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민중 민족 목회자 전덕기

2010. 5. 13. 23:29 인물열전

 

[이야기 교회사]

독립운동가, 민중 민족 목회자 전덕기


초기 한국 교회 선교는 서울 정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정동에는 외국 공관이 많이 있었고 그 주변에 선교사들이 모여 살았다. 자연히 인근에 교회와 교회기관이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정동은 일반 백성들이 드나들기에 매우 어려운 지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턴을 중심으로 새로운 장소에 선교지가 개척되고 있었다. 바로 그곳이 남대문시장이 있는 상동이었다. 스크랜턴은 서민 거주지인 이곳에 서민들이 쉽게 찾아오게 교회를 세웠다. 그 교회가 오늘의 상동교회이다.



상동교회를 세운 것은 스크랜턴 선교사지만 이 교회를 발전시킨 것은 전덕기였다. 전덕기는 1875년 서울 정동에서 태어나 9세 때 부모를 여의고 숯장사를 하던 숙부 밑에서 자랐다. 어려운 시절을 보내던 전덕기는 17세 때인 1892년 생계를 위해서 스크랜턴 선교사를 찾아가 심부름꾼이 되었다. 그곳에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1896년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후 전덕기의 활동은 매우 눈부셨다. 그는 평신도로서 설교할 수 있는 권사로 임명되었고 정식으로 신학을 공부하여 1907년에는 감리교 집사목사가 되었다. 안수를 받은 직후 그는 스크랜턴의 뒤를 이어 상동교회 최초의 한국인 담임목사가 되었다.


전덕기는 남대문시장의 보통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선교 열정을 갖고 있었다. 먼저 그가 한 일은 길거리에서 노방전도를 한 것이었다. 당시 남대문시장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이 곧 복음 선포의 대상이었다. 또한 전덕기가 했던 중요한 일은 가난한 사람들의 장례를 치러주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장티푸스로 죽는 사람이 많이 있었는데 전덕기는 가족도 꺼려 하는 일을 담당하고 장례를 치어주었다.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구분하지 않았다.


전덕기는 단지 감상적인 구제활동만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조선인의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였다. 그는 조선인은 남을 의지하고 열심히 일하지 않는 잘못된 풍습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것이 정리되지 않고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다고 지적하면서 사람들에게 스스로 독립할 것을 강조했다.


박명수교수 <서울신대 신학대학원장>



전덕기(全德基)에 대하여


1875년(고종 12)∼1914년. 감리교 목사·독립운동가. 서울 출신.


9세 때 어버이와 사별한 뒤 작은아버지의 집에서 자라났다.


1892년 스크랜톤(Scranton, M. F.)선교사의 감화를 받아 1896년 세례를 받고 상동교회(尙洞敎會)에 입교하였다.


1896년 서재필(徐載弼)에 의하여 조직된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나섰으며, 이 협회의 핵심적 간부로서 독립운동가들과 친교를 두터이 하였다.


독립협회의 목적인 자주독립·자유민권사상과 자강개혁운동(自强改革運動)은 기독교복음의 내용과 일치함을 깨달았고, 그의 신앙은 자연스럽게 민족운동과 직결되었던 것이다.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에는 상동교회에서 스크랜톤을 도와 목회에 전념하였다.


1902년에는 감리교선교회에서 전도사 임명을 받고 본격적인 목회활동에 나섰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국감리교청년회연합회(당시의 엡웰청년회)를 소집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조약체결에 협조한 을사오적을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하기 위하여 정순만과 더불어 평안도 출신 장사 수십명을 서울에 불러들여 암살단을 조직하였으나 이 거사계획은 일본경찰에 의하여 저지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1907년에는 이준(李儁)과 더불어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헤이그거사계획을 성사시켰다. 같은해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비밀결사 민족독립운동단체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는 데에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한편, 1904년 그가 상동교회 안에 세운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은 1907년부터 신민회의 교육기관이 되어 활발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감리교 연회(年會)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담임목사가 되면서 당시 상동교회를 ‘민족운동의 요람’으로 만드는 데 공헌하였다.


1912년 이른바 ‘105인사건’으로 불리는 ‘신민회사건’이 일어나면서 그도 이 사건의 혐의를 받고 붙잡혀 심한 고문을 받은 끝에 발병, 병보석이 되었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죽었다.


[참고문헌]


白凡逸志

大韓季年史 上

尙洞敎會九十年史(尙洞敎會, 1980)

日帝下監理敎會三大星座(宋吉燮, 成光文化社,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