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22. 22:08ㆍ 인물열전
정란공신 금자광록대부 상주국 대장군
( 定亂功臣 金紫光祿大夫 上柱國 大將軍 )
전 존 걸( 全 存 傑 )
?∼1193(명종 23).
고려의 무신이시다.
정란공신(定亂功臣)에 책정 되셨다. 후에 금자광록대부상주국(金紫光祿大夫上柱國)을 증하였습니다.
子는 경상도순문사를 역임한 전수룡과 호부상서를 역임한 전수송입니다.
1193년에
운문(雲門)의 김사미(金沙彌), 초전 (草田)의 효심(孝心) 등이 난을 일으키자 봉기한 남적 가운데 세력이 가장 큰자는 운문의 김사미와 초전의 효심이었다.
그들이 망명한 사람들을 규합해서 주, 현을 습격 약탈하였으며 왕은 그것을 걱정하여 대장군 전존걸을 파견하면서 장군 이지순, 이공정, 김척후, 김경부, 노식 등을 통솔하고 토벌케 하였다. 그 중 장군 이지순은 이의민의 아들이었다.
이의민은 일찍이 자기 꿈에 무지개가 양편 겨드랑이에서 일어 났으므로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또 옛 도참(圖讒)에 “용손은 12에 다 된다 (龍孫十二盡)란 말이 있고 또 십팔자자란 말을 들었다.
십팔자(十八子)란 이자(李字)이므로 왕위를 바라보게 되어 약간의 탐욕을 참고 명사 등을 등용해서 헛된 명망을 낚았으며 또 자기 출신이 경주라 내심으로 신라를 다시 일으킬 꿈을 가지고 김사미, 효심 등과 내통하였다.
그리고 적도들도 많은 재물을 이의민에게 주었다. 이지순도 만족을 모르는 욕심쟁이여서 적에게 재물이 많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낚으려고 적과 내통하여 적에게 식량, 의복, 신, 버선을 보내고 적은 금 은 보화를 보내왔다.
이러하여 군중(軍中)의 정보가 누설되어 여러 번 패전을 초래하였다.
전존걸은 본래 지략과 용맹이 이름난 장수였으니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분해해서 고하길 만일 군법으로 이지순을 처단하면 그의 부친(이의민)이 나를 죽일 것이다.
또 그렇지 않으면 적세가 더욱 강해 질 텐데, 장차 그 죄를 누가 질것인가 개탄하고는 음독자살하였다.
그러나 이 난은 7개월 만에 평정된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경대승이 갑자기 죽었다. 그동안 경대승의 기세에 눌려 경주에 숨어 있던 이의민이 개경으로 올라가 정권을 잡았다. 이의민은 정중부와 함께 무신정변을 일으켰을 때 자신의 손으로 의종을 죽인 자였다. 그 일로 그는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겼다. 그는 정권을 잡은 초기에는 개혁정치를 펴서 민심을 얻으려 하였으나 얼마 가지 않아 마각을 드러냈다. 그의 탐학은 어느 누구보다도 심하였다. 그의 부하들은 정치적 기반인 경주 등지에서 재물을 끌어모으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자겸의 척족정치와 정중부의 무신정권 기간에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경주의 낙향 문인과 현지세력들이 불만집단으로 도사리고 있었다.
1190년(명종 20) 정월, 경주를 중심으로 농민들과 불만집단이 연합하여 봉기의 불길을 당겼다. 이들의 봉기는 처음에는 산발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3년 뒤 여름부터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청도의 운문산(雲門山)을 거점으로 한 김사미(金沙彌)와 울산의 초전(草田)을 거점으로 한 효심(孝心)이 농민군을 이끌고 적극적인 항쟁 활동을 벌였다.
김사미의 ‘사미’는 어린 중을 뜻한다. 이로 보아 그는 운문사의 재가승(在家僧)1) 이었을 것이다. 그는 험악한 운문산의 지리를 잘 알았을 것이다. 호거산(虎踞山)으로도 불리는 운문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경주 시내가 한눈에 환하게 들어온다. 이곳에서는 주변 지역의 움직임도 바라볼 수 있다. 운문사 입구에서부터 왼쪽에 자리잡은 운문산 정상에는 커다란 바위와 동굴들이 널려 있는데, 여기에 도둑에 얽힌 전설들이 무수히 전해지고 있다. 초전은 경주에서 울산으로 가는 길가에 자리잡고 있다. 초전은 경주와 동해, 강원도를 잇는 통로였다.
봉기군들이 연계하여 여러 고을을 들이치고 약탈을 일삼자
중앙에서는 대장군 전존걸(全存傑)과 장군 이지순(李至純) 등을 보내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지순은 이의민의 아들이다. 무신정권의 최고 실력자인 이의민이 자신의 아들을 토벌군의 책임자로 보낸 뜻은 어디에 있었을까.
이의민은 도참설(圖讖說)2)
에 나오는 “십팔자가 임금이 된다”(十八子爲王)는 구절에 늘 마음을 두고 있었다. ‘십팔자’는 이(李)의 파자(破字)이다. 그는 이씨 왕조를 꿈꾸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본적지에서 농민군이 일어났으니 이들을 이용하여 신라 부흥을 핑계대며 새 왕조를 창업하는 계기를 만들려는 속셈을 지녔을 것이다.
이의민은 김사미와 효심에게 몰래 연락을 취해 자신의 뜻을 알렸다. 그들은 이의민에게 보물을 보내며 지원을 부탁하였다. 이지순은 농민군이 많은 보물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보물에 욕심이 나서 의복, 양식, 신, 버선 따위 생활필수품을 농민군에 보내주었고, 농민군은 그 대가로 금은보화를 갖다 주었다.
이지순이 토벌군의 동정을 농민군 쪽에 알려 전투가 붙으면 언제나 농민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총사령관인 전존걸이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전존걸은 이의민의 위세에 눌려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예천에서 거듭 패전한 뒤 고민 끝에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고 말았다.
이 소문이 중앙까지 널리 퍼져 이의민에게 심한 정치적 타격을 주었다. 그는 강경 진압으로 방향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조정에서는 토벌군을 전면적으로 개편하고 상장군 최인(崔仁)을 남로착적병마사(南路捉賊兵馬使)로 삼아 내려보냈다.
농민군은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이는 관군에 대항하였으나 패전을 거듭하였다. 추위와 굶주림 속에 하루하루 간신히 버티던 농민군은 견디지 못하고 도망하거나 항복하였다. 김사미는 토벌군 앞에 나와 항복하였으나 주살당하였다. 남은 농민군은 효심을 중심으로 저항하여 어느 정도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한편 경상도 농민군의 활동에 고무되어 강원도 강릉에서도 농민들이 봉기하여 관군에 항쟁하였다.
효심이 이끄는 농민군은 밀양3) 의 저전촌(楮田村)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으나 7천 명의 주검과 무수한 무기를 들판에 남긴 채 흩어지고 말았다. 이 전투는 농민군 항쟁사에 가장 처절한 기록을 남겼다. 남은 농민군은 여름 숲속을 헤치고 다니면서 버텼다. 토벌군은 농민군의 처자 350명을 잡아 얼굴에 먹칠을 하는 형벌을 가하고 여러 성에 나누어 보내 노비로 삼았다. 1193년 12월 마침내 효심이 사로잡힘으로써 경상도 농민군의 항쟁은 끝을 맺었다.
약 4년에 걸친 경상도 농민군의 항쟁은 가장 치열하고 규모도 컸다. 비록 한때 이의민의 무신정권과 결탁하기도 하였으나 농민군의 의지는 확고하였다. 토벌군의 총사령관 최인은 도둑을 즉각 공격하지 않고 머뭇거려 경비를 소모하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다. 정부는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해 막대한 재정을 탕진하였고, 이로 하여 무신정권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
최충헌은 쿠데타를 일으켜 의종을 죽인 장본인이라는 구실을 붙여 이의민을 죽이고 집권하였다. 이의민의 세력을 제거할 때 경주 사람들이 많이 연루되었다. 최충헌은 집권 초기에는 여러 모순을 제거하는 개혁책을 내놓고 민심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끝내 지난날의 무신정권의 작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동적인 탐욕으로 내달았다. 김사미와 효심의 남은 무리는 운문산과 강릉 등지에 모여들어 산발적인 저항 활동을 벌였다.
1199년(신종 2) 2월, 강원도 농민군이 강릉을 시작으로 하여 삼척·울진 두 고을을 점령하면서 세력을 떨쳤다. 강원도 농민군은 경주로 내려와 이곳 농민군과 합세하였으며, 여러 고을에 출몰하여 관가를 습격하고 수령들을 내몰았다. 최씨 정권이 사람을 내려보내 회유하자 경주의 지도자 김순(金順)과 울진의 지도자 금초(今草)가 항복했다. 이들은 조정에서 내려준 상을 받아들고 놓여났다. 회유책을 써 인심을 얻고자 했던 최충헌의 배려였다.
그러나 운문산에는 예전과 다름없이 도둑이라는 이름의 농민군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밀양 관청에 소속된 종들이 관청의 은그릇을 훔쳐 운문산으로 들어간 경우도 있었다. 진주에서는 노비들이 창정(倉正)4)
정방의(鄭方義)를 비롯한 향리들의 탐학에 항거하여 일어났다. 합천 노올부곡에서 천민과 농민군을 규합한 광명(光明)과 계발(計勃)이 진주의 봉기세력과 힘을 합쳐 정방의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정방의의 반격을 받은 노올부곡은 쑥대밭이 되었다(진주의 난은 다음 장의 노비반란에 나옴). 제주도에서도 주민들이 봉기하여 3개월을 버티면서 항거하였다.
1) 재가승 처자를 두고 세상일에 종사하면서 불법을 닦는 사람. 때로 절에 와서 수도하기도 한다. 고려 후기에 함경도 일대에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특수한 무리들이 산골에서 집단으로 살았는데 이곳을 재가승촌(在家僧村)이라 하였다. 이들은 머리를 깎았으나 고기를 먹고 처자와 어울려 살면서 자신들이 사는 마을을 산문(山門)이라 부르고 산문마다 불당을 지어놓았다. 농사를 짓는 틈틈이 남자들은 종이를 만들고 여자들은 베를 짰다. 이들은 사회 상황에 따라 저항세력으로 변하였다. 이들은 재가화상의 후예일 것이다.
2) 도참설 인간의 운명이 하늘의 뜻에 따라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설을 적은 비기(秘記) 따위를 총칭한다. 풍수설도 넓은 의미로 여기에 포함된다. 신라 말기 도선에 의해 널리 유행하였다. 뒷날 유행한 『정감록』도 도참서 가운데 하나이다.
3) 밀양 신라 때는 추화(推火) 또는 밀성(密城)이라 하였고 고려에 들어와 밀주(密州)로 불렸다. 근세조선에 들어와서도 변천을 거듭하였다. 이 책에서는 혼란을 피해 밀양으로 통일한다.
4) 창정 지방에 두었던 향직(鄕職)의 하나. 호장 밑에서 지방의 재정과 창고 감독의 일을 맡아보았다. 그 아래 직위로 부창정이 있다.
참고문헌:
이이화의 한국사 본문 > 고려 > 무신의 칼 청자의 예술혼 > 제2부 100년 동안의 무신집권과 민의 항쟁 > 우리는 고의로 반역하지 않았다 > 김사미·효심의 난
♤ 대장군 [大將軍]
신라 때의 무관직(武官職)의 으뜸 벼슬로 고려시대의 상장군(上將軍) 다음이며, 장군(將軍) 위의 벼슬인 종3품.
2군(軍) · 6위(衛)에 1명씩 배속되어 상장군과 같이 회의기관으로 중방(重房:군사기관)을 구성하였다. 이로써 무신의 권력 집중이 이루어졌다. 공민왕 때 대호군(大護軍)으로 고쳤다.
♤ 상주국(上柱國):
고려시대 국가의 공훈자에게 주던 첫번째 등급의 훈직(勳職)으로,
고려의 훈직은 상주국과 주국이 있었으며, 문종 때 상주국은 정2품, 주국은 종2품으로 정했다. 훈직은 작위를 줄 때 식읍(食邑)을 주는 5등작과 달리 단순한 명예직으로 대부분 왕족들만 받았고 일반 신하들에게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으며, 충렬왕 이후에는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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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미(金沙彌)에 대하여
?∼1194(명종 24). 고려 무인정권기의 민란주동자.
1193년 경상도 운문(雲門: 지금의 淸道)을 거점으로 농민을 모아 난을 일으키고 초전(草田: 지금의 蔚山)에서 봉기한 효심(孝心) 등과 모의, 신라부흥을 표방하며 경상도의 여러 지역에서 기세를 올렸다.
더욱이 당시의 집정자이며 경주 출신으로 역시 신라부흥을 꿈꾸던 이의민(李義旼)의 지지를 받는 데 성공하여 토벌군으로 편성되어온 이의민의 아들인 장군 지순(至純)으로부터 군사기밀을 제공받아, 대장군 전존걸(全存傑)의 정부군을 번번이 격파하였다.
그러나 같은해 11월 다시 정부로부터 파견된 상장군 최인(崔仁), 대장군 고용지(高湧之)의 토벌군에게 격파당하여 이듬해 2월 투항하였으나 참형을 당하였다.
▷효심(孝心)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의 반란자.
1193년(명종 23) 효심이 망명자를 모아 초전(草田: 울산)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키자 왕은 대장군 전존걸(全存傑), 장군 이지순(李至純)· 이공정(李公靖)· 김척후(金陟侯)· 김경부(金慶夫)· 노식(盧植) 등으로 하여금 공격하게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특히, 이의민(李義旼)은 경주 출신으로 신라를 부흥할 뜻을 품고 효심·사미(沙彌) 등과 내통하니 적은 많은 물자를 제공하였다. 이의민의 아들 지순도 효심의 유혹에 이끌려 서로 통하자 군중(軍中)의 기밀이 누설되어 여러 번 공격을 하여도 실패하게 되었다.
특히, 전존걸은 지혜 있는 용장이었는데 실패에 분노하여 “만약 법으로 지순을 다스리면 그 아비가 반드시 나를 해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적이 더욱 성할 것이니 장차 죄가 누구에게 돌아가겠는가?”라고 탄식하다가 자살하였다.
1193년 상장군 최인(崔仁)을 남로착적병마사(南路捉賊兵馬使), 대장군 고용지(高湧之)를 도지병마사(都知兵馬事)로 삼아 강력한 대군을 이끌고 토벌한바 효심 등 남적(南賊)은 타격을 입었다.
그러므로 적괴 득보(得甫)가 항복하고 다음해 김사미도 투항하였다. 이어 남적의 괴수가 이순(李純)을 궁궐에 보내 항복하고 효심도 붙잡혀 반란은 평정되었다.
▷이지순(李至純)에 대하여
?∼1196(명종 26). 고려 무신집권기의 무신. 경주 출신. 본관은 정선(旌善)에 속함. 무신집정(武臣執政) 의민(義旼)의 아들이다.
1193년(명종 23) 김사미(金沙彌)와 효심(孝心)이 각각 운문(雲門: 淸道)과 초전(草田: 蔚山)에서 난을 일으켰을 때 장군으로서 대장군 전존걸(全存傑)의 지휘 아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파견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의민이 참서(讖書)를 믿고 신라를 부흥시키고자 하여, 김사미·효심 등 남적(南賊)과 내통하고 있었으므로 군중(軍中)에서 동정을 누설하여 여러 번 패전하였다.
뒤에 대장군에 올랐으며, 1196년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을 제거하자 가동(家僮)을 이끌고 최충헌과 싸웠으나 패하고 곧 죽임을 당하였다.
▷이의민(李義旼)에 대하여
?∼1196(명종 26). 고려의 무신. 경주(慶州) 사람. 본관은 정선(旌善)이씨에 속함. 아버지는 소금장수이며, 어머니는 옥령사(玉靈寺)의 비(婢)인 천계출신(賤系出身)이었다.
신장이 8척에 이른다고 기록될 정도로 신체가 장대하였고, 용력이 뛰어나 경군(京軍)에 선발된 뒤 무예로 의종의 총애를 받아 별장이 되었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가담하여 중랑장이 되었다가 장군으로 승진하였다. 그의 빠른 진급에 대하여 《고려사》에는 그가 정중부의 난 때 죽인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173년(명종 3) 동북면병마사 김보당(金甫當)이 정중부의 집권에 반발하여 의종을 복위시키려 반기를 들자, 유배지인 거제에서 경주로 나와 있던 의종을 살해하고 그 공으로 대장군이 되었다.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난을 일으키자 정동대장군 지병마사(征東大將軍知兵馬事)가 되어 이를 토벌하고, 그 공으로 무반의 최고직인 상장군에까지 올랐다.
1179년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던 장군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 등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하자, 1181년 형부상서 상장군에 올랐으나 고향인 경주로 내려갔다가, 경대승이 병사하자 명종이 불러 다시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僕射)가 더해진 뒤 1190년에는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同中書門下平章事判兵部事)가 되었다.
한편, 고참(古讖)에 “용손은 12대에서 끝나고, 다시 십팔자가 나온다(龍孫十二盡更有十八子).”라고 하는 말을 믿어, 그 십팔자가 곧 ‘李’의 파자(破字)이므로 자신이 왕이 될 생각으로 경주일대에서 난을 일으킨 효심(孝心)·사미(沙彌) 등과 내통하기도 하였다.
1194년에는 공신에 책록 되었으며, 인사권을 비롯한 정치의 제반사항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막대한 권력을 기반으로 백성들의 토지를 함부로 수탈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 또한 탐학을 자행하여 두 아들은 항간에서 쌍도자(雙刀子)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1196년 아들 지영(至榮)과 최충헌(崔忠獻)의 동생인 충수(忠粹)사이에 비둘기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여 최충헌 일파에게 살해되었다.
▷김경부(金慶夫)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명종 때의 장군.
1193년(명종 23) 경상도지방의 운문(雲門: 淸道)과 초전(草田: 蔚山)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같은해 7월에 대장군 전존걸(全存傑), 장군 이지순(李至純), 이공정(李公靖) 등과 함께 출정하였다.
다음달에 적을 치다가 크게 패하였으나, 그뒤 분전하여 운문의 김사미(金沙彌)와 초전의 효심(孝心) 등을 토멸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204년(희종 즉위년) 8월에 예부시랑 최윤우(崔允愚)와 더불어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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