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충렬 씨 ‘간송 전형필’ 출간

2010. 5. 6. 14:45 인물열전

소설가 이충렬 씨 ‘간송 전형필’ 출간

… 전재산 털어 국보급 유물 수집한 일화 상세히 소개

총독부와 소송끝에 ‘괴산 부도’ 되찾아
‘훈민정음 해례’ 거금 1만원 주고 구입
사촌형 월탄 박종화에게 큰 영향 받아

 

 



서울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을 세운 간송 전형필(1906∼1962)을 빼고는 한국의 미술사와 문화재의 역사를 말하기 어렵다. 그가 일제강점기 때 재산을 아낌없이 들여 수집한 덕분에 지금까지 보존된 문화재가 한두 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간송을 소재로 한 책은 ‘간송 선생님이 다시 찾은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 같은 어린이책이나, 간송의 일화를 일부 포함한 ‘한국 문화재 수난사’ 같은 책이 전부였다. 그런 가운데 간송의 일대기를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쓴 ‘간송 전형필’(김영사)이 최근 출간됐다. 저자인 소설가 이충렬 씨는 “각종 자료와 증언을 모으고 간송의 후손에게서 자료를 얻어 간송의 삶을 재구성했다”고 밝혔다.

이 씨는 간송이 우여곡절을 거듭하며 문화재를 수집한 일화들을 자세하게 다뤘다. 그 하나는 간송미술관 뒤뜰에 있는 ‘괴산 팔각당형 부도’의 입수 과정이다. 지금까지는 1935년 인천항을 통해 막 일본으로 반출되려던 것을 간송이 거금을 주고 되샀다는 정도만 알려졌다. 이 씨는 당시 조선총독부 관리들이 인천항에 들이닥쳐 밀반출 혐의를 적용해 이 부도를 압수해 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간송은 정당하게 구입한 물건이라며 총독부를 상대로 반환 청구소송을 제기해 3년 만에 이겼다.

간송이 1934년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첩 ‘혜원전신첩’을 손에 넣은 경위도 이 씨는 상세히 추적했다. 간송은 이 화첩이 흘러간 경로를 확인한 뒤 최종 소재지인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골동품상 야마나카 사다지로를 만났다. 간송은 밀고 당기는 흥정 끝에 요즘 가치로 75억 원 상당의 돈을 주고 화첩을 손에 넣은 것으로 이 씨는 추정했다.

 

 




 간송은 일본으로 반출될 뻔한 ‘괴산 팔각당형 부도’를 가까스로 되샀으나 곧바로 조선총독부에 압수당했다. 3년간의 반환청구소송 끝에 1938년 부도를 되찾은 간송은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보화각으로 옮긴 뒤 기념사진을 찍었다.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 흰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간송이다. 사진 제공 김영사

간송을 문화재 수집의 세계로 이끈 사람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이자 당대 최고의 서화 감식가로 평가받던 위창 오세창(1864∼1953)이다. 이 씨는 “간송이 위창의 영향을 받아 문화재 수집을 시작했다는 정도만 알려졌지만 간송은 훨씬 어려서부터 문화적 소양을 쌓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외사촌형인 월탄 박종화와 교유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간송은 골동품이 나타나면 그것이 이 땅에 꼭 남아야 하는 것인지부터 판단했다. 경성의 한 일본인 골동품상이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을 기와집 스무 채 값인 2만 원에 내놓자 그는 주저 없이 그 가격에 구입했다. 더 좋은 청자를 앞으로 구하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 책에선 이 밖에 불쏘시개가 될 뻔한 겸재 정선의 화첩이 간송의 손에 들어온 일화를 비롯해 간송미술관 소장품에 얽힌 이야기들을 상세히 소개했다. 1940년 여름 간송은 지인에게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소유주는 1000원을 요구했으나 전형필은 1만 원을 내놨다. 부르는 값이 낮아도 정당한 값을 계산해서 치렀던 간송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이 씨는 “간송이 문화재 구입에 전 재산을 투입한 것은 민족의 얼과 혼이 담긴 문화재를 지키는 게 민족의 자존과 존엄을 지키는 일이라는 확신에 따른 것이었다”고 말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