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전씨 19세 전중내급사 판도판서 공의공(恭毅公) 전함정(全咸正)

2009. 11. 25. 06:39 인물열전

 정선전씨 19세  전중내급사 판도판서 공의공(恭毅公

전함정(咸正)


고려 문종 乙卯 4월에 전중내급사로 요나라에 외교사절로 가서 곤영절(坤寧節)을 축하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실려 있습니다.

그 후 승진하여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역임하셨다. 시호는 공의공(恭毅公)이시다.

배위는 박씨이며 울산군 允雄의 따님이시다.

는 판전농시사를 역임한 전총(全寵)입니다.

정선군 정선읍 지족산에 설단되어 있습니다.

◆ 참고문헌

고려사, 문헌비고


◆ 공의(恭毅)

고려 판도판서(版圖判書) 전함정(全咸正)

출처:

국역 증보문헌비고 번역문 > 증보문헌비고 제240권 - 직관고 27 > 시호 2 > 역대 명신 시호 1 > 공의


◆  판도판서(判圖判書)

 고려 시대에 둔, 판도사(判圖司)의 으뜸 벼슬. 공민왕 11년(1362)에 호부 상서를 고친 것이다.


◆ 판도사 [版圖司]

 고려시대에 호구(戶口) ·공부(貢賦) ·전량(錢糧) 등을 관장한 중앙행정관서.

1275년(충렬왕 1) 상서호부(尙書戶部)를 개칭하여 둔 이래 1304년, 1362년 및 1372년 각각 설치하였다. 관원으로는 판서(判書 : 정3품) 1명, 총랑(摠郞:정4품) ·정랑(正郞:정5품) ·좌랑(佐郞:정6품) 각 3명을 두었다.


내급사 [內給事]

고려시대 전중성(殿中省)에 속한 관직.

고려시대 종친의 보첩을 맡은 관청인 전중성종6품 벼슬이다.

종정시(宗正寺)와 함께 종부시(宗簿寺)의 전신으로 문종 이후에 전중시였다가 1298년(충렬왕24)에 종정시로 바뀌었고 1310년(충선왕 2)에 다시 종부시로 개칭되었다. 종5품의 승(丞)과 더불어 전중성의 실무를 맡은 내급사는 정원이 1명이었다.


전중성

 [ 殿中省 ]

①공상업무를 주관하였던 관부로 신라에 내성(內省)이 있었는데 경덕왕(景德王) 18년(759)에 전중성으로 개칭하였고 태봉에도 진각성(珍閣省)이 설치되었음. ②고려 초기 임금의 공상(供上) 및 친족의 보첩(譜牒)에 관한 일을 총괄하던 관청. 전중성은 신라의 내성과 태봉 진각성의 토대 위에서 설치되어 목종(穆宗) 때 전중감(殿中監) 소감(少監) 승(丞) 내급사(內給事) 등을 두게 됨. 그뒤 문종(文宗) 때 전중성의 직제는 판사(判事) 전중감(殿中監), 전중소감(殿中少監), 전중승(殿中丞),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등의 관원과 이속(吏屬)으로 주사(主事) 영사(令史) 서영사(書令史) 기관(記官) 산사(算士) 등을 두어 실무를 담당하게 하였으며 그 뒤 전중시로 바뀌기도 함. 그 후 원나라의 내정간섭으로 실시된 관제 개혁에 의하여 충렬왕(忠烈王) 24년(1298)에 종정시로 개칭하고 충선왕(忠宣王) 2년(1310)에는 종부시(宗簿寺)로 다시 바뀌어 친족의 보첩만 관장하게 됨.  【용례】㉠내성은 경덕왕 18년에 전중성이라 고쳤다가 뒤에 다시 내성이라 하였다. ; 內省 景德王十八年 改爲殿中省 後復故 [삼국사기권제39, 1장 앞쪽, 잡지 8 직관 중] ㉡종부시는 족속보첩에 관계되는 일을 맡아본다. 목종 때에 전중성이 있었는데, 여기에 감•소감•승•내급사가 있었다. ; 宗簿寺 掌族屬譜牒 穆宗朝 有殿中省 監少監丞內給事 [고려사권제76, 35장 뒤쪽, 지 30 백관 1] ㉢본조의 종부시는 곧 옛날의 종정 벼슬입니다.…직장은 종족간의 돈목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하되, 만일 비위사실이 있으면 이를 규찰 계문하며 한결같이 고제에 의하여 시행한다. ; 本朝宗簿寺 卽古宗正之官也…職掌敦睦宗族 如有非違糾察啓聞 一依古制施行 [세종실록 권제42, 8장 앞쪽, 세종 10년 10월 24일(임인)]


◆ 요나라의 곤영절이란?

북방민족의  풍습으로  곤영궁에서 제사를 올리는 기간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북경은 요나라의 남경으로 지정되었다. 그와 관련하여 지금도 자금성에는 곤영궁이 있습니다.


◆ 요나라

(遼, 916년 - 1125년)또는 거란국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를 중심으로 중국 북쪽을 지배한 왕조였다. 초대 황제는 야율아보기이다.

938년에 요(遼)는 지금의 북경에 두 번째 수도를 건립했고 그것을 남쪽의 수도라는 뜻인 남경(南京)으로 불렀다. 요나라는 남경 석진부(南京析津府), 즉 연경(燕京)과 이전의 중경 대정부(中京大定府)와 상경 임황부, 개봉 등의 수도가 있었다.

거란의 8부족은 9세기말 당나라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발흥하기 시작하였다. 916년 질라부(迭刺部)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모든 부족을 통합하여 거란국을 세웠다. 야율아보기는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여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를 도읍으로 한 후 서쪽으로는 탕구트·위구르 등 여러 부족을 제압했고, 동쪽으로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킴으로써 외몽골에서 동만주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했다.

2대 황제인 태종 때에는 주로 중국 경략에 국력을 쏟아부었다. 936년 후진(後晉)의 건국을 도와준 대가로 연운 16주(燕雲十六州)를 획득하고 국호를 "요"(遼)라 하였다. 946년 후진을 멸망시켜 대량일대 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요나라의 가혹한 통치는 현지 주민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결국 중국의 통치에 어려움을 느끼고 철수하였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불안한 정국이 이어지다가 성종(聖宗) 때에 들어서 안정을 되찾았다. 성종은 (宋)을 공격하여 1004년 전연의 맹(澶淵之盟)을 맺고, 송에서 받는 세폐(歲幣)로 재정을 확충했으며, 송과 무역하여 경제적·문화적으로 국력이 융성하게 되었다. 또한 성종은 정치조직과 군사조직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공포하는 등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었다. 이때 고려와 북만주의 여을 침략하여 동북아시아의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성종 이후인 흥종(興宗)도종(道宗) 때 황실의 내분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한 가운데 요나라는 동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 완옌부(完顔部)의 추장 아구다(阿骨打)가 세운 금나라(金)와, 연운 16주를 되찾으려는 송의 협공을 받아 1125년 황제 천조제(天祚帝)가 사로잡힘으로써 멸망당했다.금나라에게 망해가던 요나라가 이때 황족이었던 야율대석(耶律大石)은 서쪽으로 망명하여 중앙 아시아 지역에 서요(西遼)를 건국했다.(하지만 120년만에(금나라와 비슷하게) 징기즈칸에 의해 멸망한다.)


◆ 문종 [文宗, 1019~1083]

고려의 제11대 왕(재위 1046∼1083). 법률 제정으로 내치에 힘썼다. 불교를 신봉했고, 유학도 장려하였다. 동여진의 침입을 토벌했고, 송나라의 선진문화를 수입했다. 고려시대 중 가장 찬란한 문화황금기를 이룩했다

자 촉유(燭幽). 시호 인효(仁孝). 이름 휘(徽). 초명 서(緖). 현종(顯宗) ·원혜태후(元惠太后) 김씨의 셋째 아들. 1022년(현종 13) 낙랑군(樂浪君)에 책봉되었으며, 1037년(정종 3) 내사령(內史令)에 임명되었다. 형제상속으로 정종의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하자마자 법률개정에 착수하여, 최충(崔冲)으로 하여금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 ·연재면역법(捐災免役法) ·3원신수법(三員訊囚法) ·국자제생(國子諸生)의 효교법(孝校法) 등을 제정하였다. 1069년(문종 23) 양전보수법(量田步數法)을 제정하여 전답의 세율을 정하였으며, 이어 녹봉제(祿俸制) ·선상기인법(選上其人法) 등을 제정하여 내치(內治)의 기초를 다졌다. 한편 불교를 신봉하여, 1067년 흥왕사(興王寺)를 준공하였다. 왕자 후(煦)를 출가(出家)시켜 승려가 되게 하였는데, 그가 곧 대각국사 의천(義天)이다.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도 장려하여 최충의 9재(九齋)를 비롯한 12도(徒)의 사학(私學)을 진흥시켰다.

이처럼 내치에 힘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국방 ·외교에도 힘써 동여진(東女眞)이 북변(北邊)을 침노하자 이를 토벌하였으며, 후에는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특히 송나라와 친선을 도모하여 선진문화 수입에 힘썼다. 이와 같은 현명한 정책이 큰 효과를 나타내며, 고려시대 중 가장 찬란한 문화황금기를 이룩하였다. 유교 ·불교를 비롯한 제도 ·시설 ·무역, 미술 ·공예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괄목할 만한 수준을 나타냈다. 인재등용에도 높은 안목을 가지고 적재적소에 배치하였기 때문에, 제도개혁 ·빈민구휼 등에서도 치적을 쌓았다.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서예(書藝)에도 능하여, 양주 삼천사(三川寺) 대지국사비(大智國師碑) 비문을 친필하였다. 능은 장단의 경릉(景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