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18. 22:26ㆍ 인물열전
승정원일기
고종 25년 무자(1888, 광서14)
8월 11일(경인) 맑음
좌목 25-08-11[19]
2차 정사에서 민우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이비가 2차 정사를 하였다. 김규식(金奎軾)을 공조 참의로, 이은용(李垠鎔)을 서학 교수로, 한상현(韓象鉉)을 의릉 봉사(義陵奉事)로, 심형택(沈馨澤)을 광릉 참봉(光陵參奉)으로, 윤기선(尹夔善)을 장릉 참봉(章陵參奉)으로, 고재욱(高載旭)을 상운 찰방(祥雲察訪)으로,
전상필(全尙弼)을 고산 찰방(高山察訪)(주1)으로 삼았다.
전적에 송종오(宋鍾五)를 단부하였는데, 문과 갑과(甲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한 사람이다. 관북 서기관(關北書記官) 김하영(金夏英)과 교섭아문 주사(交涉衙門主事) 송달현(宋達顯)을 서로 바꾸었는데, 서로 바꾸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원산항 서기관(元山港書記官) 박희로(朴羲㳣)는 그 직책을 잉임시키고 승륙(陞六)하라는 전지를 받들었다.
(주1)찰방[ 察訪 ]
조선시대 각 도(道)의 역참(驛站)을 관장하던 문관(文官) 종육품(從六品) 외관직(外官職)이다.
서울을 중심으로 각 지방에 이르는 중요한 도로에 마필(馬匹)과 관명(官員)을 두어, 공문서(公文書)를 전달하고 공용여행자(公用旅行者)에게 숙소제공·마필공급 등 편리를 도모하는 기관(機關)을 역참이라 하였는데, 약간의 역참(驛站)을 1구(區)로 하여 이를 역도(驛道)라 칭하고, 그 구간의 마정(馬政)을 맡아보는 관직(官職)을 마관(馬官)이라 하여, 교통로(交通路)를 이용하여 정보수집(情報蒐集)도 하였는데 고려 후기부터 역승(驛丞)이라고 하다가 1535년(중종 30)부터 찰방(察訪)이라고 개칭하였다.
경국대전에 보면 조선 초기 전국에 23명의 찰방과 18명의 역승(驛丞)을 두어 총 537역을 관장케 했는데, 1535년(중종 30)에는 역승을 없애고 전국의 큰 역에 40명의 찰방을 두고 이를 찰방역이라 하였다.
경기도(京畿道)에 6원, 충청도(忠淸道)에 5원, 경상도(慶尙道)에 11원, 전라도(全羅道)에 6원, 황해도(黃海道)에 3원, 강원도(江原道)에 4원, 함경도(咸鏡道)에 3원, 평안도에 2원을 두었다. 작은 역에는 역장을 두어 찰방이 이를 관장하였는데, 중요한 요소에는 겸찰방(兼察訪) 12원을 두어 찰방의 비행(非行)을 감시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대전회통(大典會通)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찰방 [察訪] (관직명사전, 2011. 1. 7., 한국학중앙연구원)
(주1)고산[ 高山 ]
전라북도 완주와 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옛 지명.
[네이버 지식백과] 고산 [高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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