의 ‘축(丑)’이 또 다른 합을 이룬 날이다. 노해정씨는 “아군에게 유리한 날을 잡는 택일은 고대 전투기술의 하나”라며 “일본은 전통적으로 음양오행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기 때문에 태평양전쟁을 앞두고 좋은 날을 잡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노씨는 “우연의 일치겠지만 9·11 사태가 발생한 2001년 9월 11일 역시 전통적 시각으로 보면 길일이었다”며 “하지만 수십 년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이 하루하루의 길하고 흉함을 따지는 것은 의미없는 짓”이라고 일축했다.

9·11 테러가 벌어진 2001년 9월 11일은 신사(辛巳)년, 정유(丁酉)월, 정축(丁丑)일이다. 음양오행론에 따르면 사(巳)·유(酉)·축(丑)의 세 오행은 서로 어울려 삼합(三合)을 이루는 관계다. 음양오행을 응용한 고대병법인 ‘기문둔갑(奇門遁甲)’을 연구하는 유래웅씨는 2001년 9월 11일에 대해 “겉으로 보면 길일이지만 신사년에 사·유·축의 삼합이 들어오면 ‘유(酉)’의 기운이 무력해지는 공망(空亡)이 된다”며 “이런 날은 소리가 요란해 천지가 요동치는 상황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유씨 역시 “하지만 특정한 하루의 길흉을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덧붙였다.

아가행복작명연구원 한가경 원장은 “인간의 운명은 선행을 쌓으며 수양을 하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라며 “하루하루의 길흉에 연연해 하지 말라”고 말했다. 정신과학학회의 설영상 이사는 “흉한 것이라 해도 항상 흉하지 않고 길한 것이라 해도 항상 길하지는 않다는 것이 동양의 전통 사상”이라고 했다. 설 이사는 “옛 선인들이 길흉을 따진 이면엔 ‘어려움에 직면했을 경우엔 공부를 하며 내실을 다지라’는 교훈이 있었다”며 “이를 간과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 이범진 기자
bomb@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