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7. 12:56ㆍ 인물열전
[분수대] 명절증후군
[중앙일보]
대한민국 주부라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빚(?)이 하나 있다. 1983년 일본 여행을 갔던 주부단체 회원들이 빠짐없이 일제 ‘코끼리 전자밥솥’을 사온 게 대서특필된 적이 있다. 시중에 비난 여론이 들끓었지만 당시 대통령은 주부들을 탓하는 대신 “밥통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밥통들”이라며 아랫사람들에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6개월 내에 밥솥 못 만들면 밥 먹을 생각들 말라”는 엄명에 전문가들이 죄다 모여 양질의 국산 전자밥솥 개발에 나섰다는 것이다(손성진, 『럭키 서울 브라보 대한민국』).
그 사건을 계기로 물 넘칠까 밥 탈까 노심초사할 필요 없이 물만 부으면 밥이 되는 전자밥솥이 대중화됐으니 주부들로선 고마울 따름이다. 세탁기 역시 가사를 획기적으로 줄여준 일등공신이다. 일일이 손으로 빨아 짜고 말리는 힘든 과정이 버튼 몇 번 누르는 걸로 해결되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올봄 교황청이 세탁기를 ‘여성 해방에 가장 기여한 물건’으로 치하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들 가전제품의 탄생은 여성의 사회 진출과 관련이 깊다. 1, 2차 세계대전 중 남자들 빈자리를 대체했던 여자들이 이후 본격적인 산업 역군으로 나서자 가사 부담을 줄여줄 필요가 생긴 거다. 실제로 여자들이 집안일 하는 시간은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 미국 여성의 경우 76년 주당 평균 26시간을 가사 노동에 썼지만 요즘은 17시간 안팎이라고 한다.
문제는 남녀 간 격차는 여전하다는 점이다. 미주·유럽 8개국을 조사해보니 여자와 남자가 얼추 7대3의 비율로 가사를 분담하는 걸로 나타났다(2007년 미국 조지메이슨대). 한국은 그 차이가 더 심하다. 한국·미국·독일을 비교한 또 다른 조사 결과 한국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하루 평균 46분으로 여성(4시간9분)의 5분의 1에도 못 미쳤다. 미국·독일 남자들에 비해도 3분의 1에 불과하고 말이다(2005년 통계청).
명절증후군은 바로 이런 현실이 낳은 병이다. 특히 맞벌이 주부라면 남편은 TV 앞에서 뒹구는데 자기만 차례상 차리느라 허리가 휘는 명절이 우울할 수밖에 없다. ‘온라인 주문 차례상’이란 해법이 그래서 나왔을 터다. 하긴 굳이 나쁘게만 볼 일도 아니다. 클릭 한 번으로 명절 준비 끝내고 남는 시간은 모처럼 부부간 애정을 돈독히 하는 데 쓴다면 어떨까. 그래서 자손만 안겨드린다면 조상님도 타박 않고 맞춤 음식을 흠향하시지 않을까.
신예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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