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21. 12:34ㆍ 인물열전
정선전씨 27세 삼별초 의병장 금오위대장군 전라도도병마사
전공열 (全公烈)
고려시대 삼별초의 의병장으로 공을 세웠습니다. 후에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 전라도도병마사(全羅道都兵馬使)를 역임하였습니다.
제3차 침입때 몽고병이 남하하여 전주와 고부지경까지 범한 일이 있었으며, 부령별초 의병장인 전공열이 거느린 지방 의용군이 부여 고란사 근처에 잠복했다가 몽고 기병 20인을 추격하여, 그 중 2명을 사살하고 병기와 군마 20여필을 빼앗은 일이 있었다.
고려사 고종 편에 기록된 자료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제23대 고종( 高宗,1213~1259)
고려사 번역문 > 《고려사》 제23권 - 세가 제23 > 고종 2 >
고종 병신 23년(1236)
병신 23년(1236) 봄 정월 정해일에 대장군 이령장(李令長)을 동북면 지 병마사로, 판소부감사(判少府監事) 손습경(孫襲卿)을 서북면 지 병마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2월 초하루 무자일에 내전에 소재(消災) 도량을 베풀었다.
경자일에 연등회를 열고 왕이 봉은사에 갔다. 왕이 내시 유종경(柳宗卿), 최종경(崔宗敬) 등에게 명령하여 진양부(晉陽府-최우의 집)에 화주(花酒)를 보내게 하였으며 이튿날 대회(大會)에도 그렇게 하였다.
임인일에 내전에서 간소한 연회를 배설하였다. 이날 승선(承宣) 채송년(蔡松年)이 왕에게 복야 송경인(宋景仁)은 평소에 처용놀이(處容戱)을 잘 한다고 아뢰었다. 송경인이 술에 취한 김에 처용놀이를 하면서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었다.
계축일에 태자비가 아들 심(諶)을 낳았다.
여름 4월 기해일에 우박이 내렸는데 굵기가 밤만하였다.
5월 임신일에 수 사공 태집성(太集成)이 죽었다.
병자일에 장주(長州) 방수소(防戍所)로부터 몽고 기병 50여 명이 관동(關東)에 들어왔다는 것을 급보하였다.
무인일에 박희(朴曦) 등에게 급제를 주었다.
6월 초하루 병술일에 왕이 봉은사에 갔다.
경인일에 몽고군이 의주강(義州江)을 건너와서 오물지천(烏勿只川)에 진을 치고 또 영삭진(寧朔鎭)에 진을 쳤으며 계사일에는 육격병(遊擊兵)이 가주(嘉州)에 와서 진을 쳤고 을미일에는 안북부(安北府)의 운암역(雲岩驛)에 진을 쳤는데 가주, 박주(博州) 두 고을 사이에 화기가 하늘에 닿았었다. 그들은 또 선주(宣州) 형제산(兄弟山) 들판에 도합 17개소의 진을 쳤고 병신일에는 자주(慈州), 삭주(朔州), 구주(龜州), 곽주(郭州) 등지에 진을 둘러쳤다.
정유일에 각 도(道) 산성에 방호별감(防護別監)들을 파견하였다.
무술일에 몽고군의 선봉이 황주(黃州)에 들어오고 경자일에는 신주(新州), 안주(安州) 두 고을에 들어왔다.
가을 7월 신유일에 몽고군이 개주(价州)에 들어왔다. 경별초(京別抄) 교위(校尉) 희경(希景) 개주 중랑장 명준(明俊) 등이 군사를 숨겼다가 양쪽으로 들이쳐서 적을 살상한 것이 자못 많았고 말안장, 활, 화살, 의복 등 물품을 빼앗았다.
장주(長州) 낭장 광대(光大) 등이 정주(定州)에 이르러 몽고 군사 2명을 사로잡았다.
정묘일에 최우(崔瑀)의 외손자인 내급사(內給事) 김정(金晸)을 수 사공 주국으로 임명하였더니 최우가 김정은 나이가 젊기 때문에 적당하지 않다 하여 굳이 사양하였다.
계유일에 몽고 기병 20여 명이 자주(慈州) 동쪽 들판에 침입하여 벼를 베던 농민 20여 명을 사로잡아 전부 죽였다.
8월 정해일에 내전에 소재(消災) 도량을 베풀었다.
무자일에 동여진의 원병(援兵)인 기병 백 명이 요덕(耀德), 정변(靜邊)에서 영흥창(永興倉)으로 갔다.
갑오일에 내전에 공덕천(功德天) 도량을 베풀었다.
정유일에 몽고군이 자주(慈州)를 함락시켰다. 부사(副事) 최경후(崔景侯), 판관 김지저(金之佇)와 은주(殷州) 부사(副使) 김경희(金景禧) 등이 모두 살해를 당하였다.
병오일에 석도(席島) 방호별감(防護別監)이 몽고군 3명을 사로잡아 서울로 압송하였다.
정미일에 몽고군 백여 명이 온수군(溫水郡)으로부터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차현현(車懸縣)으로 갔다.
무신일에 몽고군이 남경, 평택(平澤), 아주(牙州), 하양창(河陽倉) 등지에 각각 진을 쳤다.
기유일에 야별초(夜別抄) 지유(指諭)들인 이림수(李林壽), 박인걸(朴仁傑) 등이 각각 1백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몽고군의 병영으로 향하였다.
9월 정사일에 몽고군이 온주군(溫州郡)을 에워싸매 그 고을 아전 현려(玄呂) 등이 성문을 열고 나가 싸워서 적을 크게 부수고 적 2명의 목을 베었으며 우리측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2백여 명이요, 노획한 병기가 매우 많았다. 왕은 그 고을 성황당 귀신이 음으로 도와 준 공이 있다 하여 성황당에 신호(神號)를 더 붙여 주고 현려를 그 고을 호장(戶長)으로 임명하였다.
임술일에 몽고군이 죽주(竹州)에 와서 항복을 권유하매 방호별감(防護別監) 송문주(宋文胄)가 힘껏 싸워서 적을 쫓아 버렸다.
임신일에 왕이 현성사(賢聖寺)에 갔다.
겨울 10월 갑오일에 전라도 지휘사 사장군 전보구(田甫龜)가 보고하기를 몽고군이 전주(全州), 고부(古阜) 경내에 들어왔다고 하였다.
무술일에 내전에 소재(消災) 도량을 베풀었다.
계축일에 부령(扶寧) 별초(別抄)로서 의업(醫業) 과거에 응시하였던 거인(擧人) 전공렬(全公烈)이 고란사(高闌寺) 산길에 군사를 숨겼다가 몽고 측 기병 20명을 마주쳐서 2명을 죽였으며 병기와 말 20필을 빼앗았다. 전공렬에게 상을 주고 그의 본업(本業)으로 벼슬을 종사하게 하였다.
11월 병인일에 팔관회를 열고 왕이 법왕사(法王寺)에 갔다. 이날 내시 소부감 유석(庾碩)을 시켜 진양부(晉陽府-최우의 집)에 주과(酒果)를 보내 주었고 이튿날도 그렇게 하였다.
12월 무자일에 야별초 박인걸(朴仁傑) 등이 공주(公州) 효가동(孝加洞)에서 몽고군과 싸웠는데 전사자가 16명이었다.
계묘일에 대흥현(大興縣)에서 보고하기를 몽고군이 여러 날에 걸쳐 성을 침공하므로 성문을 열고 나가 싸워서 적을 크게 부수고 많은 병기를 빼앗았다고 하였다.
임자일에 박문성(朴文成)을 지문하성사로 송경인(宋景仁), 채송년(蔡松年)을 다 추밀원 부사로, 송윤(宋允), 최종재(崔宗梓)를 모두 좌우복야로, 전보구(田甫龜)를 좌승선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 거인(擧人)=향시에 합격하여 회시에 응하는 사람인 바 거자라고도 함.
◎고려사 원문(高麗史 原文)
고종 병신 23년(1236)
○ 二十三年 春正月 丁亥 以大將軍李齡長爲東北面知兵馬事判少府監事孫襲卿爲西北面知兵馬事.
▣ 二月 戊子 朔設消災道場于內殿.
▣ 庚子 燃燈王如奉恩寺命內侍柳宗卿崔宗敬賜花酒于晉陽府翌日大會亦如之.
▣ 壬寅 曲宴于內殿承宣蔡松年奏 僕射宋景仁素善爲處容戱 景仁乘酣作戱略無愧色.
▣ 癸丑 太子妃生子諶.
▣ 夏四月 己亥 雨雹大如栗.
▣ 五月 壬申 守司空太集成卒.
▣ 丙子 長州防戍所馳報 蒙兵五十餘騎入關東.
▣ 戊寅 賜朴曦等及第.
▣ 六月 丙戌 朔王如奉恩寺.
▣ 庚寅 蒙古兵渡義州江屯烏勿只川又屯寧朔鎭. 癸巳 遊兵來屯嘉州. 乙未 屯安北府雲岩驛嘉博二州之閒火氣連天 又於宣州兄弟山之野分屯凡十七所. 丙申 遂遍屯慈朔龜郭之閒.
▣ 丁酉 分遣諸道山城防護別監.
▣ 戊戌 蒙兵先鋒入黃州. 庚子 至信安二州.
▣ 秋七月 辛酉 蒙兵至价州京別抄校尉希景价州中郞將明俊等伏兵夾擊殺傷頗多取鞍馬弓矢衣服等物.
▣ 長州郞將光大等至定州擄蒙兵二人.
▣ 丁卯 以崔瑀外孫內給事金晸守司空柱國瑀以年少不稱固辭.
▣ 癸酉 蒙兵二十餘騎入慈州東郊擄刈禾民二十餘人皆殺之.
▣ 八月 丁亥 設消災道場于內殿.
▣ 戊子 東女眞援兵百騎自耀德靜邊趣永興倉.
▣ 甲午 設功德天道場于內殿.
▣ 丁酉 蒙兵陷慈州副使崔景侯判官金之佇殷州副使金景禧等皆被害.
▣ 丙午 席島防護別監擒蒙兵三人檻送于京.
▣ 丁未 蒙兵百餘人自溫水郡南下趣車懸峴.
▣ 戊申 蒙兵分屯于南京平澤牙州河陽倉等處.
▣ 己酉 夜別抄指諭李林壽朴仁傑各率一百餘人分向蒙兵屯所.
▣ 九月 丁巳 蒙兵圍溫水郡郡吏玄呂等開門出戰大敗之斬首二級中矢石死者二百餘人所獲兵仗甚多王以其郡城隍神有密祐之功加封神號以呂爲郡戶長.
▣ 壬戌 蒙兵至竹州諭降防護別監宋文胄力戰走之.
▣ 壬申 幸賢聖寺.
▣ 冬十月 甲午 全羅道指揮使上將軍田甫龜報 蒙兵至全州古阜之境.
▣ 戊戌 設消災道場于內殿.
▣ 癸丑 扶寧別抄醫業擧人全公烈伏兵於高闌寺山路邀擊蒙兵二十騎殺二人取兵仗及馬二十餘匹賞公烈聽本業入仕.
▣ 十一月 丙寅 設八關會幸法王寺命內侍少府監庾碩賜酒果于晉陽府翌日亦如之.
▣ 十二月 戊子 夜別抄朴仁傑等遇蒙兵於公州孝加洞與戰死者十六人.
▣ 癸卯 大興官報 蒙兵來攻城數日開門出戰大敗之多獲兵仗.
▣ 壬子 以朴文成知門下省事 宋景仁蔡松年並爲樞密院副使 宋允崔宗梓爲左右僕射 田甫龜爲左承宣.
참고로 몽고의 고려침입을 정리해 봅니다.
원인: 몽고는 고려와 협약을 맺고 고려는 매년 많은 폐물을 몽고에 주기로 하였다.
그 뒤 고종 12년 정월 몽고 사신 제고여(諸古與)가 압록강을 건너 귀국도중 도적에게 피살되니
몽고는 고려인의 소행으로 오인하여 양국의 국교는 단절되고 여러 차례 침략을 받게 되었다.
제1차 침입(고종 18년 8월 ~ 고종 19년 1월)
몽장 철례탑 몽군철수 후 강화환도
제2차 침입(고종 19년 8월)
몽군 철례탑 전사
제3차 침입(고종 22년)
몽장 당올태 전주 경주 침입
경주 황룡사 목조구층탑 소실
제4차 침입(고종 34년 ~ 35년)
몽장 아모간 정종 몰 후 철수
제5차 침입(고종 39년)
몽장 야고(야굴)
제6차 침입(고종 42년 ~ 46년)
몽장 찰날아대(차라대) 몽고 침입이래 이 전화가 가장 격심함
♧ 도병마사 [都兵馬使]
고려시대의 국방회의기구(國防會議機構). 국가의 군기(軍機) 및 국방상 중요한 일을 의정(議政)하던 합의기관(合議機關)이다. 도병마사가 설치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며 1011년(현종 2)에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를 임명한 기록이 처음 나오므로 현종 초에는 도병마사가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도병마사는 989년(성종 8)에 설치된 동서북면병마사(東西北面兵馬使)의 판사제(判事制)에서 기원한다. 동서북면에 병마사(兵馬使) ·지병마사(知兵馬使) ·부사(副使) ·판관(判官) ·녹사(錄事)를 파견하여 방위임무를 맡게 하고, 중앙에서는 이를 통령(統領)하기 위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 ·중서령(中書令) ·상서령(尙書令) 을 판사(判事)로 삼았다. 그러나 문종 관제에 따른 도병마사의 관원 구성은 병마판사제와 차이가 있다.
문종 때에는 최고 정무기관인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5재(宰)가 판사(判事)를 겸하고, 6추밀 및 직사 3품 이상이 사(使)로 임명되었다. 이밖에 정4품 이상 경·감·시랑이 임명된 부사와 소경 이하가 임명된 판관이 있었다. 판관(判官) 이상의 관원들이 중대한 일이 있을 때 회동하여 국방문제를 결정하였다.
도병마사는 양계의 장졸(將卒)에 대한 상벌, 군사훈련, 국경문제 등 국방·군사관계의 일을 관장하였다. 또, 민생문제에도 관여하였는데, 처음에는 양계 주민들의 생활 안정에 대해 논의하다 점차 그 범위가 넓어져 전국 백성들의 구휼 방법까지 논의하였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무신란(武臣亂) 이후 기능이 마비되었다가 고종(高宗) 이후 몽골과의 투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기능이 재개되었는데, 기능면에서도 많은 변질을 가져와 국방문제뿐 아니라 국가의 모든 중대사에 관여하게 되었다.
1279년(충렬왕 5) 원(元)나라의 압력으로 관제가 개편됨에 따라 도병마사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개편되어 모든 국사를 합의 ·시행하는 최고 정무기관으로 상설되어 조선 개국 초까지 존속하다가 1400년(정종 2) 의정부(議政府)로 개편되었다.
♤금오위 [金吾衛]
고려시대의 군제(軍制)인 6위(六衛)의 하나로 도성 치안경찰 임무를 맡았다.
금오위라는 명칭은 당나라 중앙군제에서 차용하였다. 왕도(王都) 내외의 요소를 순찰·점검하는 치안경찰의 임무를 맡았으며, 정용군 6령(領:1령은 1,000명)과 역령(役領) 1령으로 구성되었다. 상장군(上將軍:정3품)·대장군(大將軍:종3품) 각 1명, 장군(정4품) 7명, 중랑장(中郞將) 14명, 낭장(郞將)·별장(別將)·산원(散員) 각 35명, 위(尉) 140명, 대정(隊正) 280명의 장교가 배치되었다.
그뒤 충선왕 때 명칭을 비순위(備巡衛)로 바꾸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금오위로,1362년에는 또다시 비순위로 고쳤으나, 1369년 또 금오위로 환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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