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일기 고찰 [전순기(全舜基)]

2015. 10. 11. 14:21 인물열전

 




승정원일기

고종 17년 경진(1880, 광서6)

729(을미) 맑음

좌목 17-07-29[106]


최병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최병선(崔炳善)을 훈련원 첨정으로, 최병순(崔昞淳)을 미전 첨사(美錢僉使), 이학준(李學俊)을 덕진 만호(德津萬戶), 이기석(李基碩)을 회령포 만호(會寧浦萬戶), 김형국(金亨國)을 방산 만호(方山萬戶), 강윤(姜潤)을 동지로, 이경(李坰)을 충익위장으로, 민준호(閔俊鎬)이규상(李奎象)을 훈련원 주부로, 김한기(金漢基)를 금정 별장(金井別將)으로, 박치룡(朴致龍)김우원(金宇源)배한정(裴漢廷)신영덕(辛暎德)최형점(崔亨漸)을 오위장으로, 이교춘(李敎春)정환요(鄭煥堯)이조영(李祖永)최경선(崔敬善)을 오위장으로, 이병우(李秉禹)를 도총부 경력으로, 김치영(金致韺)조희명(趙羲明)을 충장위장으로, 백낙균(白樂均)을 도총부 도사로, 조희빈(趙熙斌)을 중추부 도사로, 이희성(李熙城)을 부장으로, 박희동(朴羲東)홍영철(洪永哲)을 경복궁 위장으로, 전순기(全舜基)성면호(成冕鎬)를 경희궁 위장으로, 김흥주(金興珠)를 훈련원 주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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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18년 신사(1881, 광서7)

75(을축)

좌목 18-07-05[30]


이종관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이종관(李鍾觀)을 내금위장으로, 백남석(白南奭)장우철(張禹喆)오정현(吳鼎鉉)한동혁(韓東赫)엄주철(嚴柱哲)을 오위장으로, 이강현(李康鉉)을 충장위장으로,

전순기(全舜基)를 경복궁 위장으로, 이봉우(李鳳祐)를 경희궁 위장으로, 손항원(孫恒源)을 수문장으로, 이용익(李容益)을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윤홍대(尹弘大)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윤양계(尹養桂)를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삼고, 동지에 송심기(宋心琦)를 단부하였고, 첨지 세 자리에 조규호(趙圭鎬)남효원(南斅元)최석균(崔錫均)을 단부하고, 훈련원 첨정 가설직에 이규성(李奎聖)을 단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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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1년 갑오(1894, 개국503)

727(신축)

좌목 31-07-27[16]


총어영 별장 등이 개차되었으므로 후임에 대한 단망을 들인다는 군무아문의 계


또 군무아문의 말로 아뢰기를,

총어영의 별장, 천총, 기사장, 초관이 이미 개차되었으니, 그 대임에 대한 단망(單望)을 후록(後錄)하여 삼가 어람하시도록 올립니다.”

하니, 총어영 우별장(摠禦營右別將) 이규태(李圭泰)를 개차하고 그 대신에 행 호군 이민긍(李敏兢), 총어영 우부천총(摠禦營右部千摠) 이선재(李璿載)를 개차하고 그 대신에 행 부호군 이기주(李起周), 총어영 좌1번 기사장(摠禦營左一番騎士將) 조우영(趙祐永)을 개차하고 그 대신에 군산 첨사(群山僉使) 신영희(申永熙), 총어영 좌2번 기사장 문시양(文時陽)을 개차하고 그 대신에 나주 영장(羅州營將) 이원우(李源佑), 총어영 좌3번 기사장 허전(許琠)을 개차하고 그 대신에 황해 중군(黃海中軍) 이민조(李敏祚),

총어영 우2번 기사장(摠禦營右二番騎士將)(1) 조희문(趙羲聞)을 개차하고 그 대신에 안흥 첨사(安興僉使) 전순기(全舜基), 총어영 우3번 기사장 김남준(金南玧)을 개차하고 그 대신에 종성 부사(鍾城府使) 김영호(金榮浩), 총어영 체아 초관(摠禦營遞兒哨官) 박우동(朴禹東)을 개차하고 그 대신에 전 주부(主簿) 강인필(姜仁必), 총어영 체아 초관 김종식(金鍾植)을 개차하고 그 대신에 급제(及第) 김기영(金基泳)을 단부하고 계자인을 찍었다.





(1)기사장[ 騎士將 ]

조선시대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에 둔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 서반 무관직이다.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이들 두 영에서는 기사별장(騎士別將) 아래 3명의 기사장을 두어, 150명의 기사를 지휘 감독하게 하였다. 금위영은 처음에는 기사장을 두지 않았으나, 1746(영조 22)에 기병인 별효위(別驍衛)를 향기사(鄕騎士)로 개편하면서 이전에 별효위를 관장하던 초관(哨官)을 금군장(禁軍將)의 예에 따라서 기사장으로 이름을 바꾸어 승격시켰다. 인원은 5원에서 4원으로 했고 영장(營將)을 거친 자를 임명했으며 교대 연한은 1년이었다. 그 뒤 향기사를 경기사(京騎士)로 대체하면서, 그 수를 어영청과 마찬가지로 3원으로 했다. 1791(정조 15)에는 서얼(庶孽)과 중인(中人) 가운데서도 기사장을 임명하도록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사장 [騎士將] (관직명사전, 2011. 1. 7.,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