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일기 고찰 [전봉달(全鳳達)]

2015. 10. 15. 10:16 인물열전




승정원일기

고종 25년 무자(1888, 광서14)

420(신축) 맑음

좌목 25-04-20[18]


윤치성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윤치성(尹致聖)을 대사헌으로, 서상봉(徐相鳳)을 대사간으로, 김사철(金思轍)을 집의로, 송순탁(宋淳鐸)한영석(韓永錫)을 지평으로, 민영서(閔泳序)를 정언으로, 정규섭(鄭圭燮)을 부응교로, 윤철배(尹喆培)를 교리로, 강일형(姜日馨)을 부수찬으로, 원우상(元禹常)을 판윤으로, 오중묵(吳重黙)을 동지돈녕부사로, 김홍규(金弘圭)를 형조 참판으로, 김종한(金宗漢)을 좌윤으로, 이원일(李源逸)을 우윤으로, 이승윤(李承潤)을 돈녕부 도정으로, 윤정구(尹定求)를 형조 참의로, 강찬()을 공조 참의로, 선준채(宣俊采)를 형조 좌랑으로,

김홍기(金洪基)전봉달(全鳳達)을 감찰(1), 한승문(韓承文)을 영양 현감으로 삼았다.

전적(典籍)에 김의수(金懿秀)를 단부하였는데, 문과 갑과(甲科) 1인이다. 봉상시 직장 가설에 이장섭(李章燮)을 단부하였는데 문과 갑과 제2인이고, 이최승(李㝡承)을 단부하였는데 문과 갑과 제3인이다. 상서원 별제 가설에 장석조(張錫祚)를 단부하였는데, 무과 갑과 제일인이다. 충청 감사에 민영상(閔泳商)을 단부하였는데, 1년에 한하여 잉임시키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춘천 유수에 김기석(金箕錫)을 단부하였는데, 하비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전 오위장(五衛將) 김성여(金成汝), 첨지 민교현(閔敎顯)에게 지금 가선대부를 가자하고, 전 감찰 이국언(李國彦)이인식(李仁植)한종영(韓宗英), 수봉관 김원택(金元澤), 이상에게 지금 통정대부를 가자하였는데, 조관(朝官)으로서 나이 80세가 된 사람에게 법전에 따라 가자한 것이다.




(1)감찰[ 監察 ]


조선시대 사헌부의 종6품 관직.


내용

관리들의 비위 규찰, 재정 부문의 회계 감사, 의례 행사 때의 의전 감독 등 감찰 실무를 담당하였다. 고려시대 어사대의 감찰어사 직을 계승한 것이다.

1392(태조 1) 7월 조선 개국 직후의 관제 제정 때 20인을 정원으로 했다가, 1401(태종 1)25인으로 증원하였다.

그 가운데 일부는 다른 관원으로 겸직시켰으나, 1455(세조 1)에 모두 실직화(實職化)하고 1인을 감원해 24인을 정원으로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문관 3, 무관 5, 음관 5인으로 13인만 두었다.

이들은 맡은 업무가 본래 광범위하고, 때로는 지방관의 비위를 조사하기 위해 분대(分臺 : 암행어사의 전신으로 행대(行臺)라고도 함)라는 이름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또 각 관서의 청대(請臺 : 회계감사의 요청)에 응해야 하며, 수많은 의전 행사에 감독 임무를 맡아야 했기 때문에 다른 관직에 비해 많은 인원이 배정되었다.

청대에 나가는 것은 대표적인 감찰 직무였다. 초기에는 모든 관서가 연말 업무 마감 전에 이를 행하도록 했으나, 후기에는 군자감·광흥창·봉상시·장흥고 등 재정담당 부서에서만 하게 되었다.

감찰이 청대에 나서면 해당관서의 관리들과 엄숙한 예를 거행하고 난 뒤, 장부와 창고의 현물을 대조, 확인한 다음 장부에 서명하고 창고에는 봉인을 붙였다.

사헌부의 관원으로 탄핵·서경(署經간쟁 등의 대간 업무에는 참여하지 못했으나 요직으로 간주되어 명망있는 인물들이 임명되었고, 다른 관원들이 함부로 침범할 수 없도록 지위를 보장하였다.

, 그들만이 입식(笠飾 : 갓 장식)에 수정 정자(頂子)를 붙이고, 조복의 관()에 해치(獬豸 : 옳은 일과 그른 일을 분간해 선인(善人)을 보호하고 악인을 미워한다는 뿔이 하나 달린 전설의 동물로 해태라고도 함)를 부착하는 등 법관으로서의 권위를 부여받았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조선초기(朝鮮初期)의 언관·언론연구(言官·言論硏究)(최승희, 서울대학교한국문화연구소, 1976)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감찰 [監察]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