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전씨 30세 찬성사 판도판서 전윤장 공직 연표

2009. 12. 2. 07:44 인물열전

 

정선전씨 30세 찬성사 판도판서  전윤장 공직 연표


1342년 

‘상호군(정3품)’으로서 조적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2등공신에 오름

-아들에게 8품직 제수하고, 토지70결 과 노비5명을 하사받음

1343년 

‘우상시(정3품)’로 서해 평양도 순위사로 활동함

1347년 

‘동지밀직사사(종2품)’로 교주도 도순문사를 임명받아 쌍성의 인구를 하였음

1348년 

‘첨의참리(정2품)’로 이학도감 판사로 임명됨

1351년

 ‘찬성사(정2품)’로 임명되며, 판도판서를 겸직함 (三宰)

扈駕而還超拜三宰

지금 왕의 호종으로 되어 돌아와서 3재(三宰-찬성사로서 판도판서 겸임)



◆ 고려사 번역문 > 《고려사》 제36권 - 세가 제36 > 충혜왕 > 충혜왕 임오 후 3년(1342)


6월 초하루 경자일에 왕이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교서를 내렸다.

“역적 조유(曹頔)가 난을 꾸민 후 내가 원나라로 가게 되었을 때 우리 나라에서는 근심과 의문에 싸였었고 간신의 잔당들은 거짓말을 조작하여 반란을 선동하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나를 시종한 신하들이 시종일관 절개를 지키어 나의 몸을 보호하였으니 그 공이 막대하여 산천이 변하여도 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해평 부원군 윤석, 정승 채하중, 화평 부원군 김석견(金石堅), 정승 이능간, 이문(理問) 홍빈(洪彬), 상락(上洛) 부원군 김영돈(金永旽), 서하군 임자송(任子松), 찬성사 김인윤(金仁沇), 언양군 김륜(金倫), 김해군 이제현 ,성산군 이조년, 첨의평리 한종유, 삼사우사 김영후, 좌사 이몽가(李蒙哥), 판밀직사사 이운(李雲), 개성윤 윤신계(尹莘係), 전 지밀직사사 이엄(李儼), 전 동지밀직사사 윤환(尹桓), 박청(朴靑), 전 밀직부사 강윤충(康允忠), 안천길(安千吉), 노영서(盧英瑞), 원외랑(員外郞) 한의신(韓義臣), 군부판서(軍簿判書) 배전(裴佺), 최유(崔濡), 지신사 황석기(黃石奇), 판 종부시사(宗簿寺事), 손수경(孫守卿) 판 사복시사(司僕寺事) 윤원우(尹元佑), 대호군 김첨수(金添壽)와 김선장(金善莊), 호군 남궁 신과 임성(林成) 등을 1등 공신으로 정하여 벽상에 그들의 화상을 그리게 하고 그 부모와 처는 세 등급을 올려 작위를 주고 아들 한 명에게 7품 직을 제수할 것이다. 아들이 없으면 조카나 생질에게 대신 줄 것이며 사위는 8품 직을 주고 토지 1백 결(結)과 노비 10명을 줄 것이다.


 영창군(永昌君) 김승택(金承澤), 학성군(鶴城君) 박인수(朴仁壽), 전 군부판서 안자유(安子由), 상호군 김경(金鏡)과 전윤장(全允藏), 전 판 서운관사(書雲觀事) 손원(孫遠), 대호군 이광원(李光遠)과 김장(金莊), 호군 진교화(陣敎化), 승신(承信), 이헌(李軒), 손습(孫襲), 장랑장 왕석(王碩), 이충(李沖), 이원용(李元龍), 이광계(李光桂), 낭장 전경(全卿)과 홍매노(洪買奴) 등은 2등 공신으로 정하며 부모와 처는 세 등급을 올려 작위를 주고 아들 한 명에게 8품직을 제수할 것이며 아들이 없으면 그 대신 사위에게 9품직을 제수하고 토지 70결과 노비 5명을 줄 것이다.”


고려사 텍스트원문 > 《고려사》 제36권 - 세가 제36 > 충혜왕 > 충혜왕 임오 후 3년(1342)


▣ 六月 庚子 朔下敎曰 賊臣曹頔搆難之後寡人赴都國家虞疑奸臣餘黨捏合虛辭扇亂不已而侍從之臣終始一節夾輔寡躬其功莫大帶礪難忘 以海平府院君尹碩政丞蔡河中化平府院君金石堅政丞李凌幹理問洪彬上洛府院君金永旽西河君任子松贊成事金仁沇彦陽君金倫金海君李齊賢星山君李兆年僉議評理韓宗愈三司右使金永煦左使李蒙哥判密直司事李雲開城尹尹莘係前知密直司事李儼前同知密直司事尹桓朴靑前密直副使康允忠安千吉盧英瑞員外郞韓義臣軍簿判書裴佺崔濡知申事黃石奇判宗簿寺事孫守卿判司僕寺事尹元佑大護軍金添壽金善莊護軍南宮信林成等爲一等功臣圖形壁上父母妻超三等封爵一子除七品無子代姪甥女壻除八品給田百結奴婢十口永昌君金承澤鶴城君朴仁壽前軍簿判書安子由

上護軍金鏡全允臧前判書雲觀事孫遠大護軍李光遠金莊護軍陳敎化承信李軒孫襲中郞將王碩李冲李元龍李光桂郞將全卿洪買奴等爲二等功臣父母妻超三等封爵一子除八品無子代女壻除九品給田七十結奴婢五口.




◆ 고려사 번역문 > 《고려사》 제36권 - 세가 제36 > 충혜왕 > 충혜왕 계미 후 4년(1343)


9월 정묘일에 첨의평리 강윤충(康允忠)을 양광(楊廣), 전라, 경상도의 문민질고사(問民疾苦使)로, 찬성사 윤환(尹桓)을 강릉, 교주도 도순문사로, 우상시 전윤장(全允臧)을 서해, 평양도 순위사(巡慰使)로 각각 임명하였다.


고려사 텍스트원문 > 《고려사》 제36권 - 세가 제36 > 충혜왕 > 충혜왕 계미 후 4년(1343)

▣ 九月 丁卯 以僉議評理康允忠爲楊廣全羅慶尙道問民疾苦使 贊成事尹桓爲江陵交州道都巡問使 右常侍全允臧爲西海平壤道巡慰使.


◆ 고려사 텍스트원문 > 《고려사》 제37권 - 세가 제37 > 충목왕 > 충목왕 정해 3년(1347)


임신일에 동지밀직사사 전윤장(全允臧)을 교주도 도순문사로 임명하여 쌍성(雙城)의 우리 백성(人口)을 찾아내게 하였다.



壬申 以同知密直司事全允臧爲交州道都巡問使令檢括雙城人口.



고려사 텍스트원문 > 《고려사》 제37권 - 세가 제37 > 충목왕 > 충목왕 무자 4년(1348)


◆ 충목왕 무자 4년(1348)


3월 초하루 정유일에 판삼사사 이제현, 영산군 장항(張沆), 밀직제학 안목 등을 경사 도감(經史都監)의 제주(提調)로, 또 장항과 첨의 참리 전윤장(全允臧), 군부판서 이연종(李衍宗), 전 전법 판서 박원계(朴元桂) 전성균 제주(成均祭酒) 이달충(李達衷), 전우 사의 윤당(尹禟) 등을 이학 도감(吏學都監)의 판사로, 전리 총랑(典理摠郞) 안즙(安輯), 사예(司藝) 이윤승(李允升)을 부사로, 전리 좌랑 성준덕(成俊德)과 직강(直講) 손광사(孫光嗣)를 판관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 三月 丁酉 朔以判三司事李齊賢永山君張沆密直提學安牧提調經史都監又以張沆及僉議叅理全允臧軍簿判書李衍宗前典法判書朴元桂前成均祭酒李達衷前右司議尹▩等爲吏學都監判事典理摠郞安輯司藝李允升爲副使典理佐郞成俊德直講孫光嗣爲判官.



◆ 고려사 번역문 > 《고려사》 제38권 - 세가 제38 > 공민왕 1


이제현을 도첨의 정승으로, 이몽가(李蒙哥)를 판삼사사로, 조익청(曹益淸)과 전윤장(全允臧)을 찬성사로, 조일신과 조유(趙瑜)를 참리로, 강득룡(康得龍)과 최천택(崔天澤)을 삼사우사와 삼사좌사로, 이공수(李公遂)를 정당문학으로, 한가귀(韓可貴)를 판개성부사로, 김일봉(金逸逢)을 판밀직사사로, 이연종(李衍宗)을 밀직사 겸 감찰 대부로, 김보(金普)를 지밀직사사로, 홍유도(洪由道)와 정오(鄭䫨)를 동지밀직사사로, 김경직(金敬直)과 이성서(李成瑞)를 밀직부사로, 윤택(尹澤)을 밀직제학으로, 최덕림(崔德林)과 이제(李濟)를 우대언과 좌대언으로, 김득배(金得培)와 유숙(柳淑)을 우부대언과 좌부대언으로, 손기(孫琦)를 평해 부원군으로, 박인주(朴仁柱)를 함양군(咸陽君)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고려사 텍스트원문 > 《고려사》 제38권 - 세가 제38 > 공민왕 1 


▣ 乙亥 贊成事趙日新齎批目還自元以李齊賢爲都僉議政丞 李蒙哥判三司事 曹益淸全允臧爲贊成事 趙日新趙瑜爲叅理 康得龍崔天澤爲三司右左使 李公遂爲政堂文學 韓可貴判開城府事 金逸逢判密直司事 李衍宗爲密直使兼監察大夫 金普知密直司事 洪由道鄭▩同知密直司事 金敬直李成瑞爲密直副使 尹澤爲密直提學 崔德林李濟爲右左代言 金得培柳淑爲右左副代言 孫琦爲平海府院君 朴仁柱爲咸陽君.



◆ 조적의 난


조적은 고려시대의 역신이며...


고려 충렬왕 때 환관(宦官)들과 결탁하여 세력을 떨치고, 1313년(충선왕 5) 우상시(右常侍) 때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밀직사(密直司)가 되고,

1320년(충숙왕 7) 선부전서(選部典書)를 거쳐 1323년 만호 때 허경(許慶)과 재산싸움을 한 뒤 원나라로 달아났다.

원나라 영종(英宗)에게 충숙왕을 무고하여 국새를 빼앗게 하고, 충선왕의 방환(放還)을 탄원한다고 속여 백관들의 서명을 받은 진정서로 심양왕의 즉위를 원나라에 요청했다가 거절 당하였다.


1324년 고려인 2,000여 명의 서명을 받아 원나라 한림원(翰林院)과 중서성(中書省)에 충숙왕을 비난하는 글을 보내고,

1327년 심양왕에게 선위(禪位)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조년(李兆年) 등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1332년 재차 선왕 충숙왕이 복위하자 돌아와 밀직지사(密直知事)가 되고 찬성사(贊成事)를 거쳐 1338년 첨의좌정승(僉議左政承)에 승진하였다.


다음해 왕이 죽고 충혜왕이 복위하자 원나라에 가려고 평양에 이르렀을 때, 충혜왕에게 욕을 당한 경화공주(慶華公主:忠肅王妃)의 폭로로 왕의 추행이 드러나자 폐위를 공언하고 개경에 들어와 국인(國印)을 영안궁(永安宮)에 숨기고 일당을 데리고 충혜왕의 궁을 공격하다가 실패하여 살해되었다.


이것이 조적의 난입니다.


◆ 찬성사 [贊成事]

고려 후기 문하부(門下府)의 정2품 관직.

1275년(충렬왕 1)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와 중서평장사를 각각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 ·첨의찬성사로 고치고, 1308년에는 중호(中護)로, 1356년에는 다시 평장사로 고치고, 1362년에 첨의찬성사로 고쳤다가 1369년 문하찬성사로 다시 고쳤다.


◆ 문하부 [門下府]

고려시대의 최고 행정관청.


1369년(공민왕 18)부터 1401년(태종 1)까지 존속한 최고권부로 국정을 총괄하였다. 초기에 당(唐)나라의 관제(官制)를 모방하여 문하성(門下省)·중서성(中書省)·상서성(尙書省) 등을 두어 3성 6부제를 채택하였으나, 통폐합·개편 과정을 거치면서 말기에 문하부로 정착하였다.


그 변천을 보면, 초기 내의성(內議省)·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성종 1)·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문종 15)·첨의부(僉議府:충렬왕 1)·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충렬왕 19), 다시 중서문하성(공민왕 5) ·도첨의부(都僉議府:공민왕 11)를 거쳐 문하부가 되었다. 그 속관(屬官)도 국초 이래 명칭의 변화 ·개편과 함께 변동이 심하였다.


1061년(문종 11) 기준으로 보면 중서령(中書令:종1품)·문하시랑(門下侍郞:종1품)·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정2품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정2품)·참지정사(參知政事:종2품정당문학(政堂文學:종2품)·문하성지사(門下省知事:종2품)·좌상시(左常侍:정3품우상시(右常侍:정3품)·직문하(直門下:종3품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정4품)·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정4품)·급사중(給事中:종4품중서사인(中書舍人:종4품)·기거주(起居注:종5품)·기거랑(起居郞:종5품)·기거사인(起居舍人:종5품)·좌보간(左補諫:정6품)·우보간(右補諫:정6품)·좌정언(左正言:종6품)·우정언(右正言:종6품)·문하녹사(門下錄事:종7품중서주서(中書注書:종7품) 등 각 1명을 두었고, 그 밖에 많은 이속(吏屬)을 두었다.



◆ 첨의참리[僉議參理]


고려 말기에 첨의부에 속한 정이품 벼슬, 충렬왕 1년(1275)에 참지정사를 고친 것이다.


첨의부[僉議府]

원 간섭기 고려의 최고 정무 기구.


충렬왕 원년(1275)의 관제 개편에 종래의 중서문하성상서성을 통합하여 첨의부(僉議府)로 개편하고 6부(部)를 4사(司)로 축소 정리하였다. 이때의 관제 개편은 고려 관제가 원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비난을 수용한 것이어서 전체적으로 관제의 격을 낮추는 작업의 일환이었다.


첨의부는 충선왕 즉위년(1298)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로 다시 고쳤다가 공민왕 5년(1356) 반원정책의 일환으로 폐지하고 원래대로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으로 돌아갔다. 첨의부에는 시중(侍中) 직에 대신하여 좌첨의중찬(左僉議中贊)· 우첨의중찬(右僉議中贊)을 두고 그 아래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 첨의참리(僉議)· 참문학사(參文學事)·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 각 1인을 두었다. 첨의부에서 일시 복구된 중서문하성 · 상서성은 공민왕 18년(1369) 다시 통합하여 문하부(門下府)가 된다. 전체적으로는 재상 권한의 축소와 왕권에의 권력 집중이 추구되는 제도의 성격을 갖는다.


삼재[三宰]

1. 육부(六部)의 차례에서 세 번째가 된다는 뜻으로 ‘호부(戶部)를 달리 이르는 말

2. 재상의 차례에서 세 번째가 된다는 뜻으로 ‘좌참찬’을 달리 이르는 말


◆ 이학도감 [ 吏學都監 ]

서리 등 하급관원의 실무를 교육시키기 위해 설치한 기구. 고려 충혜왕 원년(1340)에 처음으로 설치하였음. 충목왕 4년에 판사 7인, 부사 3인, 판관 3인, 녹사 4인을 두었음.

【용례】

이학도감.

<충혜왕 원년에 설치하였다. 충목왕 4년에 판사 7인, 부사 3인, 판관 3인, 녹사 4인을 두었다.> ;

吏學都監<忠惠王元年置之 忠穆王四年 置判事七人 副使三人 判官三人 錄事四人>

 [고려사 권제77, 28장 앞쪽, 지 31 백관 2 제사각색도감]



◆ 고려 군 계급

정3품 -상호군, 상장군( 上將軍 ) 현재의 대장급(응양군 상장군 = 참모총장. 용호군~6위 상장군의 직위는 군단장급)

종3품 - 섭상장군( 攝上將軍 )

종3품 - 대장군( 大將軍 ) 현재의 중장

정4품 - 섭대장군( 攝大將軍 )

정4품 - 장군( 將軍 ) 현재의 소장, 준장(직위는 사단,여단장급 )

종4품 - 섭장군( 攝將軍 )

정5품 - 중랑장( 中郞將 ) 현재의 대령

종5품 - 섭중랑장( 攝中郞將 )

정6품 - 낭장( 郎將 ) 현재의 중령(직위는 중대,대대장급)

종6품 - 섭랑장( 攝郎將 )

정7품 - 별장( 別將 ) 현재의 소령

종7품 - 섭별장( 攝別將 )

정8품 - 산원( 散員 ) 현재의 대위

종8품 - 섭산원( 攝散員 )

정9품 - 교위( 校尉 ) 현재의 중위(직위는 소대장급)

종9품 - 섭교위( 攝校尉 )

無품 - 대정( 隊正 ) 현재의 소위나 혹은 부사관 급(직위는 분대장급)


◆교주도[交州道]

강원도의 옛이름


◆도순문사[都巡問使]

고려시대 외관직(外官職)으로 주(州), 부(府)의 장관을 겸했다.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밀직사에 속한 종2품 벼슬


◆평양도순위사 [ 平壤道巡慰使 ]


고려 시대 군사도(軍事道)의 하나인 평양도(平壤道)의 군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파견된 3품의 임시 벼슬. 순위사(巡慰使)는 고려 후기 지방을 순행하면서 군사들을 위무(慰撫)하기 위하여 파견되던 벼슬로, 품계가 2품 이상인 경우는 도순문사(都巡問使)라 하였음. 순위사의 파견은 고려 후기, 당시 심하게 전개되던 지방사회의 동요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음.

【용례】

충혜왕 4년 9월 정묘일에 첨의평리 강윤충을 양광•전라•경상도문민질고사로, 찬성사 윤환을 강릉•교주도 도순문사로, 우상시 전윤장을 서해•평양도 순위사로 각각 임명하였다.

; 丁卯 以僉議評理康允忠爲楊廣全羅慶尙道問民疾苦使 贊成事尹桓爲江陵交州道都巡問使 右常侍全允臧爲西海 平壤道巡慰使

[고려사 권제36, 28장 뒤쪽~29장 앞쪽, 세가 36 충혜왕 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