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21. 22:52ㆍ 인물열전
승정원일기
고종 2년 을축(1865, 동치4)
10월 1일(임진) 맑음
좌목 02-10-01[26]
2차 정사에서 예조 정랑에 전재봉을 제수하였다
○ 2차 정사를 하였다. 전재봉(全在鳳)을 예조 정랑(주1)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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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년 병인(1866, 동치5)
2월 28일(무오) 맑음
좌목 03-02-28[16]
이비의 관원 현황
○ 정사가 있었다. 이비(吏批)에, 행 판서 조득림(趙得林)은 나왔고, 참판 최우형(崔遇亨)은 나왔고, 참의는 아직 차임되지 않았고, 우부승지 정기회(鄭基會)는 나왔다.
남종순(南鍾順)을 이조 참의로, 김병덕(金炳德)을 대사헌으로, 김성근(金聲根)을 집의로, 조강하(趙康夏)ㆍ권응선(權膺善)을 장령으로, 양상기(梁相器)ㆍ전재봉(全在鳳)을 지평으로,
조용하(趙用夏)를 부수찬으로, 조연창(趙然昌)을 좌참찬으로, 강시영(姜時永)을 판의금부사로, 민규호(閔奎鎬)ㆍ서신보(徐臣輔)를 분승지로, 오준영(吳俊泳)을 분병조 참의로, 이병교(李炳敎)를 분병조 참지로, 홍종학(洪鍾學)을 사옹원 정으로, 신석연(申錫淵)을 분병조 정랑으로, 이우회(李友會)를 좌랑으로, 이재원(李載元)을 분내의원 제조로, 임백영(任百泳)을 가감역관으로, 이학래(李鶴來)를 서부 도사(西部都事)로 삼았다. 가례 정사(嘉禮正使)에 판돈녕부사 이경재(李景在)를 단부하고, 부사에 민치구(閔致久)를 단부하였으며, 교서관 정자 두 자리에 정원시(鄭元時)와 이학년(李學年)이었고, 성균관 박사 두 자리에 진창복(晉昌復)과 김상래(金尙萊)를 단부하였으며, 학록(學祿)에 한성근(韓聖根)을 단부하고, 양현고 봉사에 김정섭(金鼎燮)을 단부하였다. 봉상시 부봉사 김현묵(金顯默)과 호군 김익문(金益文)에게 지금 자헌대부(資憲大夫)를 초자하였고, 개성 유수 이승보(李承輔)에게 지금 자헌대부(資憲大夫)를 가자하였으며, 호군 이풍익(李豐翼)ㆍ송정화(宋廷和)ㆍ조귀하(趙龜夏)에게 지금 자헌대부(資憲大夫)를 초자하였다. 이상은 정경(正卿)으로 승진 발탁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통제 중군 심의풍(沈宜豐)에게 지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가자하고, 유학(幼學) 이거제(李巨濟)에게 지금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초자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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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년 병인(1866, 동치5)
11월 26일(신사) 맑음
좌목 03-11-26[04]
집의에 권종록을 낙점하였다
○ 대간의 전망 단자를 들이니, 집의에 권종록(權鍾祿), 장령에 조성학(趙性鶴),
지평에 전재봉(全在鳳)ㆍ성하경(成夏慶), 헌납에 조석만(曺錫萬), 정언에 이신국(李愼國)을 낙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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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2년 을유(1885, 광서11)
2월 24일(갑오) 맑음
좌목 22-02-24[17]
이만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이만현(李晚鉉)을 교리로, 이교익(李喬翼)을 공조 판서로, 성길호(成吉鎬)를 동지돈녕부사로, 민병석(閔丙奭)을 호조 참판으로, 이만직(李萬稙)을 우윤으로, 강재호(姜在滈)를 돈녕부 도정으로, 이범진(李範晉)을 병조 참의로, 이우면(李愚冕)을 공조 참의로, 이인명(李寅命)을 판의금부사로, 민영환(閔泳煥)을 지의금부사로, 민병석(閔丙奭)ㆍ이승오(李承五)ㆍ신헌구(申獻求)를 동지경연사로, 이봉구(李鳳九)를 동지춘추관사로, 조강하(趙康夏)를 동지성균관사로, 신석연(申錫淵)을 사복시 정으로, 오상현(吳尙鉉)을 장악원 정으로,
전재봉(全在鳳)을 병조 정랑으로, 엄석관(嚴錫瓘)을 좌랑으로, 서우순(徐佑淳)을 경모궁 영(景慕宮令)으로, 우성규(禹成圭)를 경기전 영(慶基殿令)으로, 최광재(崔光在)를 감찰로, 이정익(李政翼)을 빙고 주부(氷庫主簿)로, 이응달(李應達)을 인의로, 장석유(張錫裕)를 중학 교수로, 김희수(金喜洙)를 서학 교수로, 김상봉(金商鳳)을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정주영(鄭周永)을 진도 부사(珍島府使)로, 이희익(李憙翼)을 무장 현감(茂長縣監)으로, 이주필(李周弼)을 함평 현감(咸平縣監)으로 삼았다. 양현고 직장(養賢庫直長)에 임현주(林顯周)를 단부하였다. 안기 찰방(安奇察訪) 안윤명(安潤明)은 한 번의 임기에 한하여 잉임시킬 것으로 전지를 받들었고, 이인 찰방(利仁察訪) 김제무(金濟懋)는 우선 잉임시킬 것으로 전지를 받들었다. 전 오위장 남정혁(南廷爀)과 김시원(金時元)에게 이번에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가자(加資)하고, 직장 김규홍(金圭鴻), 감역관 심능석(沈能晳)ㆍ안하석(安河錫)ㆍ석준옥(石俊玉)ㆍ조희태(趙羲泰)ㆍ이순길(李順吉), 도사 최규성(崔奎成)ㆍ김지수(金持秀)ㆍ최원호(崔元浩)에게 이번에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초자(超資)하였는데, 조관(朝官)으로서 나이가 80세이므로 법전에 따라 가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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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3년 병술(1886, 광서12)
3월 29일(임술) 맑음
좌목 23-03-29[29]
김승주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김승주(金升周)를 돈녕부 도정으로, 조병식(趙秉式)을 동지의금부사로, 전재봉(全在鳳)을 예조 좌랑으로, 신정균(申政均)을 전적으로, 이준용(李埈鎔)을 대교로 삼았다.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주1)예조정랑[ 禮曹正郞 ]
조선시대 예조(禮曹)에 둔 정오품(正五品) 관직으로 정원은 3원이다. 위로 예조판서(禮曹判書: 正二品), 예조참판(禮曹參判: 從二品), 예조참의(禮曹參議: 正三品 堂上) 각 1원이 있고, 아래로 예조좌랑(禮曹佐郞: 正六品) 3원이 있다.
예조정랑을 지낸 사람은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제수 받을 수 없었다. 정랑의 관장(管掌) 하에 계제사(稽制司), 전향사(典享司), 전객사(典客司) 등의 분장(分掌)이 있었다.
참고문헌
대전회통(大典會通)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예조정랑 [禮曹正郞] (관직명사전, 2011. 1. 7.,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재봉(全在鳳)
[문과] 철종(哲宗) 12년(18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4위(34/56)
[인물요약]
생년 갑오(甲午) 1834년(순조 34)
합격연령 28세
본관 성주(星州)
거주지 강화(江華)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56명
전력 유학(幼學)
[가족사항]
[부]
성명 : 전영목(全榮穆)
[조부]
성명 : 전언복(全彦福)
[증조부]
성명 : 전성겸(全性謙)
[외조부]
성명 : 한응혁(韓膺爀)
[출전]
『국조방목(國朝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貴 11655])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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