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4. 08:15ㆍ 인물열전
옥동서원(玉洞書院) 과
사서공 전식( 沙西公 全湜)
◆ 옥동서원(玉洞書院)
옥동서원은 황효헌 형제가 신덕리에 황희의 영정을 모신 영당을 건립하한 백화서당이 그 모태이다. 1714년에 사림들의 중론에 의하여 사서 전식을 배향하고 서원으로 승격되었고, 이듬해에 수봉리로 이건하였다. 1783년에 축옹 황효헌과 반간 황뉴를 추배하였다.
1789년 영남 사림들이 소를 올려, 조정에서 승지 박천형을 보내어 치제하고 옥동서원이라 사액하였다.
1889년에 목사 민종렬이 중수하였으며, 2004년에 강당인 온휘당을 수리하였으며, 다음해에 문루인 청월루를 중수하였다.
옥동서원의 진산은 만경산이며, 그 봉우리는 헌수봉이다. 황효헌 형제가 매년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헌수를 올려 사람들이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하는 봉우리라 하여 이름 지었다 한다. 입구의 문루는 1층이 서원의 외삼문으로 회보문이라 하며, 2층 누각은 청월루라 한다. 양측에 딸려있는 온돌방은 진밀료와 윤택료라 하며 출입하는 외삼문 옆에 부엌이 딸려 있는 특이한 양식으로 누와 정이 결합된 조선 중후기 건축양식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옥동서원의 첫째 건물인 경덕사는 맞배 기와집이며, 전면에 1칸 정도의 툇마루를 깔았으며, 묘우 내부와 툇칸도 우물마루를 깐 것은 다른 묘우와는 약간은 다르다 하겠다.
옥동서원의 구성은 문루인 청월루의 아래층인 외삼문을 지나면 정면으로 강학 공간인 온휘당이 자리한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양쪽에는 온돌방이며, 중간은 마루이다. 오른쪽 방은 탁장재이며, 왼쪽은 착로재이다.
강당의 뒤쪽 오른편으로 서원 향사 때에 제물을 보관하는 건물인 전사청이 묘우 담장과 연이어 남향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가운데는 우물마루이며, 양쪽은 온돌방이다.
강당 뒤편에는 묘정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으로 삼칸 솟을 대문이 있으며, 이곳을 지나면 방촌 선생을 비롯한 전식, 황효헌, 황뉴의 위패를 봉안하고, 황희의 영정 모사본이 모셔진 묘우인 경덕사가 자리한다.
옥동서원의 전체적인 구성은 전면에는 강학 공간이며, 후면에는 향사 기능을 가진 조선 전기의 대표적 양식인 전학후묘의 양식이라 하겠다.
- 황희(黃喜, 1363 ~ 1452)
조선 건국의 기초를 세운 분으로 처음 이름은 수로(壽老)이다. 자는 구부(懼夫)이며, 호는 방촌(厖村)이다. 1387년에 급제하여, 이듬해에 성균학관이 되었으며,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 때에 벼슬이 올랐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하려 하였으나, 조정의 부름을 받아 조선에서는 세자우정자, 사간, 대언 등을 역임하였으며, 1416년 이조판서로 양년대군의 세자 폐출에 반대하여 공조판서, 판한성부사로 체직되었으며, 1418년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여 서인이 되어 교하로 유배되고, 다시 남원으로 옮겨졌다.
1422년(세종 4)에 복직되고, 1431년 영의정에 올라 18년 동안을 재임하면서 농사법의 개정, 예법의 개정, 천첩 소생 천역면제 등의 업적을 남겼으며, 속육전, 오의례, 국조오례의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조선 명재상 중의 으뜸이라 불리운다. 세종대왕의 조정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 전식(全湜, 1563 ~ 1642)
선생의 본관은 옥천(沃川)이며, 자는 정원(淨遠)이며, 호는 사서(沙西)이다. 사벌국(沙伐國) 서쪽에 산다하여 사서로 호를 삼았다.
1563년(명종 18) 정월 21일 옥천에서 태어났으나 상주로 옮겨 살았다. 아버지는 전여림(全汝霖)이며, 어머니는 월성이씨(月城李氏) 신(信)의 따님이다.
유성룡과 장현광의 문인이다. 퇴계학파이다.
1589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진사 강주(姜霔)와 의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하여 많은 공이 있었다. 김익남(金益南)의 천거로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을 역임하였다. 1599년 예빈시직장(禮貧寺直長)이 되었으나 사양하고, 160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 예조의 좌랑과 정랑을 거쳐 울산판관을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광해군의 실정을 보고는 낙향하여 정경세, 이준 등과 산수를 유람하여, 세상 사람들이 상사삼노(商社三老)라 칭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있은 후에 홍문관교리가 되어 그가 평소 갈고 닦은 도의를 강의 하였으며, 예조정랑겸 기주관지제교(記注官知製敎)를 지내고 옥당에 들어가 수찬, 교리전적을 거쳐 장령에 이르러 언관(言官)으로 임무에 충실하였다.
1624년(인조 2년)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태복정(太僕正)으로 임금을 모시고 난을 피해 천안에까지 이르러 집의(執義)로 원수 장만(張晩)의 군사 행동이 완만하여 적에게 기회를 얻게 한 죄를 논술하고, 이귀(李貴)의 실책을 탄핵하고는 고향에 돌아갔다가 그 후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으로 보직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적을 방어하다가 평정한 뒤 곧 왕에게 문안하고 환도 후에 조정의 대신들이 전공을 칭찬하여 추천하였다.
1639년(인조 17년)에는 명나라 사절로 중국에 가게 되었는데 당시 세력이 강해지고 있던 청나라가 요동지역을 차지하고 있어서 갈수가 없게 되자 황해 바다로 명에 이르렀으니 이때 출발하여서 이듬해에 선사포(宣沙浦)에 돌아올 때까지 바닷길로의 중국행을 사행록(槎行錄)에 날짜별로 도중의 경로와 만난 사람들, 날씨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폭풍을 만나 함께 떠났던 배 4척 중 2척이 실종된 일과 날마다 지은 시의 제목을 소주로 달아 놓았다.
관직 생활의 40여년과 중국 역사에도 기록될 정도의 행동이 깊은 학식이 아니었으면 불가능 했을 것이며,
명나라에서 그의 후덕한 재상임을 칭찬하고 태사관(太史官)이 역사에 기록하였다.
1642년
왕도 덕망을 칭찬하고 본받을 바 있다고 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겸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로 임하고 이어 대사헌에 보직하였고 기로사(耆老社)에 입사케 하였다. 세상을 떠나자 임금이 애도하여 후히 장사지낼 것을 명하고 좌의정을 증직하고 충간(忠簡)이라 시호를 내렸다. 상주 옥동서원에 향사(享祀)되었다. 저서로 《사서집(沙西集)》이 있다.
전식은 어려서 여러 아이들과는 다르게 빼어났다. 중후하기가 어른과 같았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밖에서 특이한 맛이 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부모에게 먼저 가져다 드리고, 집은 가난하였으나, 부모님 상에는 반찬을 갖추었다.
8살에 문의에 통하여 배움에 뜻을 두니, 학문의 진도가 뛰어났다. 사담(沙潭) 김홍민(金弘敏)이 탄상하였으며, 이름이 다른 사우들 간에 드러났다. 일찍부터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문하에 나아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창석(蒼石) 이준(李埈)과 더불어 학문을 강구하였다. 늙어서도 그치지를 않았으니, 그 학문의 연원은 스스로에게 있다고 하겠다. 이들 세 명을 상사삼노(商社三老)라 이름 하였으며, 세칭 영남에 유자(儒者)가 많다는 것은 이들을 미루어 말하는 것이라 한다.
정경세는 항상 전식의 학식이 높음을 탄복하였다고 한다. 항상 거처하는 곳은 궁벽해도 뜻은 그렇지 않았으며, 독서를 마치면 높은 곳에 누워 북쪽의 바람을 맞는다고 하였다. 경서(經書)에 근본을 두었으며, 호씨춘추(胡氏春秋)에 정심하였다. 유고가 약간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1862년(철종 13) 전종한이 이휘녕(李彙寧)의 서문과 자신의 발문을 붙여 9권 4책의 활자본으로 문집을 4책 9권으로 간행하였다.
《사서집(沙西集)》은 황호(黃㦿)가 지은 행장에 의하면 유고 약간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였으나, 이후 미처 탈고하여 간행되기도 전에 화재를 만나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게 되었다. 그 뒤로 자손들이 저자의 시문을 얻는 대로 기록해 두어 약간 권의 유고를 수집하였으나 가세가 기울어 간행을 못하였다.
1847년(현종 13)에 7대손 전종한(全宗漢)이 상주의 장노와 의논하여 도남서원에 통문을 띄워 재물을 모으고, 또한 사우들의 도움을 받아 문집을 편찬하였다가 1862년(철종 13)에야 비로소 전종한이 이휘녕(李彙寧)의 서문과 자신의 발문을 붙여 9권 4책의 활자본으로 문집을 간행하였다.
원집 7권, 부록 2권 합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수에는 이휘녕의 서와 원집 목록이 실려 있다. 원집 권 1~2는 시, 권 3~7은 문이다.
권1에는 100여 수의 시가 편차되어 있다. 〈주행(舟行)〉 이하 30여 편은 1625년 조경사(朝京使)가 되어 중국에 갔다 오면서 지은 시로 도중의 경물을 읊은 것이 많은데 이전의 사행과는 달리 육로인 요동(遼東)을 거치지 않고 해로로 다녀와 어려움이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이준(李埈), 장현광(張顯光) 등 20여 명에 대한 만시가 수록되어 있다.
권2는 59제의 시가 실려 있는데〈임술추유분운득청자(壬戌秋遊分韻得淸字)〉는 1622년 이준이 주최한 낙강범월시회(洛江泛月詩會)에 참가해 소식(蘇軾)의 적벽부운(赤壁賦韻)을 나누어 지은 시를 실은 것이다. 그리고 만시가 수록되어 있다.
권3에는 교, 소차, 계, 경연강의가 실려 있다. 그중 〈강화봉사(江華封事)〉는 정묘란 때 강화도에서 화의를 배척하는 내용으로 올린 상소이고, 〈논인평혼사계(論麟坪婚事啓)〉는 1643년 대사간으로 있을 때 인평대군의 혼례가 예에 맞지 않음을 간언한 내용이다. 〈경연강의(經筵講義)〉는 경연에서 《논어(論語)》를 진강한 내용이다.
권4는 서 41편과 잡저가 실려 있다. 10여 명의 교유하던 인사와 주고받은 편지와 아들과 자손에게 보낸 편지 16편이 있다. 잡저는 학문의 도와 효의 도에 대해 자손에게 경계로 남긴 〈서시손(書示孫)〉과 〈국전고오(國典考誤)〉, 책문 2편이 실려 있다.
권5는 〈사행록(槎行錄)〉이다. 1625년 8월 3일에 출발하여 1626년 4월 15일까지 중국을 다녀온 기록으로 날짜별로 도중의 경로와 만난 사람들, 날씨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폭풍을 만나 함께 떠났던 배 4척 중 2척이 실종된 일과 날마다 지은 시의 제목을 소주로 달아 놓았다.
권6은 수수차록(隨手箚錄)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시점부터 1637년 2월 28일까지 자신의 일을 자세히 기록한 일종의 자전적인 글이다. 본인의 의병활동과 정인홍(鄭仁弘)을 중심으로 한 대북파의 공격, 서애(西厓)와의 일, 당시 재상들에 대한 인물평 등이 실려 있다.
권7은 발, 표전, 축문, 제문, 행장 등이다. 끝에는 전종한(全宗漢)이 쓴 발이 있다.
부록 권1에는 황오(黃㦿)가 지은 행장, 조경(趙絅)이 지은 신도비명, 채유후(蔡裕後)가 지은 묘갈명, 권유(權愈) 의 시장(諡狀)이 실려 있고, 권2에는 제현들의 만시와 제문이 수록되어 있다. 끝으로 저자가 중국에 갈 때 당대의 문인들이 지은 송시와 송서가 부기되어 있다.
전식의 첫째 아들 전극항(全克恒)은 1590년(선조 23) 상주에서 태어났다.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덕고(德古) 또는 덕구(德久)이며, 호는 규천(虯川)이다. 정경세(鄭經世)와 이준(李埈)을 사사(師事)하였다. 나이 서 너살에 글을 지었으며, 12살 때에 자고사(鷓鴣辭)를 지어 좋은 평판을 얻었다.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대교(待敎)를 거쳐 예문관검열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예조정랑으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호종하던 중 인조의 명에 따라 다시 한양으로 되돌아가 성을 지키다가 1636(인조 14)전사하였다.
특히 시에 뛰어났고, 박람강기(博覽强記)하여 선진들로부터 경이와 찬탄을 받았다. 도승지에 추증되고, 1778년(정조 2) 정려되었다. 저서로《규천집(虯川集)》3권 1책이 전한다.
둘째 아들 전극념(全克恬, 1597∼1660)의 자는 유안(幼安)이며, 호는 창주(滄洲) 외에 어은(漁隱)이다. 1633년(인조 11) 진사에 합격하고 1637년 경행으로 사산감역관(四山監役官)이 되었으나 벼슬의 뜻을 버리고 은거하여 학문에 몰두하며 후진 교육으로 일생을 마쳤다. 저서로《창주선생문집(滄州先生文集)》2권 2책이 있다.
전식의 아들 중의 하나는 병자호란 때에 실종되었다. 병자호란 중에 행방불명된 아들의 생사를 알지 못해 애를 태웠던 그는 아들이 죽은 것으로 치부하여 가짜 묘까지 만들어 장례를 치를 생각을 했다. 하지만 속환이 시작된다는 소식에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었다. 1637년 4월 심양에 사은사(謝恩使)로 가게 되어 있던 좌의정 이성구(李聖求)에게 아들을 찾아봐 줄 것을 부탁하기에 이른다.
내관직:
홍문관교리(弘文管校理), 예조정랑 겸 기주관지제교(禮曺正郞 兼 記注官知製敎), 대사간 부제학(大司諫副提學), 대사헌(大司憲)
외관직:
울산 판관(蔚山 判官), 전라도 도사(全羅道 都事)
출생지:상주
분묘지:백전산(柏田山)
- 황효헌(黃孝獻, 1491 ~ 1532)
선생의 자는 숙공(叔貢)이며, 호는 축옹(畜翁) 또는 현옹(玄翁)이다. 황희의 현손이며, 부사 황관(黃瓘)의 아들이다. 1514년(중종 9) 별시 문과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로 사가독서를 하였으며, 홍문관직제학,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고, 1526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대사성, 황해도관찰사, 1528년 이조 참의와 이조 참판에 올라 이행(李荇) 등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32년 안동부사로 재임 중 임지에서 갑자기 요절하였다. 담론을 좋아하였고, 풍모가 귀공자 같았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에 뛰어났다.
- 황뉴(黃紐, 1578 ~ 1626)
선생의 자는 회보(會甫)이며, 호는 반간(槃澗)이다. 황준원(黃俊元)의 아들이다. 정경세의 문인이며, 1612년(광해 4)에 생원이 되고, 이듬해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16년에 승정원주사가 되었으며, 1626년(인조 3)에 지평이 되고 1626년 지평이 되고 이어 경성판관이 되었다. 관직 생활 중에는 거취가 분명하기로 정평이 났다.
* 관련인물
- 황희(黃喜), 황맹헌(黃孟獻), 황효헌(黃孝獻), 전식(全湜), 황뉴(黃紐), 채팽윤(蔡彭胤), 이증엽(李增曄), 정종로(鄭宗魯)
퇴계학파,목담영당,옥동서원
◆ 목담서원 [鶩譚書院]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에 있는 서원. 조선 중기의 문신 전팽령(全彭齡, 1480∼1560년)과 전식(全湜, 1563~1642년), 전유를 배향하고 있다.
1765년 지역 유림과 옥천 전씨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1868년(고종 5)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으나, 1936년 복원하면서 영당만을 다시 세웠다. 영당 안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71호로 지정된 '사서공 전식 영정'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후손이 소장하고 있다.
부근에는 전팽령이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지은 양신정(養神亭,충청북도기념물 제29호)'이 있다. 이 정자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828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전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고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조선외교문학집성(연행록편) 연행 가사 연구 > 제1편 연행가사의 해석 > 제6장
◆ 제6장 연행가사와 그 연행록
출생연대순/연행록이름 |
지은이 |
연행한 때 |
연행 연대 |
1552-2 조천록(朝天錄) |
오억령(吳億齡,1552-1618) |
宣祖25萬曆20壬辰 |
1592 |
1552-1 조천록 상,하(朝天錄 上.下) |
민인백(閔仁伯,1552-1626) |
宣祖28萬曆23乙未 |
1595 |
1553 연행록(燕行錄) |
이호민(李好閔,1553-1634) |
光海1萬曆37己酉 |
1609 |
1553 조천일기(朝天日記) |
최기(崔沂,1553-1616) |
宣祖40萬曆35丁未 |
1607 |
1554 신충일건주견문록(申忠一建州見聞錄) |
신충일(申忠一,1554-1622) |
宣祖29萬曆24丙申 |
1596 |
1556-2 황화일기(皇華日記) |
조익(趙翊,1556-1613) |
宣祖32萬曆27己亥 |
1599 |
1556-3 조천록 상,하(朝天錄 上,下) |
이항복(李恒福,1556-1618) |
宣祖31萬曆26戊戌 |
1598 |
1556-1 조천기문(朝天記聞) |
이항복(李恒福,1556-1618) |
宣祖31萬曆26戊戌 |
1598 |
1556-1 조천록(朝天錄) |
조익(趙翊,1556-1613) |
宣祖32萬曆27己亥 |
1599 |
1556-2 은사록(銀槎錄) |
황여일(黃汝一,1556-?) |
宣祖31萬曆26戊戌 |
1598 |
1556-2 조천일승(朝天日乘) |
이항복(李恒福,1556-1618) |
宣祖31萬曆26戊戌 |
1598 |
1556-1 은사록시(銀槎錄詩) |
황여일(黃汝一,1556-?) |
宣祖31萬曆26戊戌 |
1598 |
1556 조천일기(朝天日記) |
이상길(李尙吉,1556-1637) |
光海9萬曆45丁巳 |
1617 |
1558 매창선생조천록(梅窓先生朝天錄) |
정사신(鄭士信,1558-1619) |
光海2萬曆38庚戌 |
1610 |
1559 해사조천일록(海槎朝天日錄) |
오윤겸(吳允謙,1559-1636) |
光海14天啓2壬戌 |
1622 |
1559 조천록(朝天錄) |
유몽인(柳夢寅,1559-1623) |
光海1萬曆37己酉 |
1609 |
1560-1 신해조천록(辛亥朝天錄) |
이상의(李尙毅,1560-1624) |
光海3萬曆39辛亥 |
1611 |
1560-2 정유조천록(丁酉朝天錄) |
이상의(李尙毅,1560-1624) |
宣祖30萬曆25丁酉 |
1597 |
1562 이천상공연행일기(梨川相公使行日記) |
이홍주(李弘冑,1562-1638) |
光海11萬曆47己未 |
1619 |
1563-3 사행록(槎行錄) |
전식(全湜,1563-1342) |
仁祖3天啓5乙丑 |
1625 |
1563-4 속조천록(續朝天錄) |
이수광(李睟光,1563-1628) |
光海3萬曆39辛亥 |
1611 |
1563-2 유구사신증답록(琉球使臣贈答錄) |
이수광(李睟光,1563-1628) |
光海3萬曆39辛亥 |
1611 |
1563-2 사행록(槎行錄) |
전식(全湜,1563-1642) |
仁祖3天啓5乙丑 |
1625 |
1563-3 조천록(朝天錄) |
이수광(李睟光,1563-1628) |
宣祖30萬曆25丁酉 |
1597 |
1563-1 안남사신창화문답록(南使臣唱和問答錄) |
이수광(李睟光,1563-1628) |
宣祖30萬曆25丁酉 |
1597 |
1563-1 사서항해조천일록 (沙西航海朝天日錄) |
전식(全湜,1563-1642) |
仁祖3天啓5乙丑 |
1625 |
1564-3 갑진조천록(甲辰朝天錄) |
이정구(李廷龜,1564-1635) |
宣祖37萬曆32甲辰 |
1604 |
1564-4 병진조천록(丙辰朝天錄) |
이정구(李廷龜,1564-1635) |
光海8萬曆44丙辰 |
1615 |
1564-5 경신조천록 상.하(庚申朝天錄 上,下) |
이정구(李廷龜,1564-1635) |
宣祖28萬曆23乙未 |
1595 |
1564-2 경신연행록(庚申燕行錄) |
이정구(李廷龜,1564-1635) |
光海12萬曆48庚申 |
1620 |
◆ 세대별 퇴계 제자들
1 김성일 유성룡 정구 조목
2 장흥효 김용 유복기/ 정경세 이준 전식 김응조 김윤안 장현광 허목 김해 유종개
3 이시명 김시온 이명익/유진 유원지 신석번 홍호 정영방 장응일 이도장
4 이현일 김방걸 김학배 이동표/유세철 김건 김정 권징 장벽 이익 이원정
5 이재 김태중 권두인 조덕린 유승현/유후장 박손경 최홍원 권구 장대림 안정복 이담명
6 이상정 김성탁 권만 조운도 유정원/유성화 정종로 최홍립 이상진 황덕길
7 남한조 김낙행 유장원 김종덕 이종수/유규 유심춘 이원조 조목수 장주 허전
8 유치명 김양운 유건휴 이야순 이가순/유이좌 유주목 이진상 조상덕 장복추 허훈 이만운
9 김흥락 김도화 유필영 이휘재 권연하/유도휘 유도성 곽종석 이승희 장석영
10 이상룡 김병종 유인식 이만도 김경락/이병헌 하겸진 조긍섭 권상규 김창숙 김황
◆한국 유학의 학통 계승(학맥)
설총(경산)-최치원(경주)-안향(순흥)-우탁/백이정 권보(안동)-이제현(경주)-
이색(외가 영해) 이색-정몽주,이숭인,길재/정도전,권근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정여창,김일손,손중돈-조광조, 이언적--이황
김성일-장흥효-이휘일현일-이재-이상정-남한조-유치명-김흥락 김도화 이상룡 유인식
류성룡-정경세-류진-류원지-정도응-박손경-정종로-류심춘-류주목-허훈,허유
-이원조-이진상-곽종석 이승희-김창숙
정구 장현광-장경우-장응일-장벽-장대림, 장대열-장주-장복추-장석영,장지연
-허목-이하진-
성호 이익 右派 안정복-황덕길-허전-허훈,허유-장지연
안정복-신경준-정상기-최한기-김정호/지리지 편찬 전통/이익-이가환, 이중환
성호 이익 左派-권철신-정약용
정구-이윤우-이도장-이원정,원록-이담명,이한명-(김성탁-김낙행)-이만운
조목-권익창,김택룡,권위,정윤해,이순도,이영도,김해,유종개,배용길,금경,금업,
금개,임흘,조우인,이광윤,김중청,신달도
◆서애파 학맥 계승
1)가학(하회;유원지-유세철-유후장-유성화-유규-유이좌-유도휘/상주 우천 수암파;
유진-유천지 유백지...유심춘-유후조-유주목-유흠목)
2)수제자 가학(정경세-정도응-정종로-정상진 정상리)
3)상주목사 때 제자; 이전 이준 전식 조익(조정은 학봉 질서라서 호파)
4)지역적 인접성;가일(권구 유원지의 외손자 병파),구담 순천김씨 김윤안(화천서원 종향)
오미 오록(김응조,김정 김간 김건 김두흠) 우릉골 예안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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