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거전씨(八莒全氏)

2009. 11. 23. 18:09 인물열전


◎ 팔거전씨(八莒全氏)


[상세내용]


본관 연혁


팔거(八莒)는 대구광역시 북구에 위치하였던 고려 초기의 지명으로 본래 팔거리현(八居里縣: 仁里)이라 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팔리현(八里縣)으로 고쳐서 수창군(壽昌郡: 大邱)의 속현이 되었다. 고려 초에 다시 팔거현(八居縣)으로 고쳤다가 뒤에 거(居)의 음이 전하여 거(莒)로 변하였다. 1018년(현종 9) 경산부(京山府: 星州)에 속하여 별호를 칠곡(七谷)이라 하였다. 1640년(인조 18) 가산(加山)에 산성을 쌓아 도호부(都護府)를 두어 고을 이름을 칠곡(七谷)이라 하였다. 1819년(순조 19) 가산산성에 있던 관아를 평지인 팔거현 옛자리로 옮겨 칠곡읍의 터를 잡게 되었으며, 1981년 칠곡읍 일원이 대구광역시에 편입되었다. 다만 현재의 칠곡군과는 차이가 있다.


성씨의 역사


도시조(都始祖) 전섭(全聶)은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로 BC 18년 온조(溫祚)가 백제를 개국할 때 오간(烏干), 마려(馬藜),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간(屹干), 곽충(郭忠), 한세기(韓世奇) 등 9사람과 함께 공을 세워 십제공신(十濟功臣)으로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다.

전씨(全氏)는 도시조인 전섭으로부터 18본이 분적되었으며, 우리나라 전씨는 단본이라 할 수 있다.

팔거전씨(八莒全氏) 시조 전원태(全元台)

 도시조 전섭(全聶)의 25세손으로 고려 충렬왕 때 예의부윤(禮義府尹)으로 있을 때, 합단군(哈丹軍)이 침입하자 이를 물리친 공으로 팔거군(八莒君)에 봉해졌다고 전한다. 후손들이 팔거(칠곡)를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合丹 兵來 侵 公 討平之  以封 八莒君  又采  星山君)

전원태의 아들인 전대(全代)는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증손 전광옥(全光玉)은 고양군수(高陽郡守)를 역임하였다고 한다.


[합단의 침입]


1290년(충렬왕 16년) 5월  원나라의 합단이 고려를 침입한 사건을 말한다.<<고려사절요>>권21

원나라의 반군 내안의 부장이었던 그는 만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원나라 장수 내만대에게 패하자 방향을 바꾸어 고려의 동북변을 침입하였다.

고려는 중군만호 정수기, 좌군만호 박지량, 우군만호 김흔으로 하여금 각각 금기산동·이천현계·권가현계를 지키도록 하는 한편, 원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합단의 무리는 원나라의 쌍성을 점령하고 고려의 등주(안변)를 함락하였으며, 이듬해 철령을 넘어 교주도의 양근을 점령하였다. 이에 왕은 강화로 파란하는 한편으로 원주별초 소속의 원충갑이 원주에 들어온 적을 물리쳤다. 원나라도 1만의 군사를 보내 고려를 도왔다.

원주에서 패한 합단의 무리들은 계속 남하하여, 주력은 충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들은 다시 연기에 집결하였다가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의 급습으로 대패하였다. 그들의 기병부대는 다시 전열을 정비하였으나 한희유의 추격으로 합단과 아들 노적은 2,000여 기를 이끌고 북쪽으로 도망하였다. 이로써 1년 6개월 동안의 합단의 침입은 끝나고 9월 왕은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요동 방면에서 한반도에 침입하는 경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압록강을 넘어 의주나 강계 등지로 들어오는 길과 지금의 개원 등지에서 백두산 북쪽을 돌아 두만강 유역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길입니다.

홍건적 같은 경우는 압록강을 넘어 들어온 경우이고, 합단은 두만강 유역(남경 등지)을 거쳐 들어온 경우입니다.

아래 기사를 보면서 해양, 철령, 남경, 화주, 등주 등 지명에 유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합단(哈丹)의 침입

경인15(1290), 원 지원 27년

○ 5월

합단(哈丹)이 해양(海陽) 지방에 침입해 왔다.

○ 군사를 점검하는데, 5품 이하의 문관으로부터 내시(內侍)ㆍ다방(茶房)ㆍ3관(三官)ㆍ5군(五軍)ㆍ금학양관(禁學兩官)에 이르기까지 모두 종군하게 하였다.

○ 장군 김연수(金延壽)를 원 나라에 보내어 합단이 침입했음을 보고하게 했다.

○ 6월에 대장군 한신(韓愼)에게 명하여, 서경(西京)의 군사를 거느리고 동계에 가서 합단을 방어하게 하였다.

○ 장군 김흥예(金興裔)를 원 나라에 보내어 매를 바치게 했다.

○ 김연수가 원 나라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조하기를, “적을 토벌할 군사가 고려에 이르자면 길이 돌아서 멀 것이니, 마땅히 함평부(咸平府)로부터 남경해양(海陽)으로 나가 적의 길을 단절하도록 하라." 하였다.

○ 가을 7월에 다시 서북 여러 성(城)에 수령을 두고, 장군 정복균(鄭復均)을 서경유수로 삼았다.

○ 원 나라의 개원로(開元路) 다루가치(達魯花赤) 팔독만(八禿滿)이 사신을 보내어 군량을 요구하였다.

○ 11월에 국사(國史)와 보문각(寶文閣)ㆍ비서시의 문적을 강화도로 옮겼다.

○ 대장군 유비를 원 나라에 보내어, 합단쌍성에 침입한 것을 보고하게 했다.

○ 궁인들을 강화도로 옮기고, 또 태조의 소상(塑像)을 옮겼다.

○ 원 나라에서 평장사 사리첩목아(闍梨帖木兒)를 보내어 합단을 토벌하는 것을 돕게 하였는데, 사리첩목아가 사람을 보내 와 고하기를, “국왕은 마땅히 서울에 머물면서 우리 군사를 호궤(犒饋)해야 한다." 하였다.

○ 12월에 안전(安戩)을 충청도 도지휘사로 삼았다.

합단의 군사 수만 명이 화주(和州)와 등주(登州) 두 고을을 함락시켜, 사람을 죽여서 양식으로 하고 부녀자들을 윤간하고는 포(脯)를 떴는데, 만호 인후(印侯)를 보내어 이를 방어하게 했다.

○ 원 나라의 평장사 설도간(薛闍干)ㆍ사리첩목아(闍梨帖木兒)와 우승(右丞) 탑출(塔出) 등이 보기병(步騎兵) 1만 3천 명을 인솔하고 왔다.


신묘 17년(1291), 원 지원 28년

○ 봄 정월에 합단의 군사가 장차 철령(鐵嶺)에 이르려 하니, 방수만호(防守萬戶) 정수기(鄭守琪)가 소문만 듣고 도망해 왔으므로 순마소(巡馬所)에 가두었다. 철령은 길이 좁아 겨우 한 사람밖에 통하지 못하여, 합단의 군사가 모두 말에서 내려 한 사람씩 줄지어 올라왔다. 이때 적들은 몹시 굶주렸으나, 수기가 버리고 간 양곡을 거두어 수일 동안 진탕 먹고, 북을 울리며 전진해서 드디어 고개를 넘어 교주도(交州道)로 들어오니, 김흔(金忻) 등이 모두 지키지 않고 달아났다. 적은 곧 양근성(楊根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 갑인일에 합단이 원주(原州)에 주둔하고, 50명의 기병(騎兵)이 치악성(雉岳城) 아래에 이르러 소와 말을 약탈해 갔다. 원주 별초 향공진사(原州別抄鄕貢進士) 원충갑(元沖甲)이 보병 6명을 인솔하고 이를 추격하여, 적의 말 8필을 빼앗아 돌아왔다.

○ 무오일에 적 도라도(都剌闍)ㆍ독어내(禿於乃)ㆍ발란(孛蘭) 등이 군사 4백 명을 거느리고 또 성 아래에 이르러, 운반하는 본주의 녹봉미(祿俸米)를 획득하고 매우 기뻐하였는데, 충갑이 결사대 중산(仲山) 등 7 명과 함께 나아가서 이를 엿보고 있다가, 중산이 먼저 적 속에 뛰어들어 한 사람의 목을 베고, 이어 형문(荊門) 밖까지 추격하였다. 적이 모두 안장한 말을 버리고 달아나 말 25필을 얻으니, 방호별감(防護別監) 복규(卜奎)가 크게 기뻐하여 노획한 안장한 말을 그에게 주었다.

○ 세자가 황제를 뵙고 합단을 토벌하기를 청하니, 황제가 나만대대왕(那蠻歹大王)에게 명하여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 2월에 세자가 장군 오인영(吳仁永)을 시켜서 황제께 아뢰기를, “합단군이 북계(北界)의 여러 성을 함락하였습니다." 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너희 나라는 당태종(唐太宗)이 친히 정벌하였어도 오히려 이기지 못하였고, 우리나라 초기만 하더라도 복종하지 않아 우리나라에서 여러번 정벌하였어도 또한 쉽사리 이기지 못했는데, 이번의 이 좀도둑에 대하여 어찌 그렇게 두려워하느냐." 하니, 인영이 아뢰기를, “고금의 성쇠가 같지 않은 탓입니다." 하니, 황제가 야전(夜戰)을 감행하라고 유시하였다.

○ 3월에 대장군 송화(宋華)를 보내어 개경(開京)의 궁궐을 지키게 하였는데, 송화가 합단적 10여 기를 만나 3명을 베고, 1명을 생포하였다.

○ 이천(利川) 사람 신비(申費)는 합단의 간첩과 내통하였고, 용강(龍岡) 사람 김철(金哲)도 적에 투항해서 향도(嚮導)가 되어 서울로 인도해 들어왔기 때문에, 모두 시장에서 목 베었다.


합단의 침입은 원사에도 비슷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新校本元史/本紀/卷十五 本紀第十五 世祖十二/至元二十六年

合丹兵寇胡魯口,開元路治中兀顏牙兀格戰連日,破之.

/新校本元史/本紀/卷十五 本紀第十五 世祖十二/至元二十六年

庚申,諸王乃蠻帶敗合丹兵於托吾兒河

/新校本元史/本紀/卷十六 本紀第十六 世祖十三/至元二十七年

丙寅,合丹餘寇未平,命高麗國發羅戍兵千人討之.賜河西質子軍五百人馬.丁卯,熒惑犯房.高麗國王王賰言:「臣昔宿京師,遭林衍之叛,國內大亂,高麗民居大同者皆籍之,臣願復以還高麗為民.」從之.己巳,改西南番總管府為永寧路.辛未,賜也速帶兒所部萬人鈔萬錠.豐閏署田戶饑,給六十日糧.無為路大水,免今年田租.癸酉,忻都所部別笳兒田戶饑,給九十日糧.降臨淮府為盱眙縣,隸泗州.復立興文署,掌經籍板及江南學田錢穀.合丹遼東海陽.

/新校本元史/本紀/卷十六 本紀第十六 世祖十三/至元二十七年

庚子,合丹復寇海陽

/新校本元史/本紀/卷十六 本紀第十六 世祖十三/至元二十七年

五月乙巳,罷秦王典藏司,收其印.括江南闌遺人雜畜、錢帛.合丹開元

/新校本元史/本紀/卷十六 本紀第十六 世祖十三/至元二十七年

九月壬寅,河東山潟饑,敕宣慰使阿里火者炒米賑之.癸卯,歲星犯鬼.申嚴漢人田獵之禁.乙巳,禁諸王遣僧建寺擾民.敕河東山潟宣慰使阿里火者發大同鈔本二十萬錠,糴米賑饑民.平章政事闍里鐵木兒帥師與合丹戰于瓦法,大破之.

/新校本元史/本紀/卷十六 本紀第十六 世祖十三/至元二十七年

詔諸王乃蠻帶、遼陽行省平章政事薛闍干、右丞洪察忽,摘蒙古軍萬人分戍雙城及婆娑府諸城,以防合丹兵.

/新校本元史/本紀/卷十六 本紀第十六 世祖十三/至元二十八年

從遼陽行省言,以乃顏、合丹相繼叛,詔給蒙古人內附者及開元、南京、水達達等三萬人牛畜、田器.詔嚴益都、般陽、泰安、寧海、東平、濟寧畋獵之禁,犯者沒其家貲之半.


주요 세거지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남곡리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팔거전씨는 34가구 총 115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莒 감자

㉠감자(가짓과의 여러해살이풀) ㉡나라 이름 ㉢성(姓)의 하나


[참고문헌]


《姓氏의 고향》(중앙일보사, 2002)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傳統族譜文化社(http://www.genealogy.co.kr)

성씨정보(http://www.surname.in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