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17. 22:12ㆍ 인물열전
전일흠(全一欽)
[생원시] 정조(正祖) 7년(178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58위(88/100)
[인물요약]
자 성중(聖中)
생년 임오(壬午) 1762년(영조 38)
합격연령 22세
본관 옥천(沃川)
거주지 영천(榮川)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전력 유학(幼學)
부모구존 구경하(具慶下)
[가족사항]
[부]
성명 : 전상철(全尙喆)
관직 : 유학(幼學)
[출전]
『숭정3계묘식사마방목(崇禎三癸卯式司馬榜目)』(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B13LB-30])
수정일 수정내역
2005-11-30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간행한 『CD-ROM 사마방목(司馬榜目)』(韓國精神文化硏究院‧서울시스템, 1997.)을 저본으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1-12-30 『숭정3계묘식사마방목(崇禎三癸卯式司馬榜目)』(『조선시대(朝鮮時代) 생진시방목(生進試榜目)』 17, 국학자료원, 2008.)으로 출전을 변경하였습니다.[수정자:이재옥]
2012-12-30 『숭정3계묘식사마방목(崇禎三癸卯式司馬榜目)』(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B13LB-30])으로 출전을 변경하였습니다.[수정자:이재옥]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정보시스템
九龍巖稧
1. 유래
구룡암계는 조선 정조 때 성균관에서 함께 수학한 영남의 선비 아홉 분이 1795년(乙卯)에 맺은 유계(儒稧)로 수계이후 2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후손들에 의해 6대째 세의를 이어오고 있다.
계의 명칭에 등장하는 구룡암은 옛날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대로(大路)였던 설성(雪城) 고을의 이화역(利花驛) 문갈현(文碣峴)의 한길 옆에 있었던 너럭바위이다. 당시 성균관에서 함께 수학하던 안동, 영주 등 이웃 고을 출신의 동향(同鄕) 선비들이 귀향길에 이 고개를 지나다가 너럭바위에 올라 자리를 베풀고 시(詩)와 술과 담소(談笑)로서 여행의 피로를 달래며 앞날의 청운(靑雲)을 기약하였는데, 그때 마침 모인사람이 아홉 사람이어서 바위의 이름을 구룡암(九龍巖)이라 명명하고 수계를 하게 되었다. 아홉 사람은 잇달아 등과(登科)하게 되었는데, 네 분은 급제(及第)하였고 다섯 분은 사마(司馬)에 올랐다.
2. 구성과 운영
1) 구성
현재 시행되고 있는 구룡암계의 회칙을 살펴보면 회원의 자격을 ‘구가(九家)의 자손(子孫)인 남자의 자연발생적인 구성체’로 정해두고 있다.
구룡암계의 좌목을 기록한 구룡암제명록(九龍巖題名錄)에는 계를 창립한 아홉 사람을 비롯하여 그들의 5대손까지 총121명의 인물이 등재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외손(外孫)도 6명이 포함되어 있다. 좌목에 오른 후손의 수를 살펴보면 창립계원의 자제가 24명, 손자가 43명(외손 2), 증손자가 73명(외손 3), 현손(玄孫)이 50명, 5대손이 22명(외손 1)이다.
구룡암계를 수계한 아홉 분을 그 당시의 출신지별로 살펴보면 안동․예안 출신이 6명이며 영주출신이 3명이다. 더 세분해서 보면 안동의 경우 본부(本府) 출신이 1명, 임하현(臨河縣) 출신이 1명, 감천현(甘泉縣) 출신이 2명이며, 예안현(禮安縣) 출신은 2명이 좌목에 이름을 올렸다.
구룡계는 현재 6대(代)를 내려오면서 명망 있는 인물들을 다수 배출하였는데 여기에서는 계를 창립한 아홉 분의 내력만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李家淳
權 補
朴時源
全一欽
權 褘
丁若琇
柳晦文
李龜星
李周禎
敎有文集居禮安霞洞今安東市陶山面土溪洞 六代孫東宣
學源戊子眞城人號霞溪退溪后乙酉司馬丙辰初仕癸酉文科官應
泉郡甘泉面美石里 七代孫奇興
周甫乙酉安東人號星圃陽村后己酉司馬有遺集居安東石南今醴
居榮州潘谷今榮州市文亭洞潘谷 六代孫敦緖
穉實甲申潘南人號逸圃嘯皐后乙酉司馬戊午文科官司諫有文集
州市上望洞 七代孫遇卓
聖中壬午沃川人號星峰休溪后癸卯司馬有遺集居榮州望洞今榮
泉郡甘泉面敦山里 六代孫五昌
懿甫壬午安東人號石窩陽村后乙酉司馬有遺集居安東石南今醴
2洞茁浦 六代孫淳溶
孟晋辛巳錦城人忠靖公后戊午文科官典籍居茁浦今榮州市可興
安東市龍上洞삼호아파트305號 七代孫成昊
燁如戊寅全州人號寒坪陽坪后癸卯司馬有遺文集居安東寒坪今
居禮安遠村今安東郡陶山面遠村洞 八代孫必國 팔대손필국 안동시용상동
彛瑞丙子眞城人號俗隱退溪后庚戌司馬庚申初仕蔭郡守有文集
居安東法興今安東市法興洞 七代孫衡重
七代孫衡重
景詹庚午固城人號大溪容軒后丁酉司馬乙酉文科官持平有文集
◦ 이주정(李周禎 : 1750~1818)
본관은 고성(固城)으로 자(字)는 한백(翰伯)이고 호는 대계(大溪)이다. 팔회당(八懷堂) 시항(時沆)의 증손이며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으로 안동 법흥(法興) 출신이다. 1777년(정조1) 증광 생원시에 합격하고 1795년(정조 19)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결성현감(結城縣監)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내고 개성소윤(開城少尹)에 재임 중 몰(沒)하였다. 학우행지(學優行至)하고 관직에 있을 때는 선정을 베풀어 거사비(去思碑)가 섰다. 문집으로 『대계집(大溪集)』 3책이 있다.
◦ 이귀성(李龜星, 1756~1835)
본관은 진성(眞城)으로 자(字)는 은서(恩瑞)이고 호는 속은(俗隱)으로 퇴계의 8대손이며 예안(禮安) 원촌(遠村)출신이다. 1790년(정조14)에 생원시에 합격한 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종묘 직장(直長)등을 역임하였다. 1809년(순조9) 통훈대부에 오르고 이듬해 하양현감(河陽縣監)에 임명되었다. 선생은 양현사(養賢祠)의 이건, 시사단(試士壇)의 중수 등 향토유적 보존에 힘을 기울였으며, 저서로는 『속은집(俗隱集)』이 있다.
◦ 류회문(柳晦文, 1758~1818)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字)는 엽여(燁如)이고 호는 한평(寒坪)이다. 안동 임동의 대평 출신으로 종조부인 노애(蘆厓) 류도원(柳道源)과 대산 이상정에게 배웠다. 1783년(정조7)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사도세자의 신원을 촉구하는 상소 전달에 선두로 활약하였다. 경학연구와 심성수양에 힘썼으며 소수서원에서 향음례를 실시하자 빈석(賓席)으로 초청받았다. 아들인 정재(定齋) 치명(致明)은 퇴계의 학통(學統)을 이은 일세의 거유(巨儒)이다. 사후에 아들의 귀(貴)로 이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저서로는 『한평집(寒坪集)』이 있다.
◦ 정약수(丁若琇, 1761-1816)
본관은 금성(錦城)이며 자(字)는 맹진(孟晋)이다. 충정공(忠靖公) 응두(應斗)의 후손으로 영천 줄포(榮川茁浦:현 영주시 상줄동) 출신이다. 1798년(정조22) 식년시(式年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典籍)과 사헌부 지평(持平)등을 역임하였다.
◦ 권 위(權 褘, 1762~1835)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字)는 의보(懿甫)이고 호는 석와(石窩)로 안동 석남(石南: 현 예천군 감천면 미석리) 출신이다. 대산 이상정의 문인으로 1789년(정조13)에 식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일찍이 과거를 단념하고 노모를 봉양하였다. 경전을 깊이 연구하여 깊은 의미를 탐색하였고 사칠이기전수지결(四七理氣傳受旨訣)을 지어 퇴계의 사칠호발설(四七互發說)을 지지하고 율곡의 설(說)을 비판하였다. 저서로는 『석와집(石窩集)』이 있다.
◦ 전일흠(全一欽, 1762~1798)
본관은 옥천(沃川)이며 자(字)는 성중(聖中)이고 호는 성봉(星峰)이다. 희철(希哲)의 후손으로 영천 망동(榮川望洞:현 영주시 상망동) 출신이며 1783년(정조7)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 박시원(朴時源, 1764~1842)
본관은 반남(潘南)으로 자(字)는 치실(穉實)이고 호는 일포(逸圃)이며 호는 저암(低庵) 또는 사일와(四逸窩)이다. 소고(嘯皐) 승임(承任)의 9세손으로 영천 반곡(榮川蟠谷:현 영주시 문정동 서리골) 출신이다.
1789년(정조13)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으며 1798년(동22)에 식년시(式年試)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였다. 벼슬은 종묘서 직장(宗廟署直長)․선릉직장․전적(典籍)․병조좌랑(兵曹佐郞)․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지평(持平)․이조정랑․장령(掌令)․봉화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공은 성리학에 밝아 문명(文名)이 있었으며, 폐지된 영주 이산서원(伊山書院)을 복원하고 강학을 하여 인재를 배출하였다.
1842년(헌종8)에 타계하니 향년 79세였으며 유집(遺集)으로 『일포집(逸圃集)』8권 4책이 있다.
◦ 권 보(權 補, 1765~1831)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字)는 주보(周甫)이고 호는 성포(星圃)로 안동 석남(石南:현 예천군 감천면 미석리) 출신이다. 1789년(정조13) 식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번화(繁華)를 싫어하여 산수(山水)에 소요하며 독서를 즐겼다. 이인행(李仁行)․이가순(李家淳)․박시원(朴時源) 등과 교유하였다.
◦ 이가순(李家淳, 1768~1844)
본관은 진성(眞城)으로 자(字)는 학원(學源)이고 호는 하계(霞溪)로 예안 하동(霞洞: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출신이다. 퇴계의 9세손으로 호문삼로(湖門三老) 가운데 한사람인 후산(后山) 이종수(李宗洙)의 문인이다. 성균관에서 수학할 때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1789년(정조13) 사마시에 합격하고 1813년(순조13) 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통사랑에 임명되고 1820년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 1821년 시강원설서 등을 역임하였다. 1822년에 인신(印信)을 소홀히 하였다는 무고로 단양으로 유배되었다가 1823년 해배되어 사과․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831년 선전관에 이어 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사헌부장령․응교(應敎)․교리(校理) 등을 역임하면서 시폐(時弊)를 구제하는데 진력(盡力)하였다.
저서로는 『하계집(霞溪集)』12권 6책이 있다.
2) 운영
구룡암계의 계금 조성은 처음에 각 집에서 엽전 5푼씩을 거출한 돈을 불려서 계의 토지로 영주시 장수면 반구리에 논 136평과 밭 799평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1995년에는 관리상의 어려움으로 토지를 매각하고, 그 돈으로 영주시 영주 4동에 27평 아파트 1동을 매입하였다. 현재 구룡암계는 여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계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안동 인근의 다른 유계에 비해 재정이 튼튼한 편이다.
근래에 있어서의 구룡암계의 활동을 살펴보면 1971년에 후손인 이윤덕(李潤悳)․전대하(全大河)․박돈서(朴敦緖) 등의 노력으로 그동안 위치를 몰랐던 구룡암의 소재를 찾아 입석(立石)을 하였으며, 1993년에는 도로공사로 인하여 그 비석을 이천군 장호원읍 이황삼리의 JC동산 경내로 비를 옮겼다. 1995년에는 기존의 비(碑)가 너무 초라하여 귀부와 이수로 구색을 갖추어 내빈과 회원이 많이 참석한 가운데 고유 행사를 가졌다.
현재 계의 운영을 위해 회장 1인과 부회장 2인, 총무 1인, 감사 2인, 상임유사 11인 등의 임원을 두고 있으며 매년 11월에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결산보고를 한다. 또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임시총회를 소집하여 안건을 처리하고 있다.
3. 기 타
1) 구룡암세록(九龍巖世錄)․속집(續集)
1981년에 발행된 구룡암세록과 이후의 내용을 담은 속집(續集)을 합해 1997년에 개정증보판으로 발행한 4×6배판의 양장본 책이다. 구룡암세록편이 178쪽이고, 구룡암세록속집편이 40쪽이다.
구룡암세록편의 내용은 구룡계첩과 수적(手蹟)․자손록(子孫錄) 등을 모아 편집하였으며 구룡암세록속집편은 구룡암계의 사업에 따른 경과보고와 결산․계칙․회의록․개갈고유시시도․발문 등이 수록되어 있어 구룡암계 연구의 소중한 자료이다.
2) 구룡암동유록(九龍巖同遊錄)
巖在嶺西雪城陰竹古號梨花驛之北記昔在正廟十九年乙卯季春 自泮歸路 九人笻屩 同登此巖 鐵城李知縣丈 命名九龍 諸人可之 其後登龍者 己三人 未知繼此而往 又將至於幾人 最是全兄未及攄乙卯之寃 而長途玉折 寃乎寃乎哉 今其孤子宗瀷改大奫以我爲先友冠而來見 爲之感念一愴 仍出還前所借謄一冊子 全君請余寫龍巖遊錄 遂書其卷未以還之.
聖上六年 丙寅九月下澣 李家淳 書.
바위는 영서의 설성(陰竹의 古號) 고을 이화역 북쪽 옆에 있으니, 정조 19년 을묘 3월에 반궁(성균관)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홉 사람이 공갹(지팡이와 짚신, 곧 단촐한 행장)으로 함께 이 바위에 올랐다. 철성 이지현(현감 이주정)어른께서 구룡(바위를)이라 이름하시매, 여럿이 모두 좋다고 했다. 그 뒤에 과거에 오른 이가 이미 세 사람인데 여기에 이어 또 장차 몇 사람이나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중에 전형(전일흠)이 을묘(1795)년의 원한을 풀지 못한 채 아깝게도 세상을 버리게 되었음은 원통하고도 원통한 노릇이다. 이제 그 아드님 종익(大奫으로 고침)이 나를 선인의 친구라 하여 찾아와 만남에 창연(愴然)한 감회 한고비 애절했다. 인하여 앞서 빌었든 베낀 책 한권을 돌려주었더니, 전군이 나더러 ‘용암유록(龍巖游錄)’을 써달라고 청하기에 드디어 그 권말에 써서 돌려주다.
성상 6년 병인년(순조 6, 1806) 9월 하순에 이가순 쓰다.
九龍巖同遊錄友人李注書之所書於故友全上舍(聖中) 甫冊子者也 昔歐陽子之誌張子野墓 追叙昔日賢豪相往來懽遊之樂 以爲雖洛人 至今皆以謂無如嚮時之盛 余是於錄也 亦云 記昔在正廟盛世 嶺下士之學道魚千里者 咸涵泳煦濡於化育之中 鱗鱗集芹藻之沼 以聖主恩重龍頭選一句爲的 其從遊大抵多傑然者也 乙卯之暮春 遊泮之九人 以笻一鞋一聯袂而歸 酒酣以往 歌呼諧笑以忘憊 到雪城北峴路傍 有一盤陀巖 九人者促膝其上 皆曰吾輩此遊 爲龍池一躍也 異時當齊登燒尾宴 刻此巖以九龍 此名所以志也 其後自午橋李持憲丈以至於余及(孟晋)曁(學源)氏 聯翩登甲乙科 遠臺試縣爲治績吏 閑坪課子得妙年第 繼此將次第升 而是行亦可謂不寂寥矣 盖其霆鞭電駕 雖或有早晩不齊 而其爲龍則一也 由此九龍巖遂顯名圻湖間 行者指點 居者口播士之業功令志立揚者咸願占是巖一席巖於是亦不偶然矣獨其同遊之中有悠悠存歿之感卽此冊主人聖中 甫也 嗟夫聖中甫早占司馬 壯而遊賢關 其軒昻磊犖之氣 凌凌若一蹴登雲 當日之坐是巖名是巖者 豈不謂聖中地乎 是秋春塘之試 三登比較 距龍門如隔一紙 其時讀券官李尙書(勉兢)爲余言嗟惜不已 聖中 中途遞折 其墓木已拱 每念及爲之哽愴 今其孤胤宗奫 乃能勤讀其父書 又以其餘力出遊四方 贄謁於其先君子所嘗交遊之家 此學源氏之以龍巖同遊錄書贈 而繼以語者也 余於聖中 情其密 其孤胤又篤先誼 頻過從日袖此冊來見余 仍泫然請一言惠 摩挲俯仰自不覺一倍歔欷也 因掩卷太息而語曰龍之出盖肇於伏羲之世 而是爲卦 其後演八八爲六十四則九九之衍吾知其八十一也 又自其八十一而演之 其數將不知爲幾許 到此巖不但以九龍名也 抑是錄之首載於君家一冊子者 其亦爲之兆也 君其勉之哉 遂踵學源氏 書其下以歸之.
丙子元月下澣 朴時源穉實書.
구룡암동유록은 벗 이주서(이가순)가 옛 친구인 전상사 성중(전일흠)의 책자에 써준 것이다. 옛적에 구양자(구양수)가 장자야(張子野) 묘지(墓誌)에 덧붙여 쓰기를, 옛날 어진 호걸들이 서로 왕래하며 즐겁게 놀던 기쁨은 써하되, 비록 낙인(서울 사람)이라도 오늘엔 그전처럼 훌륭함이 없다고 하였는데, 나도 이 기록에서 마찬가지 이다.
그때 정조성세에 있어, 영하(嶺下)의 선비로 어천리(魚千里)에 도를 배우고자 모두 화육(化育) 속에 젖고 헤엄치고 하여, 빛나게 근조(芹藻)의 소(沼:성균관을 의미)에 모여 ‘성주은중용두선(聖主恩重龍頭選:성주의 은혜로 장원에 뽑힌다.)’의 한 구절을 목표로 삼아 유학을 하매 재주 뛰어난 인재들이 많았다.
을묘(1795)년 봄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아홉 사람이 단촐한 행장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함께 귀향하는 길에 술이 거나하여 노래와 우스개로 피곤한 줄도 잊으며 설성땅에 이르렀다. 그 북녘 고개에 길옆에 한 너럭바위가 있어, 일행 아홉 사람이 그 위에 올라 무릎을 모아 둘러앉아서 모두 말하기를, “우리들의 이 놀이는 ‘용지의 일약(입신출세를 향한 발돋움)’이라 뒷날 마땅히 함께 소미연(급제하면 베푸는 잔치)에 오르게 되면, 이 바위에 새기리라” 하여, 구룡으로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 뒤에 오교 이지헌(이주정)어른으로부터 나(박시원), 그리고 맹진(정약수) 및 학원(이가순)씨에 이르기까지 잇달아 갑을과(甲乙科)에 올랐다. 원대(이귀성)는 현감으로 잘 다스리는 벼슬아치가 되었고, 한평(류회문)은 아들을 가르쳐 묘년에 급제에 올랐으니, 이에 이어 장차 차례로 오를지라, 이 행위도 또한 기요(寄寥)하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겠다.
대개 그 번쩍여 빛남이 비록 조금 이르고 늦는 것은 같지 않음이 있을지라도 그 용이 됨에는 한가지인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구룡암은 드디어 이름이 나서, 기호 사이에 여기를 지나는 행인들은 이 바위를 가리키고, 이 고장에 사는 사람들은 입으로 퍼뜨리는바 되어, 선비들이 공령(과거를 뜻한 공부)을 택하고 입신양명을 뜻하는 이들은 모두 이 바위 한 자리를 차지해보기를 원하게 되었으니, 바위가 이리됨에는 또한 우연이 아닌 것이다.
홀로 그 함께 노닐던 벗 가운데 유유히 존몰(存歿)의 감개가 있음은 곧 이 책의 주인인 성중(전일흠)이다. 아하! 성중은 일찍이 사마를 차지하고, 성년이 되어서는 현관(賢關)에 놀아, 그 헌걸뢰락(軒昻磊犖)한 기상이 능릉(凌凌)히 한달음에 용문에 오를 듯 했었다. 그날의 이 바위에 앉아 이 바위를 이름한 것이 어찌 성중의 경지를 위함이 아니겠는가. 그 해 가을 춘당대과거에서 세 차례나 비교(比較)에 올라, 용문에 다가섬이 마치 종이 한 장 사이였는데, 그 때 독권관(시관)이었던 이상서 면긍이 나한데 말하기를, 매우 아깝게 되었다고 차탄(嗟歎)하기를 마지않았다.
성중이 중도에 갑자기 가버리고 그 묘목(墓木) 이미 두 아름드리 될 만큼 자랐다. 마냥 생각하면 목이 메일 만큼 마음이 쓰렸는데, 이제 그 자제 종윤이 부지런히 그 아버지의 글을 읽고, 또 틈을 내어 사방으로 다니면서, 가신 아버지의 일찍 교유하던 분들을 폐백으로 찾아뵈었다. 이는 학원(이가순)씨가 ‘구룡암동유록’을 써주고 나서 한 말이었다.
나는 성중과의 정의(情誼)가 그토록 자별했고, 그 아들이 또 선대의 사귐을 도타이 여겨 자주 찾아 들르며 좇았다. 하루는 이 책을 지니고 찾아와서 나에게 보이며, 눈시울을 적시면서 한 말씀을 적어 달라고 청하기에, 어루만지며 지난 일을 더듬으매 한스러운 느낌이 갑절이나 더했다. 인하여 책을 덮고 한숨을 쉬면서 말하기를,
“용이 나옴은 대개 복희씨 때에 비롯되었다 하거니와, 이를 괘로 팔을 팔로 승(乘)하여 육십사괘로 부연(敷演)하였은 즉 구를 구(九龍)로 늘리면 팔십일이 될 것을 알 것이며, 또 그 팔십일이 늘어나서 그 수효가 장차 얼마에 이를지를 알지 못할 것이니, 이 바위에 이르러는 다만 ‘구룡’이라고만 이름할 것이 아니리라. 그러므로 이 기록의 머리에 군(君)의 집 한 책자를 싣는 것은 그 또한 징조(등과현달)가 되는 것이니 군은 힘쓸지어다.” 라고 하고 드디어 학원씨에 이어 그 아래에 써서 주다.
병자년 정월 하순에 박시원 치실 쓰다.
余始遊泮也 入洛而問嶺士之在泮者 有全上舍聖中 甫李學士學源 甫而全與我同庚 李與我同年也 同庚而先二式登庠 故遊泮久而謂我先進也 其出入進止 必隨其先後 而鮮有敗事 盖其處事之義持論之正 儕類莫之及焉 其後 嶺下遊泮之士 稍稍雲集 而必推公爲登龍之先驅矣 不幸拘寃而終 余亦倦遊 頹然如塵箱之老蠹 每永夜無寐 追想往蹟 沿江五百里 一木一石 歷歷可記 而獨九龍巖意所不忘也 同遊中聖中甫心所欽服也 一日其孤胤宗奫 持李學士朴知縣所記九龍巖題名錄來示曰 此巖非獨一家之所愛惜 而奫之感 抑又深焉 自先人下世之後 小子寡陋 未能追尋先稧 獨此石不磨 可以籍手語先友之某某矣 頃歲裹足西行 爲訪此石 摩挲先躅 歸謁先友於霞溪蟠谷之間 請錄遊記事 以作卷中故事 宜從丈人所更乞一言之惠 余乃歛袵起敬曰 全君可謂篤孝人也 思親而 遂及其先友 又推及其所嘗所憩所名之石 眞右人敬桑梓祗杖履之意也 思親而能如是乎 不敢以不文辭 略道其平日相與之意 以附尾其龍巖顚末 霞溪蟠谷記已盡之 玆不復贅云.
閼逢涒灘單閼 强圉 權褘 懿甫書.
내가 처음 성균관에 들 적에 서울에 들어서자, 영남선비로 성균관에 있는 이를 물어 보았더니, 오직 전상사 성중과 이학사 학원뿐이었다. 한데, 전(全)은 나와 동갑이었고, 이(李)는 사마시 동년이었다. 동갑으로 두 식년이나 앞서서 유학(遊學)에 올랐기 때문에 그만큼 성균관에 들어온 지가 오래였던지라 나보다는 훨씬 선진인 셈이었다. 그 출입하는 범절과 모든 동지(動止)에 있어 반드시 그 선후를 따라하는 터여서 조금도 허술한 데라고는 없었다. 대개 그 처사의 올바름과 지론의 정당함이 동료들 가운데서는 따를 이가 없었다.
그 뒤 영남의 선비들이 차츰 많이들 성균관으로 모여들었는데, 반드시 공을 등룡의 선구로 믿어 왔었다. 불행하게도 원한을 안은 채 세상을 버린바 되고, 나 또한 하는 것 없이 진상(塵箱)의 노두(老蠹)처럼 맹랑스레 나달을 지우면서, 매양 잠 못 드는 밤이면 지나온 자취를 추상하게 되는바, 한양길 범강(汎江) 오백리에 한 그루의 나무, 한 덩이 바위까지도 역력히 기억할 수 있거니와 그 중에서도 사연 깊은 구룡암은 더욱 잊혀지지 않는다. 동유가운데서도 성중은 가장 마음 깊이 경복하던 바였었다.
하루는 그 아들 종윤이 이학사(이가순)와 박지현(박시원)이 적은 구룡암제명록을 가지고 와서 보이며 하는 말이, “이 바위는 특히 한 집만의 아껴야 할 바가 아니오나, 저의 억울한 감회는 너무도 심절(深切)합니다. 선인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 제가 과루(寡陋)해서 선계(先稧)를 찾지 못했는데, 홀로 이 바위가 그대로 있어 가히 그로 인하여 선우(先友)의 모모(某某)를 알 수 있게 했습니다. 연전에 일부러 그곳에 가서 그 바위를 찾아 선인의 자취를 어루만지고 돌아와 하계며 반곡의 선인의 친구 어른님들을 찾아뵙고 옛날 노니시던 사연의 기록을 청하여 그로서 권중(卷中)의 고사를 지었사온데, 이제 어른님께 다시 한 말씀을 빌고자 하는 바입니다.”고 하였다. 나는 곧 옷깃을 여미고 공경하여 이르기를, “전군은 참으로 효성이 도타운 분이라고 하겠네. 어버이를 생각하는 정성이 선인의 벗들에까지 미치고, 또 그 일찍이 쉬며 이름 지었던 바위에까지 미치니, 진실로 옛사람들이 상재(桑梓)와 장구(杖屨)를 공경한 것과 같은 뜻이로다. 도타운 효성으로 어버이를 생각함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감히 글을 못하노라하여 사양할 수도 없는 처지기에, 대충 평일에 서로 사귀던 뜻을 일러 써 끝에 붙이다. 그 용암에 얽힌 사연은 이미 하계, 반곡의 기록에 다 들어 있기에 여기에 다시 덧붙이지 않노라.
갑신(순조 24, 1824)년 묘월 정일, 권 위 의보 쓰다.
於乎 九龍巖已古事矣 命是巖者 鐵城李持憲公也 成是帖者 全君宗奫繼先志也 霞溪學士叙述之 鳳城使君鋪張之 韓文公脚下予何言哉 宗奫以余爲父執而與參九龍者 請予一言甚勤 竊感亡友之有子 不可以不文終辭 仍謂宗奫曰 古人之稱龍 不必以科第言 大易之乾龍尙矣 勿論若老子之猶龍 李元禮之龍門 南陽之臥龍 荀氏之八龍 韓吏部之騎龍 皆以其靈異拔萃者 名之耳 今此九龍 從以區區科第目之 淺之爲稱龍也 九人之中 得選燒尾宴者四人 其餘或以門蔭莝仕 或抱寃而作古人 或窮老而未成名 若以點額龍門者稱之 九龍之號 殆未免得半失半 傳之永久名實不相副 莫若科第外稱龍有如古人之爲也 第念吾儕未做之業 當付之後人 而諸家子姓 彬彬多文學之士 登龍者有人矣 其參司馬榜者 踵踵相尋也 朴候八十一之演數 可驗也 苟使各家子孫講世好結深交 一如宗奫之血心焉 則午橋李丈偶發之言 永有辭於後世 以吾輩當遂赫赫若前日事 曷不偉哉 玆尾數語於朴李二公之後 而以寓九原難作之感云爾.
權補 周甫 識.
어허! 구룡암은 이미 옛일이로세. 이 바위를 이름 짓기는 철성 이지헌(이주정)공이었고, 이 첩(帖)을 만든 이는 전군 종윤으로, 그 선인의 뜻을 이음이로다. 하계학사(이가순)가 서술을 했고 봉성사군(박시원)이 부연을 다듬었으니, 한문공의 발밑에 내 무었을 더 말하겠는가.
종윤이 나를 선군의 친구라 하고, 함께 구룡에 참여했다고 하여, 나에게 일언을 청함이 심히 은근하고 간절하기에, 옛 벗이 어진 아들을 두었구나하는 느껴움에서, 글을 못하노라 하여 끝내 사양할 수도 없는 처지인지라, 인하여 종윤에게 이르기를, “옛 사람이 용을 일컬음은 반드시 과거에 급제를 말함만은 아니었다네. 주역의 건룡은 물론이려니와, 노자의 용같음과 이원례의 용문이며, 남양의 와룡이며, 순씨의 팔룡이며, 한이부의 기룡 등은 다 그 영이로움이 빼어남을 일컬음이었지만, 이제 구룡은 한갓 구구스러운 과제(科第)를 지목하는 얕은 뜻으로 용이라 일컬음이었네. 아홉 사람 가운데 소미연에 뽑힘을 얻은 이가 네 사람이요, 그 나머지는 혹 문음이나 서사로, 혹은 한을 품은 채 고인이 되고, 혹은 궁벽한 시골에서 늙어 이름을 이루지 못하기도 했네. 이래서 용문에서 점액(點額)된 이도 함께 일컬어 구룡이라 부르게 되기는 했지만, 실은 반(半)만이 얻었고, 반은 잃은 셈이어서 오래 전함이 명과 실이 서로 맞지 않는 지라, 급제한 사람만을 용이라 칭하기보다 옛사람들이 했던 그대로를 쫒는 편만 같지 못할까 싶네.
그리고 우리들의 이루지 못한 업을 뒷사람들에게 부탁하여, 여러 집의 자손 가운데 빈빈한 문학지사가 많아 이미 용문에 오른 이들도 있으며, 사마방에 참여한 선비도 잇달아 나오고 있지 않는가. 박후(박시원)의 팔십일의 연수도 징험할 만한 것일세. 진실로 우리 각 가의 자손들이 세호(世好)를 강구하고 심교를 맺게 하여 한결같이 종윤의 정성된 마음 같으면 오교 이어른(이주정)님의 우연히 내신 말씀이 길이 후세에 일컫게 되어 우리들이...〔원문에 落字가 있음〕어찌 갸륵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에 박․이 두 공의 뒤에 써서 구원난작(九原難作)의 감(感)을 붙이노라.”
권 보 주보 짓다.
余幼則侍先君子 聞九龍巖遊歷首末 道所謂雪城者 心求其處 而無從尋問 及風樹不待 同遊諸公落落如晨星 未嘗不追想感唏而不自已也 今因事入府 權友景麟以同遊錄見示 摩挲舊蹟 感極而悲嘻 當日命名 特座間一時博囋耳 雖志在得行 豈遽以登龍爲準的而必於是巖乎 誌之其後先飛騰而有傳於今與後 特時至而舒矯耳 先君子不幸淪落 不肖偶竊科第 人謂不食之報有在 鳴呼 又豈不重可慨也哉 權友卽第五名上舍公子也 相與講誼論交 敬書其卷後以歸之.
戊戌重陽節 通政大夫 前行司諫院大司諫 知製敎 柳致明 謹書.
내 어려서 선군자를 옆에서 모실 적에 구룡암 유력(遊歷)에 대한 사연을 들었는데, 이른바 설성이라 하는 것을 마음에 두고 그곳을 찾으려 했으나, 알아볼만한 데가 없었다. 풍수(風樹) 기다리지 않아 함께 노니시던 여러 어른님들이 새벽별처럼 낙락(落落)하시니 추상(追想)하매 느껴워 탄식함을 마지못할 지로다.
이제 일이 있어 부중(府中)에 들렀더니, 권씨 친구 경린이 동유록을 보이어, 옛 자취를 어루만지매 비감스러움이 이를 데 없었다. 그 날 이름했던 것은 그 자리에서 한때 희롱으로 하였을 것이다. 비록 뜻은 그랬으면 하나 어찌 금방 등룡(벼슬)으로써 목적을 삼음이 반듯이 이 바위이랴. 그 앞뒤로 벼슬에 오른 사람을 기록하야 오늘과 뒷날에 전하는 것이 특히 시절을 잘 만나 움츠림을 펴게 된 것이다.
선군자께서 불행히 뜻을 펴지 못하시고, 못난 내가 우연히 과제(科第)를 얻게 되니, 남들이 불식지보(不食之報)라고 말함이 과연이라 하겠으니, 아하! 어찌 거듭 슬픈 일이 아니랴.
권씨 친구는 곧 기록 중 넷째 분인 상사공(권위)의 아드님이다. 서로 더불어 친의를 강구하고 사귐을 논하여, 그 책 뒤에 적어 돌아가다.
무술(헌종 4, 1838)년 중양절 통정대부 전 사간원 대사간 지제교 류치명 삼가 쓰다.
3) 서구룡암계첩후(書九龍巖稧帖後)
頃年吾仲氏寓甘泉也嘗語應秀以九龍巖修稧事後幾年應秀客于南又後幾年還故里始得見故應敎李公所爲龍巖遊錄盖當健陵右文世羣龍滿朝儒化方隆乘運躍鱗此其時也先君子當日命名出於一時戱爾之言非必以登龍爲準的誠如柳承宣之言然夫九陽數也故曰龍方九君子之下雲橋而路雪城也懹寶未試風期睕晩其占爲勿用及其班坐于石視石猶龍錫以三字名兆已見矣其占爲在田其後或中或不中而在九得四此九四或躍旡咎之象也然則先君子命名亦豊偶然而已哉噫星想屢變人事不待上下五十餘年九君子後先淪謝人世風樹之感九家子弟宜無異同而如應秀者仲氏又不在世矣其感又何如也夫修稧古事也自蘭亭香社至于耆英眞率必於其命名之地而今是稧也巖在嶺西稧修嶺外名與地不相沕矣然感念故事首爲此稧者其誠有足多矣若繼此而修勿替引之則此稧將與此巖永存此九家後嗣之所共勉也噫.
丁未陽月下澣 李應秀 謹識.
내 중씨께서 감천에 우거하실 무렵, 일찍 나한테 구룡암수계에 관한 일을 말씀해 주신 적이 있다. 그런지 몇 해 뒤에 나는 남녘지방에 나그네 생활로 또 몇 해를 지나고 난 뒤 다시 고향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고(故) 응교 이(李)공이 만드신 구룡암유록을 보게 되었다.
대개 그 당시는 한창 문운(文運)이 무르익었던 정조임금의 성대로서 조정에는 뛰어난 인재가 가득했고, 찬란하게 유풍(儒風)이 떨쳐 바야흐로 승운약인(乘運躍鱗)의 시기였다. 선친께서 그날 구룡암이라고 명명하신 것은 일시 희롱삼아 하셨던 말씀으로, 꼭 등용을 표방하셨던 바는 아니었음은 저 류승선(류치명)의 말과 같다.
대개 구는 양수다. 그러므로 용이라 했으니, 그때 아홉 분 어른님들께서 막 운교를 내려 설성땅을 지나시던 길이었다. 지닌 보배를 시험하지 못한 채 청운의 기약은 늦어간다는 그 점(占)은 쓰지 말라고 했다. 그 바위에 둘러 앉아 바위를 보고 용과 같다고 여겨 3자(九龍巖)로 명명했으니, 징조를 이미 나타낸 것이다. 그 점괘는 재전(在田; 周易의 見用在田이니, 登科出를 뜻함)이라, 그 뒤 더러는 맞고 더러는 맞지 않아서 아홉 가운데서 넷이 얻은지라, 이는 주역의 구사(九四)는 ‘혹약무구지상(或躍无咎之象:혹 進出 혹 隱退로 무난하다는 뜻)이라는 괘상이다. 그러고 보니, 선군자께서 명명하신 것이 또한 어찌 우연이라고 말할 것인가.
어허! 세월은 자주 변하고 인사는 기다리지 않아서, 상하 오십여 년에 아홉 분 어른님들께서는 선후해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애틋한 추모의 감회는 구가의 자제된 이로서 마땅히 다를 바 없으려니와, 더욱 나의 경우는 중씨마저 세상에 계시지 않으니 그 감회가 어떠하겠는가.
대개 수계란 옛적부터 있어온 일이다. 난정(蘭亭 : 東晋의 王羲之가 會稽山 아래 蘭亭에서 司徒謝安, 辭賦의 名家 孫綽, 高僧支遁등 四十餘人의 風流人士들을 모은 稧會), 향사(香社 : 唐나라 詩人 白洛天이 香山에서 九老로 맺은 모임)로부터 기영(耆英 : 宋나라 때 벼슬에서 물러난 學德이 높은 老人들의 모임), 진솔(眞率)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그 위치한 자리로 이름을 붙였었는데, 이제 이 계(九龍巖)로 보면 바위는 영서에 있고 수계는 영외에서 닦으니, 그 이름과 위치가 서로 맞지 않는다고 하겠다. 그러나 고사(蘭亭 香社등)를 감념(感念)하여 이 계를 비롯한 것은 진실로 깊은 뜻이 있음을 알아야겠다. 이 계를 계승하여 한결같이 이끌어 가면 이 계는 장차 저 바위와 더불어 길이 존속될 것이니, 이는 구가의 후손 된 이 다함께 힘써야 할 것이다.
정미(헌종 13년, 1847) 십일월 하한 이응수 삼가 쓰다.
九龍巖稧 座目
李周楨 景詹 庚午 李龜星 彛瑞 丙子
柳晦文 燁如 戊寅 丁若琇 孟晉 辛巳
權 褘 懿甫 壬午 全一欽 聖中 壬午
朴時源 穉實 甲申 權 補 周甫 乙酉
李家淳 學源 戊子 李秉馨 幼道 壬辰
李秉淵 幼直 戊戌 權秉憲 景直 癸卯
李秉陽 于章 甲辰 全宗奫 鵬路 丙午
權周憲 景隣 丁未 權百憲 能一 戊申
朴宗喬 孟執 己酉 丁勉敎 士勇 庚戌
權儒憲 景珍 庚戌 權家憲 彦一 庚戌
朴宗垕 仲厚 壬子 丁顯敎 汝周 乙卯
李彙 濟父 甲戌 李彙潑 活父 戊寅
李彙澈 泂父 甲申 柳致明 誠伯 丁酉
李老淳 壽民 丁酉 李彙淵 靜父 丙辰
李彙濬 深父 丙寅 丁遠敎 朋來 戊辰
朴宗舒 仲儒 庚午 權彛憲 景則 辛未
丁集敎 成彦 辛未 李庭蓂 欽瑞 癸丑
李庭揚 顯可 戊午 李庭鏞 德容 庚申
李庭寧 仲殖 辛酉 李庭鳳 崗老 乙丑
權大奎 穉綱 丙寅 權大紹 士述 戊辰
李庭鴻 逵老 戊辰 權大紀 士綱 己巳
李庭德 而述 己巳 權大紳 士縉 庚午
朴堂壽 躋老 癸酉 權大甲 士玉 甲戌
朴庚壽 聖年 戊寅 朴亨壽 泰年 庚辰
權大緖 大瑞 壬午 朴祥壽 人瑞 壬午
李庭錫 而弼 癸未 朴明壽 道年 癸未
丁大觀 國賓 癸未 李晩杰 先必 庚辰
全秀學 穉升 丙辰 權大寅 士郁 庚寅
朴祖壽 根叟 丙戌 朴寧壽 範五 戊子
丁大運 行一 庚寅 李庭璧 而綴 壬辰
朴光壽 明五 丙申 金輝蘊 景玉 戊辰
金輝華 景實 辛未 朴禧壽 永休 癸卯
李晩嶠 汝晦 己亥 丁大頊 而頊 丙辰
柳止鎬 元佐 戊子 李彙有 範翁
李彙在 聖倫 李彙存 聖心
李晩燾 觀必 壬寅 李晩孝 順則 乙巳
李晩鈺 相必 甲寅 朴泓壽 德年 丁酉
丁大昌 顯文 庚戌 丁大灝 而叔 癸丑
李 澂 帶卿 壬申 李 瀅 粹卿 丙子
李 潤 靜久 庚辰 權應休 天若 丁亥
李 瓊 次卿 丁亥 李 珽 晋卿 庚寅
權應鉉 耳賢 辛卯 李 璫 耳玉 癸巳
權應運 汝會 癸巳 朴齊喆 士吉 戊戌
權應壽 汝鏗 甲辰 朴齊兢 克用 辛丑
朴齊羽 木汝 辛丑 朴齊赫 赤也 壬寅
李 珍 壬午 全祜烈 賀伯 壬子
全相烈 衡仲 乙卯 朴齊兟 振一 甲辰
朴齊竝 立如 乙巳 朴齊朋 友善 丁未
朴齊珏 玉汝 己酉 朴齊弼 汝賓 辛亥
丁泰燮 羲明 癸丑 權在璇 舜衡 甲寅
權應洪 聖範 丙午 權在政 舜七 辛亥
朴齊昌 周一 壬子 朴齊圭 玄卿 己未
李 列卿 丁巳 李 喜卿 辛酉
全應烈 顯叔 丁巳 朴齊顯 世叔 庚申
權在璣 汝衡 丙辰 朴齊建 而極 癸亥
朴齊運 而斗 戊辰 朴齊順 孝叔 己巳
朴齊宣 文可 己巳 李 瓁 殷卿 戊辰
丁興燮 致中 丁巳 權在駉 聖逸 庚午
丁敦燮 伯崇 庚午 丁鎬燮 相武 癸酉
權命淵 世潤 癸卯 李中業 廣初 癸亥
李中肅 聖初 庚午 李中馥 允初 丙子
李晩肇 基述 癸未 李晩啓 卿沃 甲申
李晩綮 季肯 癸巳 李晩瓛 文可 丙申
李晩璡 甲辰 李晩韺 咸仲 乙巳
李晩炯 光仲 癸丑 丁斅燮 戊寅
丁鍊燮 庚辰 朴齊凙 春可 戊寅
朴齊頊 賢叔 戊寅 李中執 一初 己卯
李中莊 辛巳 柳淵博 景深 甲辰
徐相奎 德明 庚戌 金福淵 卓汝 甲辰
丁致燮 李鍾濩 大彦 己亥
李鍾永 聲遠 甲辰 權命九 象先 乙巳
權命海 禹文 己酉 李鍾佐 聖弼 癸丑
權命鎬 汝八 乙卯 李鍾鶴 聖華 丁巳
朴震陽 春叔 壬戌 李鍾喆 而吉 癸亥
朴雲陽 禮卿 甲子 權昇鎬 乙丑
朴冕陽 冠五 辛未 丁奎赫 文卿 辛未
權國鉉 聖觀 壬申 全奎國 會應 壬申
李綱欽 聖目 癸亥 權命周 姬八 乙亥
權世鎬 周百 乙亥 李中允 聖執 辛亥
李中弴 英彦 乙卯 李中標 丁巳
李中逵 鴻擧 庚申 李中濟 景楫 壬戌
李中伯 希聖 乙丑 李中祈 允一 丁卯
李中鴻 漸卿 丁卯 李中栻 武卿 辛未
李中佑 甲戌 李中琥 士彙 戊寅
朴昊陽 景初 辛未 朴弼陽 景老 甲戌
朴耆陽 養初 丙子 丁奎喆 丙子
朴鼎陽 士鉉 癸酉 朴遇陽 尙弼 甲戌
朴兌陽 悅初 丙子 朴斅陽 學汝 甲寅
朴离陽 允一 庚午 朴進陽 聖從 庚辰
全奎魯 文彦 辛巳 朴麟陽 子昭 甲申
朴宇陽 景洪 甲申 朴理陽 公弼 甲申
朴在陽 應龍 乙酉 朴宣陽 和鄕 己丑
朴緯陽 繼仲 庚寅 朴紀陽 景七 癸巳
權重鎬 丁亥 丁奎漢 會五 甲午
柳東蓍 羲贊 丙戌 李贊鎬 瑞會 癸酉
李周鎬 辛巳 朴勝鳳 儀伯 丁丑
李承鼎 國寶 乙亥 李承仁 元善 己卯
李承泰 國彦 辛巳 李承欽 元敬 乙酉
權承胤 丙戌 權承烈 戊子
李承愚 敬發 丙戌 朴勝華 淳夫 己丑
朴勝觀 甲申 權寧夏 禹卿 戊子
全秉錫 性夫 乙未 李承復 景陽 乙酉
李承恒 觀之 庚寅 權承業 庚寅
李承達 德三 己丑 權寧國 德咸 壬辰
權寧乙 仲咸 丙申 朴勝烈 道承 癸巳
金東泰 聖夫
출처 http://blog.naver.com/ksp2440/220340239551
' 인물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승정원일기 고찰[전성유(全性有)] (0) | 2015.11.21 |
---|---|
처사 전공 묘갈명 병서〔處士全公墓碣銘 幷序〕 (0) | 2015.11.19 |
승정원일기 고찰[전광석(全光錫)] (0) | 2015.11.15 |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찰 [전근(全謹)] (0) | 2015.11.13 |
판서 전경선(全敬先)에 대한 만사(挽詞) (0) | 2015.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