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전씨 17세 문경공(文敬公)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전보인(全輔仁)

2009. 11. 30. 06:36 인물열전

정선전씨 17세 문경공(文敬公)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전보인(全輔仁)



 ?∼1019(현종 10). 고려의 문신이시다. 전이갑(全以甲)의 아들이다.

시호(諡號)는 문경공(文敬公)이시다.


989년(성종 8) :

 전라도 나주목(羅州牧), 경학박사(經學博士) 남해도(南海道) 지방에서 학생들을 잘 지도해 지위가 높아지고 상을 받았습니다.


1013년(현종 4) :

 우상시(右常侍)로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018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가 되었고, 이듬해 우복야(右僕射)로 돌아가셨다.


명경과(明經科)출신으로 여러 번 학관(學官)에 임명되어 당시 사람들이 숙유(宿儒)라고  칭하였습니다.


 ♤ 좌복야 [左僕射]

 고려 ·조선 시대의 관직. 고려시대에는 백관(百官)을 총관하던 상서도성(尙書都省)의 정2품 벼슬이었다. 상서좌복야의 줄인 말이다. 문종 때에는 상서령(尙書令) 다음가는 차관직이며, 1275년(충렬왕 1) 상서도성이 첨의부(僉議府)로 개편될 때 폐지하고, 1298년(충렬왕 24)에 다시 첨의부에 두었다가 곧 폐지되었다.1356년(공민왕 5) 상서성이 다시 설치됨에 따라 여기에 다시 두었다가 62년 폐지되었다.


♤ 우복야 [右僕射]

 고려시대 상서성(尙書省)에 속한 정2품 관직. 상서우복야라고도 한다. 정원 1명으로, 995년 처음 설치하였으며, 문종 때 품계·정원을 정하였다. 1275년(충렬왕 1) 폐지하였다.

1356년(공민왕 5) 다시 두었으나 1362년 폐지하였다.


 ♤ 명경과 [ 明經科 ]

 고려시대 경전(經典)을 시험하던 과거시험의 한 분과를 말한다. 가장 어려웠던 시험으로 과목은 시(詩)·서(書)·역(易)·춘추(春秋)·예기(禮記) 등이며 3차에 걸쳐 시험을 보고 합격자에게는 홍패(紅牌)를 주었다.


♤숙유 [ 宿儒 ]

 학문과 명망이 높은 선비.


♤경학박사(經學博士)

 고려시대 12목(牧)에 파견된 교수직이며, 고려는 지방호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집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유교교육에 힘썼다. 고려왕조는 정치운영의 이념이자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유교를 권장했다. 그리하여 성종 때에는 그 체제가 정비되었다. 성종은 각 주군현의 자제를 선발하여 서울인 개성에서 교육을 받도록 하였는데, 고향에 돌아가기를 원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경서에 통달한 선비를 경학박사로 삼아 의학박사(醫學博士)와 더불어 12목에 각각 1명씩 파견했다. 경학박사는 주부군현의 관리나 백성 중 가르칠 만한 자제를 교육하여 풍속을 바르게 하고 효와 충을 통해 국가질서에 순응시키는 교화의 보급이 중요한 의무였다. 경학박사로서 남해도 나주목에 파견되었던 전보인(全輔仁)은 태학조교(太學助敎) 송승연(宋承演)과 함께 가르침에 힘써 포상을 받기도 하였다. 또 12목의 경학박사 중에 한 사람의 문생(門生)도 과거에 나가는 일이 없으면 임기가 만료되어도 다시 유임시켜 실효를 거두도록 책임 지우게 했습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文獻備考


문헌고찰(文獻考察)


국역 증보문헌비고 번역문 > 증보문헌비고 제202권 - 학교고 1 > 태학 1 > 고려


성종 6년(987)에 12목(十二牧)에 경학박사(經學博士)를 두었다. 왕이 지난 해 돌아가기를 허락한 학생들이 가르칠 스승이 없으므로 경학(經學)에 통하는 자를 뽑아서 박사로 삼아 12목(十二牧)에 각각 1인을 보내어 교유(敎諭)를 돈독히 행하게 하고, 주현(州縣)의 장리(長吏)와 백성으로 가르칠 만한 아들이 있는 자는 아울러 가르치고 경계하도록 하여, 만약 뜻을 가다듬고 경(經)에 밝아서 족히 쓸 만한 자는 목사(牧使)·수령으로 하여금 한(漢)나라 고사(故事)에 의하여 구록(具錄)하여 경사(京師)에 천공(薦貢)할 것을 항식(恒式)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유우(有虞)는 상상(上庠)·하상(下庠)을 열었고, 하후(夏后)는 동서(東序)·서서(西序)를 두었으며, 은(殷)나라는 양학(兩學)을 닦았고, 주(周)나라는 이교(二膠)를 세워서 군신(君臣)·부자(父子)가 모두 사랑하고 공경하는 풍속을 알고 예(禮)·악(樂)·시(詩)·서(書)가 족히 경륜(經綸)의 업(業)을 이룩할 수 있었다. 과인(寡人)은 여러 성왕(聖王)의 큰 기업(基業)을 이어받아 삼한(三韓)의 왕업(王業)을 누리게 되니, 효박한 풍속을 변하여 사람들이 예양(禮讓)을 알고, 행단(杏壇)·괴시(槐市)에서 공부하는 무리가 더욱 많아져서 미름(米廩)·직산(稷山)에 울연(蔚然)히 횡경(橫經)의 자제(子弟)들이 성하게 있게 하고자 한다. 이제 경의(經義)에 통하고 문적(文籍)을 익힌 선비와 온고지신(溫故知新)한 무리를 12목(十二牧)에서 뽑고, 각각 경학박사(經學博士) 1원(員)을 차견(差遣)하여 여러 생도들을 부지런히 잘 인도하고 잘 가르치게 하도록 하겠다. 아! 재기(材器)를 품고 군왕(君王)을 섬기는 것은 충(忠)의 시초이며,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부모를 현양(顯揚)함은 효(孝)의 끝인 것이다. 만약 형창(螢窓)에 뜻을 가다듬고 전사(鱣肆)에서 경적(經籍)을 밝혀서 효제(孝悌)에 이름이 있는 자는 그 목재(牧宰)로 하여금 구록(具錄)하여 경사(京師)에 천거해 올리게 하라."고 하였다.

성종 8년(989) 여름 4월에 태학조교(太學助敎) 송승연(宋承演)을 발탁하여 국자박사(國子博士)로 삼았다. 왕이 학교의 가르침에 성업(成業)한 사람이 심히 적음을 근심하여 이를 권장하려고 하여 곧 유사(有司)가 천거해 올린 사람의 성명을 취해 보니, 오직 송승연과 나주(羅州) 경학박사 전보인(全輔仁)이 가르침에 게으르지 아니하여 성취한 보람이 있으므로 드디어 송승연을 발탁하여 국자박사(國子博士)를 삼고, 전보인에게는 공복(公服) 한 벌, 쌀 50석을 내려 주며, 하교하여 표창하고 총애하였다.



국역 증보문헌비고 번역문 > 증보문헌비고 제240권 - 직관고 27 > 시호 2 > 역대 명신 시호 1 > 문경


◆ 문경(文敬)

고려 무양후(武陽候) 윤적(尹勣), 좌복야 전보인(全輔仁), 전법총랑 전충경(全忠敬), 평장사 전연(全演), 중찬 허공(許珙), 정당문학 안석(安碩), 정당문학 안보(安輔), 청성군(淸城君) 한 수(韓脩), 봉산군(鳳山君) 강군보(姜君寶), 진현(進賢)제학 이강(李岡), 모관(某官) 강성민(姜性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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