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5. 09:12ㆍ 인물열전
조선왕조실록
명종 5년 경술(1550,가정 29)
10월5일 (을축)
05-10-05[01] 청렴 근실하게 고을을 다스린 상주 목사 전팽령의 자급을 높이게 하다
상주 목사(尙州牧使) 전팽령(全彭齡)의 자급을 높여 주라고 명했다. 그것은 고을 다스리는 것을 청렴 근실하게 했기 때문이다.
【원전】 19 집 722 면
【분류】 *인사(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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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6년 신해(1551,가정 30)
11월10일 (갑오)
06-11-10[04] 삼공이 안현·홍섬·박수량 등 33인을 염근으로 이름을 고쳐 뽑다
사인이 삼공의 뜻으로 아뢰기를,
“청간한 사람은 널리 뽑기가 어려우므로 염근(廉謹)(주1)으로 이름을 고쳐서 초계하였습니다. 또 수령은 다 알 수가 없으니 감사로 하여금 초출하게 하고 육조에 소속된 각사(各司)는 육조로 하여금 뽑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리하라고 전교하였다. 뽑힌 자는 안현(安玹)·홍섬(洪暹)·박수량(朴守良)·이준경(李浚慶)·조사수(趙士秀)·이명(李蓂)·임호신(任虎臣)·주세붕(周世鵬)·김수문(金秀文)·이몽필(李夢弼)·이세장(李世璋)·이영(李榮)·김순(金珣)·전팽령(全彭齡)·홍담(洪曇)·성세장(成世章)·윤부(尹釜)·윤현(尹鉉)·윤춘년(尹春年)·정종영(鄭宗榮)·박영준(朴永俊)·오상(吳祥)·이중경(李重慶)·김개(金鎧)·임보신(任輔臣)·이황(李滉)·안종전(安從㙉)·송익수(宋益壽)·김우(金雨)·변훈남(卞勳男)·신사형(辛士衡)·강윤권(姜允權)·우세겸(禹世謙) 등 모두 33인이었다.
【원전】 20 집 57 면
【분류】 *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행정(行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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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7년 임자(1552,가정 31)
3월9일 (신묘)
07-03-09[01] 경상도 관찰사 이몽량이 이희안·조식·전팽령·김취문 등을 천거하다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몽량(李夢亮)이, 초계(草溪)에 사는 전 전옥 참봉 이희안(李希顔)과 삼가(三嘉)에 사는 선비 조식(曺植)을 천거하고, 또 염근(廉謹)한 수령인 상주 목사(尙州牧使) 전팽령(全彭齡), 영천 군수(永川郡守) 김취문(金就文), 지례 현감(知禮縣監) 노진(盧禛)을 천거하였다.
【이희안(李希顔)은 재행(才行)이 뛰어나고 효우(孝友)가 독실하여 모상(母喪)에 3년 동안 한번도 집으로 가지 않고 최질(衰絰)을 벗지 않았으므로 중묘조(中廟朝)에 천거되어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사은(謝恩)하고 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관문(官門)에 발길을 끊고 비의(非義)의 물건을 취하지 않았으므로 온 고을이 모두 흠모하였다. 조식(曹植)은 방정(方正)하고 염결(廉潔)한 사람으로 형제와 같이 살면서 자기의 재물을 사축하지 않았으며, 학문에만 뜻을 두고 과거(科擧)는 일삼지 않았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는 3년 동안 최질을 벗지 않았으며, 집에 곡식 한 섬 없어도 항상 태연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두 사람의 학행은 비록 옛날에서 찾는다 해도 흔히 얻을 수 없다. 기묘년 이후 부터 사기(士氣)가 저상되어 세상이 모두 학문하기를 꺼렸기 때문에 선한 일을 좋아하고 어진이를 높일 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야(草野)에 묻혀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는 군자가 자주 재상(宰相)·감사(監司)의 천문(薦聞)에 거론되고 있으니, 여기에서 호오(好惡)의 본성이 없어지지 않아서 그건 것임을 알 수 있다.
옛사람의 말에 ‘인재를 다른 세대에서 빌어올 수 없다.’고 했듯이, 위에 있는 사람이 진실로 성심으로 구한다면, 재행을 겸비하고 학문이 해박하여 가난을 편히 여기고 도리를 지키며 녹리(祿利)를 구하지 않는 자가 어찌 이 두 사람에 지나지 않겠는가. 김취문(金就文)·노진(盧禛) 같은 사람도 또한 모두 학행이 있어 염근(廉謹)으로만 지목될 사람은 아니니, 이들을 발탁하여 좌우에 두는 것이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그러나 높이지도 않고 가까이하지도 않았으니, 당시 인물을 전형(銓衡)하는 권한을 가진 자는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원전】 20 집 76 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 *행정(行政)
(주1)청백염근리[ 淸白廉謹吏 ]
청백리(淸白吏)와 염근리(廉謹吏)의 준말.
곧 청렴결백하고 근검한 관원을 말하는데, 이들은 의정부(議政府)의 당상관(堂上官)과 6조(曹)•한성부(漢城府)의 2품 이상의 당상관 및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의 으뜸벼슬이 각각 2, 3인씩 추천하여 의정부에서 동•서벽(東西壁)과 이조의 당상관의 회의를 거쳐 뽑아 아뢰어 선정(選定)하였음.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청백염근리 [淸白廉謹吏]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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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팽령[ 全彭齡 ]
원본글 출처 전팽령의 묘지(墓誌)
저자 송인(宋寅)
본관 옥천(沃川)
자 : 숙로(叔老)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30 문관(文官)
공(公)의 휘(諱)는 팽령(彭齡)이고, 자(字)는 숙로(叔老)이며, 관향은 옥천 전씨(沃川全氏)이다.
10세조는 전학준(全學浚)으로 벼슬은 동정(同正)을 지냈고, 그 후대에 전유(全侑)라는 분이 있어 벼슬이 민부 전서(民部典書)에 이르렀다. 그 분의 아들 전숙(全淑)은 벼슬이 판도 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으며, 그 뒤 대대로 현귀(顯貴)한 관리들이 배출하였다.
공의 증조(曾祖) 전오례(全五禮)는 대호군(大護軍)을 지냈고, 조고(祖考) 전효순(全孝順)은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선고(先考)는 전응경(全應卿)으로 출사(出仕)하지 않았고, 좌사간(左司諫)을 지낸 김사렴(金士廉)의 손녀(孫女)를 아내로 맞아서 성화(成化) 경자년(庚子年, 1480년 성종 11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난 지 이듬해에 선고를 여의고서 모친에게 의지하여 성장하였으며, 학문에 힘쓰고 글공부를 부지런히 하였다.
홍치(弘治) 갑자년(甲子年, 1504년 연산군 10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가정(嘉靖) 갑신년(甲申年, 1524년 중종 19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형조(刑曹)와 공조(工曹)의 좌랑(佐郞)ㆍ정랑(正郞)을 거쳐 사도시 첨정(司導寺僉正)ㆍ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ㆍ통례원 우통례(通禮院右通禮) 등을 역임하였다. 외임(外任)으로는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 단천 군수(端川郡守)와 삼척(三陟)ㆍ밀양(密陽) 두 곳의 부사(府使)와 상주 목사(尙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는데, 상주에 재임할 때에 조정에서 공이 학행(學行)이 있고 또 청렴하고 근신(謹愼)하다고 여기어 특별히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승진시켜 포상하였으니, 이때가 경술년(庚戌年, 1550년 명종 5년)이었다.
곧이어 병 때문에 벼슬을 그만두고 떠났다가 기미년(己未年, 1559년 명종 14년)에 나이 80세가 된 까닭에 또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승진하여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었다. 그 이듬해 6월에 병이 들어 별세하였고, 8월에 고라산(高羅山)에 있는 선영(先塋) 아래에 장사지냈다.
공은 천성(天性)이 순후(醇厚)하여 자신을 드러냄이 없었으며, 기쁨과 노여움을 기색(氣色)에 드러내지 않았다. 남을 상대할 때에는 한결같이 정성과 신의로써 대하였고, 특히 효도와 우애에 독실하여 제사 때만 되면 반드시 몸소 제수(祭需)를 갖추어 올렸는데, 비록 나이가 늙어 병이 들었을 때에도 그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 형제들과 더불어 재산 관리와 부모 봉양을 함께 하였고, 여러 조카와 손자들을 자기가 낳은 자식과 똑같게 보살펴 주었으며, 살림이 궁색한 사람이나 끼니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어 도와주는 일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관직에 재임할 때에는 근신(謹愼)하게 처신하였고 고을을 다스리는 방식은 너그럽고 간편한 행정을 숭상하였으며, 오로지 덕(德)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키기에 힘썼다. 그런 까닭에 공이 재임한 고을에 비록 혁혁(赫赫)한 칭예(稱譽)는 없었지만 공이 떠나간 뒤에는 항상 인애(仁愛)의 덕(德)을 남긴 것이 있었다.
벼슬길에 나선 지 37년 동안에 네 번이나 주군(州郡)을 맡아서 다스렸는데도 집안에 한 섬 정도의 쌓아 둔 양식 저축이 없었으나 공은 오히려 느긋하고 편안하게 지내었다. 만년(晩年)에는 벼슬을 내던지고 집에 돌아와서 산수(山水)로써 자오(自娛)하였으며, 조정에서 누차 공을 현직(顯職)에 제수하였으나 끝까지 나아가지 않으려고 하였다. 항상 친구들과 서로 즐겁게 유람하며 지냈는데, 거의 십년 동안이나 그렇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공의 선취(先娶)는 생원(生員) 이국형(李國衡)의 딸인데, 1남 전엽(全燁)을 낳았는데, 계묘년(癸卯年, 1543년 중종 38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후취(後娶)는 김축(金軸)의 딸인데, 딸 하나를 낳아서 생원(生員) 정유건(鄭惟謇)에게 시집갔다. 내외손(內外孫) 약간 명은 모두 남자들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팽령 [全彭齡]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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