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家를 찾아서] 천안 풍세면 삼태리 천안 전씨家

2010. 4. 3. 22:34 인물열전

[명문家를 찾아서] 천안 풍세면 삼태리 천안 전씨家

[중앙일보]

온조와 왕건 도와 백제·고려 건국의 초석으로

충남문화재자료 297호인 천안 풍세면 삼태리의 천안 전씨 시조 단소(壇所). 백제 건국 시조 온조를 도운 전섭의 단 앞에서 천안 전씨 문효공파종회 간부들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오른쪽부터 전면수 부회장, 전해철 회장, 전윤배 총무.

명문가란 통상 한 집안에서 정치인·관료·학자·기업인 등이 다수 배출된 경우를 말한다. 천안·아산에서 명문가로 일컬을 만한 집안을 소개한다.

글=조한필 기자, 사진= 조영회 기자

『신증동국여지승람』 천안편 ‘우거’(寓居, 낙향)항목에 전신(1276~1339)의 이름이 유일하게 올라있다. 그에 대해 “벼슬이 동지밀직사사에 올랐고…일에 엄중하며 청탁을 멀리했고…평생 축재에 뜻을 두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현재 천안·아산에 사는 천안 전씨들은 대부분 전신에서 갈려나온 문효공파(文孝公派)다.

천안 전씨의 시조는 기원전으로 올라간다. 전섭(全攝)은 기원전 18년 오간·마려 등 9명과 함께 온조의 백제 건국을 돕는다. 직산 위례성의 백제 첫 도읍지 주장과 연관지어 생각컨대 전섭이 천안을 근거지로 온조를 도왔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 공으로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다. 환성은 고려 태조 13년(930년) ‘천안’지명이 정해진 이후 생긴 또 다른 천안의 이름이다. 환성군은 고려시대에 받은 군호인듯하다.

후손들은 천안 풍세면 삼태리 태학산 인근에 시조 전섭과 전승·전신 부자를 모신 단(壇)을 만들고 매년 양력 10월 3일(시조 전섭)과 음력 10월 1일(전신)에 시향제를 지내고 있다. 단은 묘소가 있었으리라 짐작되는 곳에 가묘를 만들고 제향을 받는 곳이다.

천안전씨 문효공파 종회 전해철(75·시조의 58세손·성균관유도회 충남도본부 회장)회장은 “전두환 대통령 재임시 1980년대 중반 시조 환성군 시향제 때 전국에서 1600여 명의 종친이 모인 적도 있다”며 “당시 경찰서에서 교통 경찰 여러 명이 나와 교통 정리를 도왔다”고 회고했다. 전 전대통령은 시조의 30세손 때 갈라진 완산(전주) 전씨다.

천안 전씨 이야기는 아무래도 고려 태조 왕건과 함께 후백제와의 전투에 참가한 전낙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문효공 전신이 낙향해 강학하던 장소에 1776년 세웠던 검계서원이 1999년 복원됐다.

◆‘천안군’ 전낙(全樂)=시조 전섭의 16세손으로 중시조로 추앙받는다. 927년(고려 태조 10년)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다른 장수들과 함께 왕건을 구하고 순국했다. 그해 후백제 견훤은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을 죽이고 경주를 초토화시킨다. 신라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던 고려는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고 경주로 향하던 중 대구 부근에서 후백제의 기습을 받고 위기에 처한다.

이때 왕건을 살리기 위해 그의 무장들이 목숨을 바친다. 신숭겸은 왕건의 옷을 대신 입고 적을 유인했다. 이때 전낙도 김낙(전낙과 이름 같음), 정선 전씨인 전이갑·전의갑 형제 등과 함께 전사한다. 좌복야(左僕射,백관을 총괄하던 상서도성의 정2품)로 추증된다.

태조는 후삼국을 통일한 후 천안지역과 연관이 있던 전낙을 천안군(天安君)에 봉한다. 봉토도 하사해 후손들이 천안에 기반을 잡고 사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이때 본관도 천안으로 정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보다 70여 년 앞서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천안을 본관으로 가진 성(土姓)은 ‘全·河·申·沈·張’다섯 성이라고 했으나 종친회의 전 회장은 “천안이 본관인 성은 이제 전씨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천안 전씨는 고려시대 많은 고관을 배출한다. 전낙의 증손자 전홍술은 문하시중 평장사(정2품)를 지냈고, 전홍술의 증손자 전인량은 한림학사·이부성서(정3품)를 지냈다. 그의 아들 전단은 동생 전승과 함께 명성을 날려 천안 전씨 다른 파(판결사공파, 대제학공파, 삼재공파, 두평공파)의 계파 시조가 된다. 전승은 전신의 부친으로 고려때 과거시험을 관장하는 벼슬인 지공거(知貢擧)를 지냈다.

◆‘문효공’전신(全信)=천안 전씨 문효공파 시조다. 고려 충렬왕·충숙왕·충혜왕 등 3대 왕을 섬기며 내외직을 두루 역임했다. 호는 백헌(栢軒), 시호는 문효(文孝). 고관을 지낸 부친 덕으로 벼슬에 나아갔으나 1301년(충렬왕 27) 문과 급제했다. 여러 관직을 거쳐 충혜왕 때 동지밀직사사에 올랐다. 밀직사(密直司)는 고려시대 왕의 명령을 전달하고 궁궐을 지키며 군사 업무를 관장했던 주요 관청이다. 그는 이 관청에서 종2품의 높은 벼슬에 있었다. 청렴하고 학문을 즐겨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였던 백이정·이제현 등과 교류했다. 감찰기관인 사헌부의 장령(종4품)으로 근무할 때 탐관오리를 척결해 주위의 신망을 얻었다. 전신은 안동·함안·경주 등 외직에 근무할 때도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다른 곳으로 떠날까 걱정할 정도였다”고 전한다.(전해철 회장)

그는 57세 때인 1333년 천안 풍세면에 낙향해 학당을 세웠다. 강학과 후학 양성에 주력하다 63세에 죽어 개성 선흥사 남쪽에 묻혔다. 그 후 400여 년이 흐른 영조 때인 1776년 지역 유생들이 그를 기리기위해 학당 터에 검계서원(儉溪書院)을 세웠다. 조정에선 1807년 전신과 이협(李莢, 1583~1665)의 영정을 이 서원에 모시고 제사지내도록 했다. 진사였던 이협은 광해군 때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절의를 지킨 인물이다. 호가 남악(南嶽)으로 부인이 천안 전씨였다.

이 서원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사라졌으나 1897년 천안 전씨 후손들에 의해 ‘두 현인을 모신 사당’ 양현사(兩賢祠)로 다시 태어났다. 철거된 검계서원의 기와는 재실 보수에 쓰였고 목재는 천안 남산에 있는 용주정 건립에 쓰였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 현재 풍세면 삼태리 시조 단소(壇所·충남 문화재 자료 297호)에 검계서원이 복원돼 있고 매년 음력 3월 10일(올해는 4월 23일) 제향을 연다.

◆절개지킨 전윤장(全允藏)=삼태리 지명은 고려 말 전성안(전신의 아들)·이승인·전윤장이 이 마을에서 태어나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이숭인(1347~1392)은 호가 도은(陶隱)으로 정몽주(포은), 이색(목은)과 함께 고려충신‘삼은(三隱)’으로 불리워졌던 인물로 문장이 뛰어났다. 삼은에는 이숭인 대신 야은 길재를 넣기도 한다.

전윤장은 원나라 지배시기 고려 조정에서 중국어와 몽골어에 능통한 외교관이었다. 원나라에 가서 금·은 보화 뇌물로 원나라 조정을 움직여 1339년 충혜왕이 다시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 공으로 대호군(종3품)에서 최고 무관직인 상호군(정3품)으로 승진한다. 충목왕·충정왕 때 동지밀직사사·찬성사(정2품) 등을 역임했다. 1349년 원나라에 가는 강릉대군(후일 공민왕)을 시종하고 2년 후인 1351년 원나라가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강릉대군을 왕으로 삼자, 공민왕과 함께 귀국길에 오른다. 이듬해 한단계 뛰는 승진을 해 정1품에 오른다. 공민왕을 원나라에서 잘 보필하고, 또 환국해 즉위하기까지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

종회 전 회장은 “삼재공(전윤장)어른은 조선이 건국되자 천안으로 내려와 절개를 지키다 돌아가셨다”며 “묘소는 아산 배방면 세출리 묵계마을 뒷산에 있다”고 전했다.

장화·홍련 원한 풀어준 신임 부사는 천안 전씨

고려시대 관청 밀직사 고관을 지낸 문효공 전신의 단. 그는 초기 성리학자인 이제현·백이정 등과 교유했다.

고려 이후 천안 전씨는 충남 금산 및 전북 진안·임실, 광주·전남 나주 그리고 제주도로 퍼져 나갔다. 조선시대 유명한 천안 전씨 인물로 전동흘(全東屹,?~1705)을 꼽을 수 있다. 진안 마이산 인근에서 태어난 그는 작가를 알 수 없는 고대소설 ‘장화홍련전’의 실제 주인공인 것으로 전해진다.

평북 철산부사로 부임한 그가 계모 등쌀에 죽은 장화·홍련 자매의 원혼을 풀어줬다는 것이다. 한 지방 양반이 늘그막에 자매를 두었으나 생모가 세상을 떠나 계모를 들이게 된다. 그런데 그 계모가 자매를 학대해, 언니 장화가 연못에 투신 자살하고, 홍련 역시 죽은 언니를 그리다 못해 같은 연못에 빠져 죽는다. 억울하게 죽은 자매의 영혼은 원한을 풀고자 매번 새로 부임한 부사를 찾아가나 부사들은 겁에 질려 매번 죽고 만다.

그러던 중 담이 큰 한 사람이 자원해 철산부사로 부임한다. 그는 혼령들 이야기를 자세히 들은 후 계모를 처형하고, 연못에서 두 자매의 시신을 건져내 무덤을 만들어준다는 이야기다.

전동흘은 효종(1619~1659)때 무과에 급제한 무인이다. 그의 용맹함이 당시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의 눈에 띄어 중용된다. 평북 철산부사 등 여러 곳의 외직을 거쳐 황해도 및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총융사·포도대장(종2품) 등 주요직을 역임한다.

죽마고우 이상진(1614~1690, 이조판서·우의정 역임)과 익산 출신 소두산(1627∼1693, 평안도병마절도사)과 함께 삼걸(三傑)로 불렸다. 전동흘은 이상진과 함께 같은 서당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로 평생 뜻을 같이 한다. 두 사람 우정과 관련된 우화가 여럿 전해진다.

이상진은 전의 이씨로 시조(이도, 李棹) 묘는 연기군 전의면 유천리에 있다. 천안 전씨 시조 묘단이 있는 천안 풍세면 삼태리와는 10여 km 떨어진 가까운 곳이다. 전동흘과 이상진의 먼 조상인 전낙·이도는 모두 고려 태조를 도운 인물들이다.

또 조선조 천안 전씨로는 정묘호란때 순국한 전상의(全尙毅,1575~1627)장군을 들 수 있다. 후금(후일 청나라)은 인조의 친명(親明)정책을 구실로 3만 대군을 몰고 침략, 의주를 점령하고 남으로 진격한다. 이때 전상의는 안주성에서 5일간 분전하다 장렬히 순절, 병조판서에 추증된다. 그가 태어난 광주에 묘와 사당 ‘충민사’가 있다.

왕씨들, 전씨로 위장? … 종친들 “호사가들 얘기일뿐”

천안 전씨 시조 단소에 있는 200여 년된 소나무. 특이하게 소나무 가지가 땅 방향으로 뻗어있다.

“고려 왕조가 무너지면서 왕씨들은 전씨, 옥씨 등으로 성을 바꿨어요. 신왕조 조선을 세운 세력들이 왕씨 일족을 멸족시키려고 했어요. 왕씨들에게 섬을 하나 내줄테니 해안에 모두 모이라고 했지요. 왕씨들은 이 약속을 믿고 강화도 행 배를 탔다가 대부분 수장되고 말았지요. KBS 사극 ‘대왕 세종’에도 이런 내용이 나왔지요. 이때 모략임을 알아챈 일부 왕씨들은 배에 오르지 않고 산 속에 숨어 살면서 왕(王)자에 몇 개 획을 더한 전(全·田)씨, 옥(玉)씨, 금(琴)씨, 마(馬)씨 등으로 속여 목숨을 부지했다고 해요.” 지난해 한 네티즌이 포탈에 올린 글의 요약이다.

“왕씨성을 가진 사람은 비록 고려왕조의 후손이 아니더라도 성을 바꾸거나 어머니 성을 따르라.”(태조3년 4월 26일) 이런 태조 이성계의 명에 따라 많은 왕씨들이 성을 바꿨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정조대에 왕씨가 다시 성을 찾게돼 개성을 본관으로 했다.

조선 태조~정조의 약 400년 역사를 거치는 과정에서 왕씨들이 타 성씨에 흡수됐을 가능성은 분명 있다. 그러나 조선 초기부터 왕씨의 존재가 확인되기도 한다. 단종에게 사약을 내린 의금부도사 왕방연, 정유재란때 의병을 모아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왕득인 등을 말한다.

천안 전씨측은 전씨 속에 고려 왕족 왕씨들이 있었을 거라는 얘기를 수긍하지 않는다. 호사가들이 지어낸 말로 여긴다. 종친회 전면수(62·아산 배방읍 세출리·59세손·전 배방농협조합장)부회장은“천안 전씨 전낙 장군이 태조 왕건을 도왔고 이후 고려 왕실에서 큰 벼슬을 한 이가 많은 건 사실이나 고려 왕씨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전(全)씨의 본관은 18개로 천안을 비롯한 정선, 팔거, 성산, 황간, 계림, 옥천, 옥산, 용궁, 죽산, 성주, 함창, 평강, 기장, 완산, 나성, 감천, 부여 등이다. 전씨는 전체인구의 0.9%로 총 249개 성씨중 22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