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연지(硯池)의 유래(由來) [전치원(全致遠)]

2018. 3. 20. 19:28 인물열전

연지(硯池)의 유래(由來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28번지는 옛날부터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산()이다.

이 산의 해발높이는 500m이며 여기에 못이 있으니 이름하여 못재(硯池)’라 한다.

이 산의 형체(形體)가 마치 붓과 같으며 못은 연수(硯水)와 같아서 상봉(上峰)필봉(筆鋒)’이라하고 못은 연지(硯池)’라고 한다.


이 연지(硯池)를 지질학자인 부산대학교 김항묵 교수는 여러 가지 조사결과 천연적(天然的)으로 생긴 못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조성한 못이라고 결론을 지웠다.

다만 이 못의 특징을 말하자면 못의 둘레가 100m정도이고 못의 수량(水量)은 사계절에 관계없이 언제나 평준(平準)의 수위(水位)를 유지하고 있으며 수중(水中)에는 순채(蓴菜)’라는 희귀한 식물이 군락(群落)을 이루어 살고 있다. 순채의 줄기에는 끈끈하고 미끄러운 액체(液體)가 맺혀있는데 이 액체가 만병통치제(萬病通治劑)라 하여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깊은 호기심(好奇心)을 가지고 이 액체를 따먹기 위해 늦은 봄부터 가을까지 인적(人跡)이 끓이지 않았다


八溪(초계) 야담(野談)에 탁계(濯溪)선생께서 부모님 상()을 당하여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묘지(墓地)를 찾고 있을 때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말하기를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십리를 가게 되면 가히 길지(吉地)를 얻을지니라.”

하거늘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 곧장 서쪽으로 십리를 가보니 그곳에 못(硯池)이 있고 못 위에서 커다란 호랑이가 잠을 자다가 벌떡 일어나 여러 차례 고개를 끄덕이더니 못 위 지점에 앞발로 큰 획()을 남기고 사라지기에 그곳이 명당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 묘지를 잡았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

이곳에 탁계선생의 부친 종사랑(從仕郞) 전인(全絪) ()의 묘소(墓所)가 필봉(筆峰)과 연지(硯池) 사이에 있습니다.


전하는 말로는 필봉과 연지의 정기(精氣)를 자손 대대로 물려받았는지 예로부터 전무둔필(全無鈍筆)이라는 문자(文字)가 입증(立證)이라도 하듯 아들 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1) 선생은 일찍이 글씨 잘 쓰기로 명망(名望)이 높아 이퇴계(李退溪) 선생의 신주(神主)를 비롯하여 조남명(曺南冥)(2), 이황강(李黃江)(3) 양선생(兩先生)의 묘갈명(墓碣銘)을 쓰셨다.

손자(孫子) 두암(斗岩) 전형(全滎)(4) 선생(先生)은 김해에 있는 김수로왕(金首露王) 비문(碑文)과 초계향교 풍화루(風化樓)등 많은 글씨가 오늘날 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특히 서기1936(仁祖14) 우리나라의 조정에서는 일본과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통신사절단(通信使節團)을 일본국에 파견할시 두암(斗岩)선생께서도 그 일원이 되어 일본에 건너가 글씨로서 많은 일화(逸話)를 남기고 귀국할 무렵 일본 조정에서는 선물의 일환으로 도적(盜賊)의 월장(越墻)을 막는데 필요한 풀이라고 하면서 이상한 풀씨를 주기에 선생께서 이 풀씨를 받아가지고 귀국하였다. 집주위에 뿌렸더니 기이하게도 이풀은 독기가 있어 만지면 벌처럼 쏘는 것이었다. 이풀의 이름이 쐐기풀이라 하며 지금까지도 선생의 고가(古家)였던 합천군 쌍책면 신촌 집주위에는 이 풀이 400여 년간 생존(生存)해 내려오고 있다.



(1) 전치원[全致遠]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의병장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대기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낙동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저지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학문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치원 [全致遠] (두산백과)


(2) 조식[曺植]

조선 중기 학자.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단계적이고 실천적인 학문방법을 주장하였으며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의 특징적인 학풍을 이루었다.

: 남명(南冥)

[네이버 지식백과] 조식 [曺植] (두산백과)


(3) 이희안[李希顔]

조선의 학자. 자는 우옹(愚翁), 호는 황강(黃江). 본관은 합천(陜川). 참판 윤검(允儉)의 아들, 교리 희민(希閔)의 아우. 김안국(金安國)의 문하에서 배우고 10세에 능히 문장을 이뤄 14세에 사마에 합격하였다. 1538(중종 33) 이회재(李晦齋)의 천거로 참봉이 되었다가 고령(高靈) 현감을 거쳐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에 이르러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남명(南溟) 조식(曹植)과 서로 도의로 사귀었으며 재행으로 이름 높았다. 사후 초계(草溪)의 청계(淸溪)서원에 모셨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희안 [李希顔] (인명사전, 2002. 1. 10., 민중서관)


(4) 전형[全滎]

조선 인조(仁祖) 때의 서예가. 본관 전주(全州). 자 달보(達甫). 호 매은(梅隱).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636(인조 14) 통신사 임광(任絖 )일행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글씨로 명성을 떨쳤으며, 1647년 김해(金海)가락국김수로왕비(駕洛國金首露王碑)의 비문을 썼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형 [全滎] (두산백과)



출처 http://blog.daum.net/eurocampingcar/8758916

출처 : 전씨(全氏) 광장
글쓴이 : 전과웅 (55세/정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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