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11. 12:09ㆍ 인물열전
고종 22년 을유(1885, 광서11)
4월 19일(정해) 맑음
좌목 22-04-19[33]
병비의 관원 현황
○ 병비에, 판서 민종묵(閔種默)은 나왔고, 참판 이호익(李鎬翼)은 병이고, 참의 강찬(姜)은 병이고, 참지 정현영(鄭顯英)은 입직하였고, 우부승지 이용직(李容稙)은 나왔다.
안규진(安奎鎭)을 동지로, 민긍식(閔肯植)을 동지훈련원사로, 이규성(李奎性)을 훈련원 도정으로, 조동훈(趙東勳)을 선전관으로, 조재항(趙載恒)을 내금위장으로, 이긍한(李肯漢)을 겸사복장으로, 이철상(李轍相)ㆍ황낙용(黃樂鏞)ㆍ신재근(申在根)ㆍ박영환(朴永煥)을 오위장으로, 김영제(金寧濟)를 충익위장으로,
전도진(全道鎭)을 충장위장(주1)으로, 박만인(朴萬仁)ㆍ성재영(成載榮)을 창덕궁 위장으로, 김재봉(金在鳳)을 경희궁 위장으로, 하석락(河錫洛)을 훈련원 주부로, 서병선(徐丙善)을 문신겸선전관으로, 권응섭(權應燮)을 전라 병사로, 이순기(李舜器)를 성진 첨사(城津僉使)로, 정기만(鄭基晚)을 황해 중군(黃海中軍)으로, 민유세(閔瑜世)를 통제 우후(統制虞候)로 삼았다. 김인근(金仁根)- 원문 빠짐 - 가설에 이윤용(李允用)을 단부하였다. 선전관 여섯 자리에 심형택(沈馨澤)ㆍ오은영(吳殷泳)ㆍ오찬영(吳瓚泳)ㆍ심하택(沈夏澤)ㆍ이철순(李徹純)ㆍ김범구(金範求)를 단부하였다. 호군에 이기호(李起鎬), 부호군에 정원화(鄭元和)ㆍ이계복(李啓宓)ㆍ이창렴(李昌濂)ㆍ조명하(趙明夏)ㆍ김동운(金東韻), 부사과에 윤용식(尹容植)ㆍ이근우(李謹禹)ㆍ이승원(李承遠)ㆍ염효근(廉孝根)ㆍ오용진(吳龍鎭)ㆍ최기정(崔琦貞)ㆍ박영수(朴永秀)ㆍ이순영(李淳榮)ㆍ전세덕(全世德)ㆍ김규식(金奎植)ㆍ김정욱(金正旭), 부사정에 김교헌(金敎獻)ㆍ김익수(金翊洙)ㆍ김흥집(金興集)ㆍ백남철(白南喆), 부사맹에 심능겸(沈能謙)ㆍ한상빈(韓尙斌)ㆍ김도근(金都根)ㆍ김준필(金準弼)ㆍ서효순(徐效淳), 이상을 아울러 단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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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2년 을유(1885, 광서11)
4월 26일(갑오) 맑음
좌목 22-04-26[38]
병비의 관원 현황
○ 병비에, 판서 민종묵(閔種默)은 나왔고, 참판 이호익(李鎬翼)은 병이고, 참의 강찬(姜)은 병이고, 참지 정현영(鄭顯英)은 입직인데 나왔고, 우부승지 조용하(趙用夏)는 나왔다.
민기훈(閔耆勳)ㆍ조명하(趙明夏)를 첨지로, 이해두(李海斗)를 동지로, 윤석원(尹錫元)을 선전관으로, 유기철(柳冀喆)을 내금위장으로, 오신묵(吳信默)을 겸사복장으로, 이회신(李晦信)ㆍ정만혁(鄭萬赫)ㆍ한성호(韓成浩)ㆍ이용덕(李容德)을 오위장으로, 최효함(崔孝涵)ㆍ최윤악(崔允岳)을 창덕궁 위장으로, 김기영(金基榮)을 경희궁 위장으로, 이계선(李啓善)을 훈련원 첨정으로, 남주원(南周元)을 문신겸선전관으로, 박홍석(朴泓錫)을 수문장으로, 이경식(李敬植)을 남도 참군(南道參軍)으로, 이종갑(李宗甲)을 준원전 수문장(濬源殿守門將)으로, 이윤용(李允用)을 전라 병사로, 조상식(趙相植)을 황해 중군(黃海中軍)으로, 김학영(金學永)을 함흥 감목관(咸興監牧官)으로, 방현익(方顯翊)을 가덕 첨사(加德僉使)로 삼았다. 선전관 가설에 이한영(李漢英)을 단부하였는데, 단부할 일로 전지를 받든 것이다. 동지에 송홍록(宋弘祿)을 단부하고,
첨지에 전도진(全道鎭)을 단부하고, 삼천포 권관(三千浦權管)에 오일붕(吳日鵬)을 단부하였다. 호군에 강문형(姜文馨)ㆍ이재순(李載純)ㆍ이종준(李鍾俊)ㆍ송응래(宋應來)ㆍ김구현(金九鉉), 부호군에 정하원(鄭夏源)ㆍ 황기연(黃耆淵)ㆍ조병필(趙秉弼)ㆍ남숙희(南肅熙)ㆍ이정화(李鼎和)ㆍ한재민(韓在民)ㆍ서재선(徐在璇)ㆍ권응섭(權應燮)ㆍ조희창(趙羲昌)ㆍ구종서(具鍾書), 부사과에 박정근(朴正瑾)ㆍ오윤협(吳允協)ㆍ김정항(金定恒)ㆍ이종길(李鍾吉)ㆍ홍남(洪楠)ㆍ송계현(宋啓賢)ㆍ조인성(趙仁成)ㆍ이성운(李成雲), 이상을 아울러 단부하였다. 부사맹에 이원희(李源禧)ㆍ유석준(柳錫駿)ㆍ김상정(金商貞), 기연해방아문수사별장 겸 대부도진수군첨절제사 남양감목관(畿沿海防衙門水師別將兼大阜島鎭水軍僉節制使南陽監牧官)에 조존억(趙存億)을 단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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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8년 신축(1901, 광무5)
9월 29일(신묘, 양력 11월 9일) 맑음
좌목 38-09-29[10]
내부 주사에 이태영 등을 임용하였다
○ 이태영(李台永), 윤명섭(尹明燮), 정경문(鄭經文)을 내부 주사에 임용하고, 한영원(韓永源)을 군부 주사에 임용하고, 9품 김하정(金夏鼎)을 숙릉 참봉에 임용하고, 9품 김병선(金炳璿)을 화릉 참봉에 임용하고, 9품 김복규(金宓圭)를 선릉 참봉에 임용하고, 9품 남정칠(南廷七)을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임용하고, 6품 임백선(任百璿)을 정릉 참봉(靖陵參奉)에 임용하고, 9품 민병익(閔丙益)을 효릉 참봉에 임용하고, 9품 남성희(南星煕)를 장릉 참봉(長陵參奉)에 임용하고, 6품 서학보(徐學輔)를 휘경원 수봉관에 임용하고,
종2품 김중현(金中鉉), 정3품 전도진(全道鎭), 6품 홍종욱(洪鍾旭), 9품 오두환(吳斗煥)ㆍ송택인(宋宅仁)ㆍ김택룡(金澤龍)을 중추원 의관에 임용하고, 김상규(金相圭), 김원근(金瑗根)을 충청북도관찰부 주사에 임용하고, 이명원(李明源)을 경상남도관찰부 주사에 임용하고, 내부 회계국장(內部會計局長) 이용복(李容復), 내부 참서관 심상익(沈相翊), 의정부 참서관 이도상(李道相)을 겸임 혜민원 참서관(兼任惠民院參書官)에 임용하고, 내부 주사 임학래(林鶴來), 농상공부 주사 이문하(李文夏), 법부 주사 민경호(閔慶鎬), 한성부재판소 주사(漢城府裁判所主事) 이중혁(李重赫), 탁지부 주사 이황원(李潢遠), 의정부 주사 최동식(崔東埴)을 겸임 혜민원 주사(兼任惠民院主事)에 임용하고, 학부 학무국장(學部學務局長) 장세기(張世基)를 겸임 상공학교장에 임용하고, 학부 참서관(學部參書官) 이종태(李鍾泰)를 겸임 한성사범학교장(兼任漢城師範學校長)에 임용하였다.
(주1)충장위[ 忠壯衛 ]
유형 제도
시대 조선
성격 군대
폐지일시 1894년(고종 31)
정의
조선 후기 군공자(軍功者)·납속자(納粟者) 및 전망자(戰亡者) 자손 등으로 편제된 군대.
내용
충장위의 기록이 처음 보이는 것은 1614년(광해군 6)으로서, 이 때 창덕궁 입직(入直) 군사 수가 부족해 충장위 군사로써 각 문(門)의 파수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충장위의 설치는 임진왜란 이후인 듯하다.
초기에는 번차(番次)를 정해 하루 교대로 궁궐 밖 서(西)·북(北) 양영(兩營)에 각각 50인 정도로 나누어 지키면서 외간(外間)을 주야로 감찰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충장위장(忠壯衛將 : 종2품 또는 정3품)을 두었다.
뒤에 이들은 신포(身布)를 감해서 역에 응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충순위(忠順衛)·충찬위(忠贊衛)와 함께 병조의 유청군(有廳軍)에 편입되었는데 1년에 12번으로 나누어 한 달간 근무하고 교체되었다.
처음 설치 당시에는 군공·전몰자의 자손이 편입되었으나, 병자호란 이후 40년이 지난 1675년(숙종 1) 그 자손들이 모두 죽고 200인이 채 안 되었다. 이에 12번으로 교대하면 한번 번을 서는 자가 10여인이었으며, 적을 때는 2, 3인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납속수첩자(納粟受帖者)를 여기에 속하게 하여 납속충장위라 하고 작대(作隊), 수포(收布)하되 3대(代)에 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이후 다시 충장위 소속의 군사 수가 늘어나자 1756년 병조판서 홍봉한(洪鳳漢)의 주장에 따라 이 가운데 60인을 충순위·충찬위와 더불어 유청군에 편성하고 좌·우순청(左右巡廳)에 속하게 하였다.
또, 이들 60인 가운데 실차(實差 : 유사시 임시로 쓰는 정식관원) 30인은 요포(料布)를 정급(定給)하고, 예차(預差 : 유사시 임시로 쓸 예비관원) 30인은 결원이 생길 때 실차로 편입되게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순청에 윤직(輪直)하게 했는데 충장위는 대전 안 동소(東所)에 3인씩 주야로 윤직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납속자 등은 3대까지 병조 유청색에 소속되어 포 1필을 바쳤으며, 이는 병조 소속의 조례(早隷)의 운영 경비에 충당되었다.
그러나 법전에 충장위장 3인이 수록되어 있으나, 충장위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확연하지가 않다. ≪육전조례 六典條例≫에 의하면 정3품 충장위장 3인은 시위와 문장(門將)을 관장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밑에는 위(衛) 15인, 이례(吏隷) 4인이 있는데 그 내역은 서원(書員)·사령(使令)·방직(房直)·군사 각각 1인씩이다.
이 충장위장은 국왕이 대궐에 전좌(殿坐)할 때 위 3인을 이끌고 시위 진참(進參)하며, 종묘사직의 대제(大祭)가 있을 때 문장을 병조의 획출(劃出)에 의해 진참한다고 하였다. 그 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 관제 개혁으로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영조실록』
『비변사등록』
『만기요람』
『대전회통』
『육전조례』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충장위 [忠壯衛]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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