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22. 21:21ㆍ 인물열전
승정원일기
고종 14년 정축(1877, 광서3)
12월 20일(경자) 맑음
좌목 14-12-20[53]
맹조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맹조술(孟祖述)을 동지중추부사로, 백낙훈(白樂薰)ㆍ서재풍(徐載豐)을 선전관으로, 민영국(閔泳國)을 도총부 도사로, 이용익(李容益)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송지수(宋芷洙)ㆍ이민초(李敏初)ㆍ오학민(吳學敏)을 오위장으로, 권치호(權致鎬)를 훈련원 주부로, 심원택(沈遠澤)을 충주 영장으로, 유기동(柳冀東)을 경기 중군으로, 구광서(具光書)를 함경 중군으로, 서광승(徐光承)을 황해 중군으로, 정원기(鄭元基)를 통제영 우후로, 정계량(鄭季良)ㆍ하우용(河禹容)을 오위장으로, 김정근(金廷根)을 충익위장으로, 이중칠(李重七)을 문신겸선전관으로, 김창섭(金昌燮)을 수문장으로, 김우균(金羽均)을 문신겸선전관으로, 이병세(李秉世)를 어영청 파총으로, 송인찬(宋仁纘)을 전라 감영 중군으로, 김상진(金商鎭)을 전라도 병마우후로, 김시점(金始漸)을 전라우도 수군우후로, 김명구(金命求)를 훈련원 정으로, 이상덕(李相德)을 선전관으로, 서재풍을 훈련원 판관으로, 조유증(趙有增)을 훈련원 주부로, 이용식(李龍植)을 수문장으로, 김창기(金昌基)ㆍ이태원(李泰元)ㆍ국문영(鞠文榮)을 오위장으로, 서재풍을 도총부 경력으로, 이항의(李恒儀)를 경상좌도 병마우후로, 임학준(任學準)ㆍ유희정(劉熙鼎)을 오위장으로, 홍경섭(洪駉燮)을 충익위장으로, 이동섭(李東燮)을 훈련원 첨정으로, 이주혁(李柱赫)을 훈련원 판관으로, 양주현(梁柱顯)을 선전관으로, 이병세ㆍ이규증(李圭曾)을 훈련원 부정으로, 이재헌(李載憲)을 훈련원 판관으로, 장우철(張禹喆)을 훈련원 주부로, 정성태(鄭聖泰)ㆍ이기홍(李起弘)ㆍ오정현(吳鼎鉉)을 오위장으로, 양성근(梁成根)ㆍ김귀진(金龜鎭)을 경복궁 위장으로, 김정주(金廷柱)를 동지중추부사로, 김상질(金尙質)을 부장으로, 이민석(李敏奭)ㆍ홍필유(洪必裕)를 어영청 파총으로, 오홍묵(吳宖默)을 수문장으로, 안교원(安敎源)ㆍ이원근(李元根)을 오위장으로, 오현묵(吳玄默)ㆍ박봉구(朴鳳九)를 경희궁 위장으로, 이진황(李晉璜)을 수문장으로, 이긍한(李肯漢)ㆍ구연긍(具然肯)ㆍ김귀희(金龜喜)를 훈련원 첨정으로, 한우섭(韓友燮)을 다대포 첨사(多大浦僉使)로, 김기휴(金沂休)를 격포 첨사(格浦僉使)로, 방윤승(方允升)을 첨지중추부사로, 백영환(白永煥)ㆍ홍진원(洪鎭源)을 경복궁 위장으로, 곽종후(郭鍾厚)ㆍ박유성(朴有瑆)을 경희궁 위장으로, 이범서(李範敍)ㆍ이호집(李浩集)ㆍ현복(玄馥)을 오위장으로, 이택현(李宅鉉)을 아이 첨사(阿耳僉使)로, 홍만식(洪萬植)을 귀산 첨사(龜山僉使)로, 양종린(梁鍾麟)ㆍ최두한(崔斗翰)을 오위장으로, 강문흠(姜文欽)을 충익위장으로, 이석환(李錫煥)을 전라 중군으로, 김상의(金尙義)를 창주 첨사(昌洲僉使)로, 이상란(李商爛)ㆍ박동규(朴東奎)를 경복궁 위장으로, 전택성(全澤聖)ㆍ김우석(金禹錫)을 경희궁 위장으로, 최규응(崔奎應)을 수문장으로, 정해식(鄭海植)을 도총부 경력으로, 최원위(崔元暐)를 훈련원 판관으로, 권병룡(權秉龍)을 우포도청 종사관으로,
전상신(全尙信)을 선적 첨사(善積僉使)로, 최규응을 섬진 별장(蟾津別將)으로, 김응한(金應漢)을 좌익찬(左翊贊)으로, 김구용(金九鎔)을 소근 첨사(所斤僉使)로, 최형점(崔亨漸)을 광량 첨사(廣梁僉使)로, 전용하(田龍夏)를 식송 만호(植松萬戶)로, 이호근(李浩根)을 구녕 만호(仇寧萬戶)로, 이해행(異海行)ㆍ이태상(李泰相)ㆍ염지선(廉志善)ㆍ윤정묵(尹正默)ㆍ안종식(安種植)을 오위장으로, 김태현(金泰鉉)을 첨지중추부사로, 윤계환(尹啓煥)을 경복궁 위장으로, 신채희(申采熙)를 도총부 도사로, 윤치인(尹致仁)을 훈련원 주부로, 한귀혁(韓龜赫)을 무신겸선전관으로, 조성길(趙性吉)을 경복궁 위장으로, 안윤식(安潤植)ㆍ박경록(朴景祿)을 경희궁 위장으로, 이재성(李載性)을 전라 감영 중군으로, 전택규(全宅奎)를 용진 만호(龍津萬戶)로, 남궁복(南宮濮)을 훈련원 주부로, 김흥주(金興珠)를 부장으로, 배용구(裵龍九)ㆍ박효술(朴孝述)을 수문장으로, 김계조(金桂祚)를 창주 첨사로, 홍우길(洪祐吉)을 지중추부사로, 이현익(李玄翼)을 동지중추부사로, 장기한(張基漢)을 소근 첨사로, 김영국(金英國)을 광량 첨사로, 강성윤(姜成潤)을 구녕 만호로, 원세익(元世翼)ㆍ구한조(具翰朝)ㆍ김정하(金鼎夏)ㆍ최재형(崔在亨)ㆍ편재덕(片在德)을 오위장으로, 신택희(申宅熙)를 선전관으로, 소정규(蘇正奎)를 훈련원 주부로, 장규환(張奎煥)을 무신겸선전관으로, 정재교(鄭在僑)를 수문장으로, 이민철(李敏哲)ㆍ이방헌(李邦憲)을 무신겸선전관으로, 한성주(韓聖周)를 수문장으로, 홍우성(洪祐聖)을 충청 감영 중군으로, 오연승(吳淵承)을 무신겸선전관으로, 이현경(李顯經)ㆍ서상두(徐相斗)를 부장으로, 진규상(陳圭相)ㆍ염봉신(廉奉信)을 수문장으로, 성규환(成奎煥)을 서도 참군으로 삼았다. 진동 권관(鎭東權管)에 정환규(鄭煥珪)를 단부하고, 동인 권관(同仁權管)에 김영수(金永秀)를 단부하고, 광평 권관(廣坪權管)에 강순석(康舜錫)을 단부하고, 소파아 권관(小坡兒權管)에 정형몽(鄭亨蒙)을 단부하고, 대길호리 권관(大吉號里權管)에 강치룡(康致龍)을 단부하였다. 훈련원 판관 안신문(安信文)ㆍ김재웅(金載雄), 훈련원 주부 장의환(張義煥)ㆍ하정규(河禎奎)ㆍ이명석(李命錫)ㆍ이병균(李炳均), 이상은 가설(加設)인데 정식에 따라 감하(減下)하였다. 이병균ㆍ전창렬(全昌烈)을 훈련원 판관 가설로, 신학현(申學鉉)ㆍ최수강(崔壽岡)ㆍ우창준(禹昌駿)ㆍ김기진(金基鎭)을 훈련원 주부 가설로, 겸 창원진병마첨절제사 영남수군방어사(兼昌原鎭兵馬僉節制使嶺南水軍防禦使)에 이종관(李鍾觀)을 단부하고, 동지중추부사에 조완선(趙完璇)을 단부하고, 첨지중추부사 세 자리에 김진민(金鎭民)ㆍ최한철(崔漢喆)ㆍ홍두영(洪斗泳)을 단부하고, 훈련원 주부에 황건주(黃健柱)를 단부하고, 겸진무사에 이종승(李鍾承)을 단부하였다. 충주 영장 심원택, 경기감영 중군 유기동, 함경감영 중군 구광서, 황해 감영 중군 서광승, 통제영 우후 정원기에게 지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가자(加資)하였는데,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동지중추부사 열 자리에 정계량ㆍ하우용ㆍ오학민ㆍ현복ㆍ염지선ㆍ김귀진ㆍ홍진원ㆍ박봉구ㆍ곽종후ㆍ오현묵을 단부하고, 첨지중추부사 여덟 자리에 이재긍ㆍ유희정ㆍ김창기ㆍ임학준ㆍ이태원ㆍ송지수ㆍ이민초ㆍ김정근을 단부하였다. 부사과에 윤영선(尹泳璿)ㆍ이범교(李範敎)ㆍ이기영(李淇榮)ㆍ김좌봉(金佐鳳)ㆍ오갑선(吳甲善)ㆍ변경린(邊慶麟)을 단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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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17년 경진(1880, 광서6)
5월 25일(임진) 맑음
좌목 17-05-25[34]
덕적 첨사 전상신을 잉임하게 할 것을 청한 경기 수군절도사 이규서의 장계에 대해 회계하는 병조의 계목
○ 병조 계목에,
“원 문건은 첨부하였습니다. 경기도 수군절도사 이규서(李奎書)의 장계를 보니, ‘덕적 첨사(德積僉使) 전상신(全尙信)은 군무(軍務)를 중하게 여겨 화약(火藥) 100근, 군료(軍料) 20석을 봉급을 털어 스스로 마련하고, 진(鎭)의 백성을 구휼하여 둔전(屯田)의 허결조(虛結租) 15석, 빈호(貧戶)의 잡역전(雜役錢) 100냥을 봉급을 털어 대납(代納)하여 견감하고, 또 16석의 쌀을 털어 굶주린 가구(家口)를 구휼하였으며, 잔루(殘壘)를 궁문(宮門)이나 성문(城門)의 자물쇠처럼 견고하게 하여 가난한 집들이 모래지가(暮來之歌)를 불렀다고 하니, 포상하는 은전을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화약, 군료, 허결, 잡역을 모두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을 털어 잔폐된 상태에서 구원했고 계속해서 굶주린 가구를 구휼하는 데 16포의 쌀을 털어 냈으니, 자물쇠처럼 견고하게 하고 모래지가를 외운 것을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진장(鎭將)은 일찍이 서쪽 지방에서도 공적을 세웠는데 임기가 만료되기 전에 이곳으로 왔습니다. 이처럼 좋은 솜씨를 가진 사람은 진실로 얻기가 쉽지 않으니, 특별히 잉임시킬 것을 허락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그대로 윤허한다고 판부하였다.
[주D-001]모래지가(暮來之歌) :
지방관이 백성의 질고(疾苦)를 알고 효과적으로 잘 다스린 것을 칭찬하는 말이다. 후한 시대(後漢時代) 사람 염범(廉范)은 자가 숙도(叔度)였는데, 촉군(蜀郡)의 태수로 있을 때에 성도(成都)가 도로가 비좁고 집이 밀집되어 있어 전임 태수가 불이 나는 것을 방지하려고 백성들에게 밤에 일하는 것을 금지시켜 백성들이 몰래 불을 켜놓고 일을 하여 도리어 불이 매일 나는 것을 보고, 전임 태수의 명을 폐지하고 물을 준비해 놓고 불을 켜도록 엄명을 내리니 백성들이 매우 편하게 되어 노래를 지었다. 그 노래에 “염숙도는 어째서 오는 것이 늦었는가. 불을 켜는 것을 금지하지 않으니 백성들이 안심하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네. 그 결과 예전에는 짧은 속옷도 없었는데 지금은 바지가 다섯 벌이나 되었네.” 하였다. 《後漢書 廉范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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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17년 경진(1880, 광서6)
6월 16일(계축) 맑음
좌목 17-06-16[15]
병비의 관원 현황
○ 병비(兵批)에 행 판서 이재면(李載冕)은 병중이고, 참판 민희식(閔羲軾)은 병중이고, 참의 홍영우(洪永禹)는 나오고, 참지 김재환(金在瓛)은 병중이고, 동부승지 강찬은 나왔다.홍균(洪均)을 어영 기사장(御營騎士將)으로, 김학로(金學魯)를 백치 첨사(白峙僉使)로 삼았다. 상호군에 김병덕(金炳德), 대호군에 정건조(鄭健朝), 호군에 이승오(李承五)ㆍ박선수(朴瑄壽)ㆍ윤성진(尹成鎭)ㆍ왕정양(王庭揚)ㆍ박용대(朴容大)ㆍ박제관(朴齊寬)ㆍ장석룡(張錫龍)ㆍ유만원(兪晩源)ㆍ신석년(申錫秊)ㆍ백낙훈(白樂薰)ㆍ원세정(元世)ㆍ구준현(具駿鉉)ㆍ민종호(閔宗鎬)ㆍ김태욱(金泰郁)ㆍ임흥준(任興準)ㆍ유인원(劉璘源), 부호군에 장태수(張泰秀)ㆍ이휘병(李彙秉)ㆍ이근명(李根命)ㆍ박홍수(朴弘壽)ㆍ윤치화(尹致和)ㆍ오익영(吳益泳)ㆍ서정순(徐正淳)ㆍ홍종학(洪鍾學)ㆍ한장석(韓章錫)ㆍ윤치담(尹致聃)ㆍ조병우(趙秉友)ㆍ윤승구(尹升求)ㆍ이인만(李寅晩)ㆍ박주양(朴周陽)ㆍ신덕희(申德熙)ㆍ오한영(吳翰泳)ㆍ이규삼(李奎參)ㆍ이희춘(李熙春)ㆍ이종서(李種恕)ㆍ이증우(李曾宇)ㆍ서상식(徐相植), 부사직에 홍종영(洪鍾永), 부사과에 홍우기(洪祐冀)ㆍ한병제(韓秉濟)ㆍ정필조(鄭弼朝)를 모두 단부하였다. 평안도 병마우후에 심의하(沈宜夏), 남병영 우후(南兵營虞候)에 홍학주(洪鶴周),
덕적 첨사(德積僉使)(주1)에 전상신(全尙信)을 특별히 우선 잉임시키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훈련 참군에 장덕호(張德浩)를 단부하고, 권지 훈련원 참군에 신준모(申準謨)를 단부하였다.
(주1)덕적도[ 德積島 ]
소재지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형성 및 변천
1310년(고려 충선왕2)에 남양부(南陽府)가 설치된 이후 남양부에 소속되었고, 조선 초기까지 남양도호부에 속하였다. 1486년(성종17)에 인천도호부로 이속되었고 1708년(숙종34)에 덕적진(德積鎭)이 설치되면서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파견되었다.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기도 부천군에 편입되었고, 1973년에 경기도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1995년에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덕적도 [德積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주1)첨사 [僉使]
조선 시대 각 진영(鎭營)에 속한 종3품의 무관으로, 첨절제사(僉節制使)의 약칭.
한국고전용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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