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19. 14:36ㆍ 인물열전
향산집 제15권
묘갈명(墓碣銘)
처사 전공 묘갈명 병서〔處士全公墓碣銘 幷序〕
전장 수학(全丈秀學)이 자신의 부친 귀동 처사(龜東處士)의 묘지명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나는 당시 상소했던 일 때문에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글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대대로 맺어 온 교분을 생각하면 어찌 감히 끝내 저버릴 수 있겠는가.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종윤(宗奫), 자는 붕로(鵬路)이다.
고려 판도판서(版圖判書) 옥천군(沃川君) 유(侑)가 시조이다. 5세를 지나 휘 희철(希哲)이 있으니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사직(司直)으로 있던 장릉(莊陵 단종(端宗)) 병자년(1456, 세조2) 영천(榮川 영주(榮州))의 휴천리(休川里)에 은둔하여 휴계(休溪)로 자호하였으며, 대질(大耋 80세)로서 호군(護軍)에 제수되었다. 다시 3세를 지나 휘 응두(應斗)가 있으니 생원이고, 망동(望洞)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호는 송파(松坡)이다. 고조는 덕구(德久)이고, 증조는 달국(達國)이며, 조부는 상철(尙喆)이다. 부친 일흠(一欽)은 생원이다. 모친 고령 박씨(高靈朴氏)는 천겸(天謙)의 따님이다.
공은 정조 병오년(1786, 정조10)에 태어나 철종 병진년(1856, 철종7) 2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묘는 용상동(龍牀洞) 선영 간좌(艮坐)의 언덕에 합장하였다.
처음에 생원공이 현관(賢關)에 유학하면서 공으로 하여금 족사(族師) 술흠(述欽)에게 학업을 익히게 하였다. 그때 나이 겨우 8세였는데 문장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였고, 특히 쇄소응대(灑掃應對)를 신중히 하여 《소학(小學)》의 법도를 훌륭히 완성하였다.
생원공이 병환으로 서울에서 돌아오자 공은 몸소 약을 조제하면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거상(居喪)할 때에는 예법을 준수하니 노성한 사람처럼 의젓하였다. 생원공이 다음과 같은 훈계를 남겼다.
“네가 공부하지 않는다면 내 아들이 아니다. 박일포(朴逸圃 박시원(朴時源)), 이하계(李霞溪 이가순(李家淳))는 나의 아홉 친구 중 가장 친밀한 사람이니, 모름지기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말에 따라 약관의 나이에 드디어 도산(陶山)의 강석에서 하옹(霞翁)에게 인사를 올리며 선인(先人)의 뜻을 전하였다. 하옹이 한참 동안 슬픈 표정을 짓다가 공에게 강독하던 책을 읽게 하고 크게 칭찬하면서 말하기를,
“이런 아들이 있으니 내 벗은 죽지 않았으이.”
하였다. 그리고 생원공에게 빌렸던 책을 돌려주며 소지(小識)를 적어 면려하니, 공은 눈물을 흘리며 가르침을 받았다.
또 일포공과 석와(石窩 권위(權褘))ㆍ성포(星圃 권보(權補)) 두 권공(權公)에게도 지문(識文)을 이어 써 줄 것을 부탁하여, 가슴에 새겨 실천할 바탕으로 삼았다. 이것이 사우(師友) 간에 가르침을 전하게 된 유래이고 구룡암계(九龍巖契)가 처음 만들어진 이유이다.
집안이 본래 가난하였지만 오래도록 부지런히 주경야독(晝耕夜讀)하니 학업은 더욱 정밀해졌고 집안 형편도 넉넉해졌다. 그러나 영리(榮利)에 대해서는 전혀 욕심내지 않았다.
일찍이 방산(方山)의 남쪽에 대조(大祖)의 제사를 모셨고, 이산서원(伊山書院)을 담당하게 되자 노선생(老先生 이황(李滉))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새겨서 전하였다. 그 외 열두 개의 학사(學舍)도 모두 공의 계획과 생각에서 나왔으니, 문풍(文風)을 진작시킬 방도로 삼았던 것이다.
병자년(1876, 고종13)과 정축년(1877) 흉년이 들었을 때 가난한 친척들을 모으고 식구 수를 헤아려 먹을 것을 공급하여 온전히 살려 주었다. 스승이 돌아가신 뒤 후손이 없자 몸소 스승의 제사를 받들었고 나중에는 마침내 후사를 세우고 도와주었다.
성품은 모나지 않았고 풍도(風度)는 관대하고 너그러웠다. 말하고 침묵함이 법도에 맞아 늠름하고 꼿꼿한 자태를 범할 수 없었으며, 신의(信義)가 널리 미쳐 나와 남을 하나로 보아 전혀 구별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실로 당시의 공론이었다.
부인 야성 송씨(冶城宋氏)는 성환(星煥)의 따님이자 눌재(訥齋) 휘 석충(碩忠)의 후손이다. 공보다 1년 늦게 태어나 17년 먼저 세상을 떠났고, 묘소는 성곡(星谷)의 계좌(癸坐)에 있다.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이 바로 수학(秀學) 씨인데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딸은 박민순(朴民淳)에게 출가하였다.
통정대부의 세 아들은 우열(祐烈), 상열(相烈), 응열(應烈)이고, 두 딸은 이만달(李晩達), 박호구(朴鎬九)에게 출가하였다.
우열의 아들은 규국(奎國)이다. 상열의 양자는 규락(奎洛)이다. 응열의 아들은 규락이며, 세 딸은 김국현(金國鉉), 박시양(朴是陽)에게 출가하였고 막내는 아직 어리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 훌륭한 휴계공이 / 於赫休溪
황야로 물러나 가업을 열었고 / 遯荒啓業
송파공이 선인의 업적 돈독히 하며 / 松坡克篤
따로 은거할 곳 열었네 / 別開薖軸
생각건대 공의 선친께서는 / 惟公先考
빛나는 재주와 학문으로 / 彪炳才學
일찌감치 소과에 급제했지만 / 早歲搴蓮
뜻을 품은 채 돌아가셨네 / 齎志以歿
공께서 삼가 유명 받들어 / 祇奉遺命
선친의 벗에게 학문을 청하니 / 請學先執
호ㆍ유와 같음이 있어 / 有如胡劉
부지런히 훈도하고 이끌어 주었네 / 眷眷導廸
부지런하지 않았다면 어찌 완성했겠으며 / 匪勤曷成
정성스럽지 않았다면 어찌 수립했겠는가 / 匪誠曷立
자신을 수양하여 집안을 다스리고 / 修身及家
이것을 말미암아 확충시켜 나가니 / 由此展拓
기강 바로잡고 문풍 일으켰다는 / 綱紀文風
세상의 평가 내려졌네 / 淸議攸屬
한가로운 곳에서 행한 사업이 / 閒界事業
허리에 찬 패옥보다 화려하였고 / 華於佩玉
선현 빛내고 후학 계도하니 / 光前啓後
영원토록 아름다움 남아 있도다 / 永終有淑
높고 높은 용산에 / 峨峨龍山
소목을 따라 합장하였으니 / 從祔昭穆
그 유풍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 遣風不沫
지나는 자들 반드시 예를 갖추리 / 過者必式
[주D-001]나는 …… 있었으므로 : 향산(響山)은 1905년(고종42)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처벌을 주장하는 장문의 소장을 올렸고, 임금의 비답이 없자 일월산(日月山)의 선영에서 은거하였다. 《響山集 附錄 行狀》
[주D-002]현관(賢關) : 현자(賢者)가 통행하는 관문이라는 의미로 성균관(成均館)의 별칭으로 쓰인다. 《한서(漢書)》 권56 〈동중서전(董仲舒傳)〉에 “태학(太學)은 현사가 거쳐 가는 관문이요 교화의 본원이다.” 한 데서 나왔다.
[주D-003]이것이 …… 이유이다 : 구룡암계(九龍巖契)는 1795년(정조19) 성균관에서 수학하던 영주와 안동의 선비 9인이 함께 귀향하면서 구룡암에 올라 맺은 계회이다. 구룡암은 현재의 경기도 이천시(利川市) 장호원읍(長湖院邑) 부근에 있던 바위로, 9인이 계회를 맺을 때 이름을 붙였다. 계회에 참여한 사람은 이주정(李周禎), 이귀성(李龜星), 유회문(柳晦文), 정약수(丁若琇), 권위(權褘), 권보(權補), 전일흠(全一欽), 박시원(朴時源), 이가순(李家淳)이다. 1806년(순조6) 전일흠의 아들 전종윤이 이가순에게 〈용암유록(龍巖遊錄)〉을 요청하였고 계회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차례로 구룡암의 모임을 기념하는 글을 받아 〈구룡암동유록(九龍巖同遊錄)〉을 엮었다. 《安東의 契, 安東民俗博物館, 2006》
[주D-004]일찍이 …… 모셨고 : 방산(方山)은 영주(榮州)에 있는 산이다. 전종윤이 이곳에 방산서당을 세워 자신의 대조(大祖)인 전희철(全希哲, 1425~1521)을 봉향하였다.
[주D-005]이산서원(伊山書院) : 영주 이산면에 있던 서원이다. 1558년(명종13)에 창건되었으며, 퇴계 이황의 위패를 모셨다. 1574년(선조7)에 사액서원이 되었고, 1868년(고종5)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주D-006]따로 …… 열었네 : 원문의 ‘과축(薖軸)’은 현인이 은거함을 말한다. 《시경(詩經)》 〈고반(考槃)〉에 “고반이 언덕에 있으니 석인의 마음 넉넉하도다……고반이 높고 평평한 곳에 있으니 석인이 서성거리도다.〔考槃在阿 碩人之薖……考槃在陸 碩人之軸〕” 한 데서 나왔다. 고반(考槃)은 은거할 집을 지었다는 말이다.
[주D-007]소과(小科)에 급제했지만 : 원문의 ‘건연(搴蓮)’은 ‘연꽃을 따다.’라는 의미로, 과거에 합격한 것을 말한다. 연꽃의 열매인 연과(蓮果)가 연달아 과거에 합격한다는 의미인 ‘연과(連科)’와 발음이 같기 때문에 과거 합격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며, 연방(蓮榜) 역시 생원시나 진사시에 입격한 것을 말한다.
[주D-008]호(胡) …… 있어 : 호는 적계(籍溪) 호헌(胡憲), 유(劉)는 병산(屛山) 유자휘(劉子翬)를 가리키는데, 두 사람 모두 주희의 부친 주송(朱松)의 벗이다. 주희는 부친의 유명으로 이들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전수받았다. 《朱子大全 附錄 別集 年譜 卷1》
[주D-009]소목(昭穆)을 따라 합장하였으니 : 선산에 묻히는 순서에 따라 장사 지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의 소목은 장사 지내는 곳 좌우의 순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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