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9. 13:29ㆍ 인물열전
승정원일기
고종 13년 병자(1876, 광서2)
4월 15일(병자) 맑음
좌목 13-04-15[15]
가주서 최희룡을 개차하고 후임에 전석교를 제수하였다
○ 최희룡이 개차되어 그 대신에 전석교(全錫喬)를 가주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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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19년 임오(1882, 광서8)
6월 4일(무오) 비
좌목 19-06-04[18]
이비의 관원 현황
○ 정사가 있었다. 이비에, 행 판서 민영위(閔泳緯)는 나왔고 참판 박정양(朴定陽)은 패초에 나오지 않았고, 참의 이재덕(李載德)은 나왔고, 우승지 조병직은 나왔다.
송병선(宋秉璿)을 대사헌으로, 임상호(任尙鎬)를 대사간으로, 박종선(朴鍾善)을 집의로, 민치량(閔致亮)을 사간으로, 정국현(鄭國鉉)ㆍ남정기(南廷綺)를 장령으로, 백규섭(白奎燮)ㆍ김상익(金商翼)을 지평으로, 안우량(安雨良)을 헌납으로,
전석교(全錫喬)ㆍ송관옥(宋琯玉)을 정언(주1)으로, 서상조(徐相祖)를 교리로, 윤영식(尹榮植)을 부수찬으로, 김영수(金永壽)를 홍문관 제학으로, 심이택(沈履澤)을 동지춘추관사로, 김수현(金壽鉉)을 혜민서 제조로, 임치재(任穉宰)를 장악원 주부로, 민영소(閔泳韶)를 주서로 삼았다.
겸 광주유수에 이최응(李最應)을 단부하고 봉상시 봉사에 이두진(李斗鎭)을 단부하였으며, 학록에 백시순(白時淳)을 단부하였다. 전 첨사 하정일(河靖一)에게 지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가자하고 전 오위장 민치도(閔致稻), 한석윤(韓錫胤), 윤동선(尹東善), 김진영(金鎭纓)에게 지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가자하였는데, 조관(朝官)으로서 나이가 80세 된 사람에게 정해진 규식대로 가자(加資)한 것이다. 돈녕부 도정 윤태승(尹泰昇), 송일찬(宋一瓚), 이신엽(李信燁), 신범행(申範行), 이태영(李泰榮), 윤창배(尹昌培), 성해용(成海瑢), 유영흠(柳榮欽), 윤강석(尹剛錫), 최인로(崔仁魯), 윤경(尹璥), 홍재범(洪在範), 유병정(劉秉鼎)을 감하(減下)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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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6년 기축(1889, 광서15)
12월 12일(계미) 맑음
좌목 26-12-12[14]
이비가 2차 정사에서 김이려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이비가 2차 정사를 하였다. 김이려(金履麗)를 돈녕부 도정으로, 정세원(鄭世源)을 사복시 정으로 삼았다.
전석교(全錫喬)를 전적(주2)으로 삼고, 또 민영석(閔泳錫)을 전적으로 삼았다.
윤우식(尹雨植)을 남학 교수(南學敎授)로, 김우근(金禹根)을 사옹원 주부로, 심상로(沈相老)를 별제로, 백의행(白義行)을 직강으로, 박돈양(朴敦陽)을 선공감 별제로, 우동건(禹東建)을 의금부 도사로, 최영제(崔榮綈)를 의녕원 수봉관(懿寧園守奉官)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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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7년 경인(1890, 광서16)
11월 24일(경인) 맑음
좌목 27-11-24[27]
김석근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김석근(金晳根)을 대사헌으로, 성대영(成大永)을 대사간으로, 이범찬(李範贊)을 집의로, 정한모(鄭翰謨)를 사간으로,
정승현(鄭承鉉)을 장령으로, 전석교(全錫喬)를 장령(주3)으로, 이인근(李寅根)ㆍ김석렬(金錫烈)을 지평으로, 윤충구(尹忠求)를 헌납으로, 이명구(李命九)ㆍ윤희영(尹禧永)을 정언으로,
김병억(金秉億)을 교리로, 신대균(申大均)을 부교리로, 신병휴(申炳休)를 부수찬으로, 이숙회(李淑會)를 동지돈녕부사로, 윤성진(尹成鎭)을 공조 참판으로, 김천수(金天洙)를 돈녕부 도정으로, 조병필(趙秉弼)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홍문관정자 겸 설서에 오정근(吳正根)을 단부하였다. 전보국 주사 정재진(鄭載鎭)과 제중원 주사 김규찬(金奎贊)을 서로 바꾸었는데, 서로 바꾸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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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7년 경인(1890, 광서16)
11월 29일(을미) 맑음
좌목 27-11-29[23]
헌납에 전석교를 낙점하였다
○ 대간의 전망 단자를 들이니, 헌납(주4)에 전석교(全錫喬), 장령에 고의상(高儀相)을 낙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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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8년 신묘(1891, 광서17)
1월 1일(병인) 맑음
좌목 28-01-01[48]
민병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민병한(閔丙漢)을 필선으로, 이성렬(李聖烈)을 문학으로, 송태헌(宋台憲)을 응교로, 윤충구(尹忠求)를 수찬으로, 김재용(金在容)을 동지돈녕부사로, 이용직(李容稙)을 형조 참판으로, 홍승헌(洪承憲)을 공조 참판으로, 임희상(林羲相)을 호조 참의로, 정규회(丁奎會)를 병조 참의로, 윤기진(尹起晉)을 병조 참지로, 이용선(李容善)을 형조 참의로, 윤우식(尹雨植)을 대사성으로,
장영직(張榮稷)을 좌통례로, 전석교(全錫喬)를 우통례(주5)로, 민병한(閔丙漢)을 상례로 삼았다. 부호군 민종식(閔宗植), 전 승지 이용직(李容稙)ㆍ홍승헌(洪承憲), 이상에게 지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가자하고, 이조 정랑 윤우식(尹雨植), 수찬 임희상(林羲相), 좌통례 정규회(丁奎會), 우통례 윤기진(尹起晉), 상례 이용선(李容善), 이상에게 지금 통정대부(通政大夫)를 가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에 홍승헌(洪承憲)을 단부하고, 분봉상시 주부(分奉常寺主簿)에 장한원(張翰源)을 단부하고, 직장(直長)에 최상영(崔象永)을 단부하고, 분교관(分敎官)에 이상은(李相殷)을 단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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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8년 신묘(1891, 광서17)
1월 26일(신묘) 맑음
좌목 28-01-26[16]
2차 정사에서 김영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이비가 2차 정사를 하였다. 김영철(金永哲)을 지경연사로, 이건하(李乾夏)를 지춘추관사로,
전석교(全錫喬)ㆍ강영기(姜永祺)를 직강으로, 오영탁(吳濚鐸)ㆍ이철우(李喆宇)ㆍ고기승(高基升)을 전적으로, 박형래(朴馨來)를 제용감 별제로 삼았다. 분교관에 김종덕(金鍾德)을 단부하였다. 휘경원 참봉(徽慶園參奉) 조윤희(趙胤煕)와 사릉 참봉(思陵參奉) 이교필(李敎弼)을 서로 바꾸었는데, 이상은 서로 바꾸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좌윤에 이종필(李種弼)을 단부하고, 우윤에 홍종대(洪鍾大)를 단부하였다.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주1)
정언[ 正言 ]
정의
조선시대 사간원(司諫院)의 정6품 관직.
내용
정원은 2인이다. 1392년(태조 1) 7월의 신반관제(新頒官制)는 고려의 관제를 습용(襲用)한 것이므로 사간원의 전신인 낭사(郎舍)의 간관(諫官) 11인 중 좌우습유(左右拾遺) 각 1인이 있어 정6품이었는데, 이 습유가 뒤에 정언으로 바뀐 것이다.
낭사는 문하부(門下府)의 속아문(屬衙門)으로서 간관의 직무를 가지고 사헌부와 더불어 대간(臺諫)을 구성하고 있었다. 1401년(태종 1) 7월 문하부를 혁파하고 의정부를 강화할 때 문하부 낭사는 사간원으로 독립하였다. 이 때 습유가 정언으로 개정되었으며, 간관의 정원은 7인으로 줄었다.
1460년(세조 6) 5월 한재가 너무 심하여 용관(冗官)을 없앨 때 사간 1인, 헌납 2인, 정언 1인을 혁파함으로써 간관은 3인으로 대폭 줄게 되었다. 그러나 1463년 7월 사간원의 사무가 너무 번다하다는 주장이 있어서 헌납 1인을 복설하였으며, 1470년(성종 1)에는 또 정언 1인을 증원하여 사간원의 정원은 5인으로 고정되었다.
국초에는 정언이 2인으로 좌우 각 1인이 있어 좌정언·우정언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나 『경국대전』에는 그저 정언 2인으로만 기재되어 있다.
참고문헌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조선초기(朝鮮初期)의 언관언론(言官·言論) 연구(硏究)』 (최승희, 서울대학출판부)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정언 [正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주2)전적[ 典籍 ]
조선시대 성균관(成均館)에 둔 정육품(正六品) 관직으로 정원은 13원이다.
위로 지사(知事: 正二品)가 1원으로 대제학(大提學)이 정례대로 겸직하며, 동지사(同知事: 從二品) 2명, 대사성(大司成: 正三品), 좨주(祭酒: 正三品), 사성(司成: 從三品) 각 1원, 사예(司藝: 正四品) 2원, 사업(司業: 正四品) 1원, 직강(直講: 正五品) 4원이 있고, 아래로 박사(博士: 正七品), 학정(學正: 正八品), 학록(學錄: 正九品), 학유(學諭: 從九品) 각 3원씩 있다. 대사성 이하 성균관에 소속된 관원을 총칭하여 관직(館職)이라고 하였다.
조선건국 직후 성균관의 직제는 고려시대의 직제가 그대로 이어졌으며, 전부(典簿: 正六品) 1원을 두었다. 1401년(태종 1) 7월 직제의 일부가 개정되어 전부를 주부(主簿: 正六品)로 개칭하였다. 1466년(세조 12) 1월 관제개혁 때 주부를 전적(典籍)으로 바꾸면서 정원이 13원으로 증원되었고, 전적은 도적(圖籍)의 수장(收藏)과 출납·관리의 일을 맡았다. 전적의 관장 하에 성균관의 분장(分掌)인 추쇄색(推刷色)과 공방(工房)이 있었다.
종학(宗學)의 전훈(典訓: 正五品) 이하를 사예(司藝: 正四品)·직강(直講: 正五品)·전적이, 경국대전에는 양현고(養賢庫)의 주부를 전적이, 사학(四學)에서는 전적 이하 20명이 사학훈도(四學訓導)를 겸하고 있는 것 등으로 보아 겸직이 많았다. 대전회통에서는 정원의 4원이 승문원의 참외관(參外官: 從八品)이 겸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대전회통(大典會通)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전적 [典籍] (관직명사전, 2011. 1. 7., 한국학중앙연구원)
(주3)장령[ 掌令 ]
조선시대 사헌부(司憲府)의 정사품(正四品) 관직으로 정원은 2원이다. 감찰(監察) 업무를 담당하였다.
1401년(태종 1)에 시사(侍史)를 고친 이름으로 장헌시사(掌憲侍史)라 하고, 대사헌(大司憲: 從二品) 이하 집의(執義: 從三品)·장령·지평(持平: 正五品)까지의 사헌부 소속의 관원을 통칭 대관(臺官)이라고 하였으며, 또 장령과 지평을 별칭 대장(臺長)이라고 하였으며,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이 뛰어나 이조(吏曹)에서 대관(臺官)으로 추천(推薦)된 사람을 남대(南臺)라고 하였다.
모든 대관은 사헌부의 청환직(淸宦職)으로, 문과 급제자 중 청렴 강직하여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옳다고 믿는 바를 굽히지 않고 직언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하므로, 승문원(承文院), 성균관(成均館), 홍문관(弘文館) 등을 거친 젊고 기개가 있는 인재들이 임명되었는데, 그만큼 직무가 막중하기 때문이었다. 이조(吏曹)의 전랑(銓郞)과 함께 전 조선시대의 사족사회(士族社會)의 틀을 지탱하는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대전회통(大典會通)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장령 [掌令] (관직명사전, 2011. 1. 7., 한국학중앙연구원)
(주4)헌납[ 獻納 ]
조선시대 사간원(司諫院)의 정오품(正五品) 관직으로 정원은 1원이다. 위로 대사간(大司諫: 正三品 堂上), 사간(司諫: 從三品) 각 1원이 있고, 아래로 정언(正言: 正六品) 2원이 있다.
1401년(태종 1)에 국초(國初)부터 있었던 문하부(門下府)의 낭사 벼슬인 보궐(補闕: 正五品)을 고친 이름이다. 문하부가 의정부(議政府)로 흡수되고 낭사가 사간원으로 독립할 때 보궐을 헌납이라고 하였다. 처음에 좌·우헌납 각 1명을 두었으나 후에 1명으로 줄였다.
간관으로서 국왕에 대한 간쟁(諫諍)과 봉박(封駁)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실제 임무는 이에 제한되지 않고 사간원의 다른 관료 및 사헌부(司憲府)·홍문관(弘文館)의 관료와 함께 간쟁·탄핵·시정(時政)·인사 등에 대한 언론과 경연(經筵)·서연(書筵)의 참여 및 인사 문제와 법률 제정에 대한 서경권(署經權), 국문(鞫問) 및 결송(決訟) 등에 참여하였다.
참고문헌
대전회통(大典會通)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헌납 [獻納] (관직명사전, 2011. 1. 7., 한국학중앙연구원)
(주5)우통례[ 右通禮 ]
조선시대 의례(儀禮)를 담당하던 통례원(通禮院)에 두었던 정삼품(正三品) 당하관(堂下官)직으로 정원은 1원이다. 좌통례(左通禮) 다음의 벼슬로, 대가(大駕)를 인도(引導)하였다.
통례원은 조하(朝賀)·제사·찬알(贊謁) 등의 예식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겸판통례문사(兼判通禮門事)가 1466년(세조 12) 1월 관제개정 때 각각 좌통례·우통례로 개칭된 것이다.
통례원의 관원은 정삼품 당하관인 좌·우통례 각 1원, 상례(相禮: 從三品), 봉례(奉禮: 正四品), 찬의(贊儀: 正五品) 각 1원, 인의(引儀: 從六品) 8원이며, 이속으로 서리(書吏) 8명을 두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익례(翊禮: 從三品) 1원, 겸인의(兼引儀: 從九品)와 가인의(假引儀: 從九品)를 6원씩 증원했으며 관원은 식순과 홀기(笏記)를 잘 부르는 목청이 좋은 자를 뽑았다.
좌통례가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좌통례에 결원이 되면 근무일수와 상관없이 우통례를 좌통례로 승진시켰다. 원래 통례원의 좌통례·우통례와 봉상시·사복시의 행수관(行首官), 승문원의 판교(判校)만이 근무일수가 차면 당상관으로 올려주도록 되어 있었으나, 그 수가 많아 문제가 발생하자 통례원의 통례와 승문원 판교의 경우에만 당상관으로 승급시켜 주도록 했다. 이 규정이 그대로 경국대전에 실렸다. 대전통편에서는 우통례가 승격 임명되면 재직한 일수를 통산하여 임기가 차야 당상관으로 승품(陞品)했다. 우통례는 이처럼 좌통례를 역임한 후에야 당상관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1894년(고종 31) 1차 내정개혁으로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대전회통(大典會通)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우통례 [右通禮] (관직명사전, 2011. 1. 7.,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석교(全錫喬)
[문과] 고종(高宗) 13년(187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5위(8/44)
[인물요약]
생년 정미(丁未) 1847년(헌종 13)
합격연령 30세
본관 옥천(沃川)
거주지 옥천(沃川)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44명
전력 유학(幼學)
[가족사항]
[부]
성명 : 전효승(全孝昇)
[조부]
성명 : 전응로(全應魯)
[증조부]
성명 : 전헌(全櫶)
[외조부]
성명 : 김방(金坊)
[출전]
『국조방목(國朝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貴 11655])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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